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박상우 저 ----- 차 례 ----- <작가 소개> 1.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2. 적도기단 3. 돌아오지 않는 詩人을 위한 심야의 허밍코러스 4. 먹고 사는 일에 관한 명상 5. 한편의 흑백영화에 관하여 그는 말했다 6. 그가 정신분열자라는 기록에 관하여 7. 1989년 겨울, 代役人間 8. 스러지지 않는 빛 <작가 소개> - 박상우 1958년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한 박상우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 등단한 그는 장편소설 <지구인의 늦은 하오>, <섬 그리고 트라이앵글(1) (2) (3)>을 출간했다. 1.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밤 열 시가 가까워질 무렵부터 우리는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취한 게 아니고 그것은 분명히 지쳐가는 거였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비워낸 생맥주잔의 갯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음주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취기와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긴장감이 오히려 가중된 것인지도 혹은 모를 일이었다. 마시다 남겨둔 생맥주잔 언저리에 말라붙은 허연 거품과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인 담배 꽁초가 쾌연하지 못한 좌중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새로운 연대의 벽두, 그리고 21년 만의 폭설을 빙자해서 만나자는 전화를 맨처음 걸어온 사람이 우리 중 누구였던가. 돌아보고 후회할 때는 언제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때였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새로워질 게 없는 시간. 낮은 조도의 갓등 밑에서, 우리 모두의 의식은 그 갓등의 조도만큼이나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가무러져 가고 있을 뿐이었다. 피곤함과 안온함, 차가운 것과 따뜻한 것, 맑은 것과 탁한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따위의 묘한 감정적 기류들이 좌중에서 은밀하게 교차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잠시 뒤에는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엉겨 대단히 묵중한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그때부터 우리는 아무런 뜻도 없는 눈길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기 시작했다. 언어 뒤의 허무. 그리고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케 해 주는 언어 이전의 공감대. 출입문 바깥 쪽에서는 여전히 주먹만한 함박눈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 페기 리의 노래를 들으면 좋을 텐데 ...... 출입문 바깥 쪽의 탐스런 눈송이를 내다보던 우리 중의 하나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굵고 탐스런 눈송이가 녹아, 그의 눈빛을 빈틈없이 촉촉히 적시고 있는 것 같았다. 쟈니 기타? 부유스름한 허공을 올려다보머 담배연기를 피워올리던 다른 하나가 물었다. 퇴폐적이야. 페기 리를 생각하고 있던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묵묵히 앉아 있던 다른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또다른 하나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항상 그렇게 단정적이어야 할 필요가 어딨어? 그만 둬. 맨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하나가 듣기 싫다는 듯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러자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다른 하나가 안경을 밀어올리며 놀란 눈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무엇인가, 얘기가 간신히 맥락을 되찾아 갈 듯하다가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우리가 자리를 함께 한 이후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일이었다. 좌중의 하나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푹 떨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자신이 좌중의 답답한 분위기를 자진해서 시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감하군... 좌중의 하나가 낮게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말의 주인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중얼거림에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난감해 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눈이 밤새도록 이렇게 내리면 내일은 고립되는 곳이 많겠군. 밖을 내다보지도 않은 채 담배를 피워물고 있던 하나가 반쯤 비워진 술잔을 들여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른 둘이 무심한 어조로 그 말의 뒤를 이었다. 21년 만의 폭설이래. 아까 퇴근할 무렵에 주의보가 경보로 바뀌었어.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하나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바짝 긴장된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좌중의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묻지 많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지, 그는 문득 앞에 놓여 있는 맥주잔을 들어올려 기갈들린 사람처럼 그것을 들이켜대기 시작했다. 그냥 집에나 일찍 들어가는 건데... 이 나이에 눈이 온다고 굳이 만나야 하는 건가? 길이나 안 막혔는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모두 남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말이 끊어지고, 다시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침묵의 그늘에서 가끔씩 술잔이 흔들리고, 시간의 여백에서 모락모락 담배연기가 피어 올랐다. 눈(目)을 바늘로 콕 찔러 앞을 못 보게 하면 뭐가 되는 줄 알아? 문득, 좌중의 분위기를 바꿔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 중의 하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글자를 묻는 거야? 시큰둥하게 앉아 있던 맞은편의 하나가 되물었다. 그래 글자로 말해 봐. 모르겠는 걸. 머리를 갸웃거리며 다른 하나가 중얼거렸다. 배워. 백성 민(民)자야. 제기랄, 난 또.... 얘기의 흐름을 말없이 지켜보고 앉아 있던 하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넌덜머리가 날 만도 하다는 표정으로 나머지도 모두 그와 유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소한 농지거리를 통해 그는 무엇을 되살려내려 한 것일까. 불행하게도 이제 우리는 정치적인 관심사를 드러내는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결코 호의적일 수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지난 연대 내내 우리가 정치적인 관심사로 만날 때마다 침 튀기고 핏대 올렸었다는 사실도 또한 반추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반추하지 않아도 되새겨지고, 되새겨질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수치감을 느끼게 하는데, 도대체 어떤 반편이 같은 인간이 그런 것을 또다시 입에 담으려 한단 말인가. 상대적인 모멸감 때문이 아니라, 저마다 키워온 스스로의 환상에 기만당한 것 같다는 자괴감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현실과 환상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다를 수 있는 것일까. 지난 연대 내내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환상에 뜨겁게 사로잡혀 있었고, 이제 그것은 빈틈없이 깨져버린 것이었다. 그 깨어진 환상 속에 우리들의 현실, 우리들의 새로운 연대라는 게 던져져 있을 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새로운 연대라는 또다른 환상 속에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던져져 있는 건지도 혹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새로운 연대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제 우리들에게 있어 정치란 그저 혐오의 대상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당하고 있었으니까-- 혐오의 대상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침을 뱉어주는 그 일밖에 달리 더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었다. 앞으로 내 앞에서 정치의 <정>자도 꺼내지 마. 그런 얘기를 꺼내는 새끼는... 그런 새끼는 그냥 두지 않겠어. 지난 연대가 막을 내리기 서너 달쯤 전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오늘처럼 모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회사를 끝내고 늘 모이는 종로 뒷골목의 생맥주집에 모여앉아, 우리들의 만남이 늘 그래왔다시피, 그날도 역시 정치적인 관심사를 대화의 소재로 삼고 있었다. 그 무렵까지도 우리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정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기울어져 있었으므로 달리 더는 어째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이미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폭발적인 것은 확실히 순간적이고, 그리고 그 끝이 이를 데 없이 허망한 것이었다. 장마철의 쓰레기더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밀려나오던 그 천태만상의 논리와 주의(主義)에 어느 누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혀 달린 인간이면 누구나 주의를 가지고 았는 것 같았고, 입 달린 인간치고 논리없는 인간이 없는 것 같았다.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언제부터 왜 생겨 났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그 무렵의 몸서리쳐지던 정황을 다시 한번 입에 담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시절에 횡행하던 그 수다한 주의를 하나로 뭉뚱그려 <똥통 속의 넝마주의>라고 마냥 비아냥거리며, 그러면서도 우리는 참담한 표정으로 때마다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넝마주이에게도 넝마주의가 있는 시대는 행복한가? 그날 밤 우리들의 모임에서 생겨난 그 최초의 불상사도 결국은 그런 심리적 정황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었다. 모든 것의 연장선상에서, 그날 우리 중의 한쪽에서는 정치에 대해 <이제는>이라는 회의론을 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래도>라는 명분론을 전개해 나갔다. 회의론을 펼치는 쪽에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의 명제를 조목조목 열거했고, 명분론을 펼치는 쪽에서는 도피적 경향과 방관적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시대적 당위성을 강력하게 역설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정치적 논쟁이 그러하듯이 그 양분화 된 주장 자체는 털끝만큼도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회의론 쪽의 공격 목표가 전방위적(全方位的)이라는 것도 결코 새로운 것일 수 없었다. 악에 맞서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악에 물들어가고, 적과 대항하겠다고 나선 인자들이 적을 닮아가고, 무엇을 염두에 둔 무엇이 결국은 그 무엇과 동질화 되어 버리는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회의한다는 것이 어찌 새로운 것일 수 있겠는가. 세상이 어차피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런 말 한마디면 아무런 사족도 더 이상은 필요치 않을 것이었다. 세상이 어차피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모두가 더욱 더 정치적인 관심을 고양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역설의 가능성은,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가 명분론 쪽의 공격 가능성으로 순식간에 돌변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논쟁이 언쟁이 되고, 언쟁이 감정적인 대립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감정적인 대립이 육체적인 격돌로 태도를 바꾸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논쟁을 대표하던 우리 중의 둘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언쟁의 주체가 되고, 그들이 다시 감정 대립의 선봉이 되고, 그러다가 끝내는 멱살잡이까지 벌이게 된 것인데. 놀랍게도 그 모든 진행 과정에 소요된 시간이 불과 한 시간도 되질 않았다. 술잔이 떨어져 깨지고, 탁자가 뒤엎어지고, 드디어 나머지 모두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 중의 둘은 어느새 서로의 역살을 움켜쥐고 정신없이 돌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났을 때, 가방을 들고 먼저 자리를 뜨면서 회의론 쪽의 대표격인 인물이 독 오른 목소리로 모두에게 선포했다. 앞으로 내 앞에서 정치의 <정>자도 꺼내지 마. 그런 얘기를 꺼내는 새끼는... 그런 새끼는 그냥 두지 않겠어. 그날 그 말을 듣고 어째서 명분론 쪽에서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질 않았는지, 그 뒤로도 우리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감지할 수 없었다. 명분론 쪽에 서 있던 당사자마저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으니까, 나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거기에 일종의 심리적 동조의식, 다시 말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어쩔 수 없이 상반되는 견해를 취했지만, 명분론의 이면에도 역시 회의론적인 요소가 다분히 내재돼 있었으리라는 짐작만 어렴풋이 해나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당사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통해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여전히 함박눈이 퍼부어대는 밖을 내다보던 우리 중의 하나가 좌중을 둘러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쪽 구석자리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슨 얘기인가를 은밀하게 주고 받던 둘이 놀란 듯이 머리를 들어올렸다. 나머지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그저 그럴까 어쩔까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은근히 좌중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나 일어나자고 제안한 친구가 가방을 메고 먼저 일어나자 나머지도 하나씩 둘씩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밖으로 나섰을 때 시간은 어느덧 열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시간이 늦었으니까> 라는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생맥주집 출입구 부근에서 한 발짝도 더 내딛지 못한 채, 우리는 한동안 넋나간 사람들처럼 바깥쪽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아무도 어디로 갈까 라고 묻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어디로 가자고 먼저 제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그만 헤어져서 집으로 가자는 얘기를 꺼내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의식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멎어버린 사람들처럼, 그렇게 몽롱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의식의 공백으로 주먹만한 눈송이들이 퍽퍽 소리를 내지르며 무수하게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았다. 어디 가서 한잔 더 할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앞쪽에 서 있던 우리 중의 하나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 제안에 선뜻 동의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뒤쪽에 서 있던 하나가 담배를 피워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곳에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겠다는 거야? 그러고 나서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퍼부어대는 눈발 속으로 자신이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는 그것이 독자적인 결과라는 걸 분명히 하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국도로부터 한 블럭 뒤쪽, 네온사인이 즐비한 유흥가 골목은 예상 밖으로 썰렁했다. 초저녁에 물결을 이루며 넘실거리던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는 네온사인의 불빛들만 졸듯이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쏟아져내리는 눈발 속에서 그 불빛들이 잘게 부서지고, 그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형행색색의 눈꽃이 되어 곳곳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국도를 향해 아주 천천히 우리는 걸음을 옮겨놓았다. 서로의 보폭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하나는 앞서 가고, 둘은 그 뒤를 따라가고, 나머지 셋은 앞선 자들이 가는 길을 그저 따라가는 듯한 형국이었다. 서로 말을 주고 받으여 걷는 사람도 없었다. 하나같이 묵묵히, 그러면서도 무거운 등짐을 짊어진 사람들 같았다. 얼핏얼핏 내리는 눈발 속으로 어제의 우리들이 다가오고, 다가오다가 순간적으로 등을 보이며 멀어져 가기도 했다. 어제까지 어깨를 겯고 걷던 길이 오늘 갑자기 낯설게 여겨지는 이유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무런 거리감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숨막히는 단절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를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잃어버린 것과 앞으로 잃어버릴 것. 그리고 다가오는 것과 멀어져가는 것. 그런 것들 속에 낯선 우리들이 던져져 있었기 때문이없다. 어떻게 할까? 맨 앞에 서서 걷던 친구가 전철역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물었다. 무엇인가, 어쨌거나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라는 표정을 그는 짓고 있었다. 어쩔까? 어디 가서 한잔 더 할까? 우리 중의 하나가 나머지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이 아주 잘게 부서져 눈송이보다 가볍게 허공으로 폴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 물음에 익숙한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2차, 3차, 신명나는 대로 술을 마시러 몰려다니던 그때가 언제였던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질 못한 채, 우리는 허전한 모습으로 한동안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서 있었다. 젠장, 어디 가서 한잔 더 하자구! 짜증스럽다는 듯이 우리 중의 하나가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그의 제안에 나머지가 동의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그때 우리 중의 하나가 결연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난 안 돼. 안 돼? 우리 중의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모임에서 과감하게 이탈하려 한다는 게 사뭇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내일 이사해야 돼. 어디로 가는데 ? 우리 중의 또다른 하나가 되물었다. 벽제. 이미 마음을 굳힌 듯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지극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가봐야겠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또다른 하나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먼저 갈게. 손을 한번 들어보이고, 그러고 나서 그는 곧바로 지하 전철역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깊은 충격을 받은 듯 나머지 모두가 예리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고, 이윽고 그의 뒷모습이 사라져버린 뒤에는 갑작스럽게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난 연대에 관한 우리들의 기억 속에 언제 저런 독자적인 이탈이 있었던가. 겨울나무로 가자. 망연함을 일깨우듯 그때 우리 중의 하나가 행선지를 제시했고, 그제서야 우리는 파란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빠른 걸음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국도는 이미 그 노면이 빈틈없이 얼어붙어 있었고, 그것은 인도로 올라선 뒤에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궁형으로 휘어진 인도를 따라 잠시 걸은 뒤에 우리는 다시 한번 횡단보도를 건넜다. 우리가 종로통에서 만날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들르곤 하는 목조 카페가 바로 그 건너편의 이층 건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옷에 달라붙은 눈을 털어내머 그 낡은 카페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곳은 이미 파장머리에 이르러 있었다. 두어 테이블에 손님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종업원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실내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쩌죠? 카운터에 앉아서 계산을 하고 있던 젊은이가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아주 잠깐 동안 차나 한 잔씩 마시고 가겠다는 우리들의 요구를 그는 끝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정말일까, 그게? 커피 다섯 잔이 아주 빠르게 날라져 왔을 때 우리 중의 하나가 입을 열었다. 뭐가? 담배를 꺼내 물던 다른 하나가 되물었다. 이사한다는 거 말야. 글쎄, 전에 듣긴 들었어. 하지만... 뭔가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다른 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 이탈된 존재 하나가 모두의 마음을 여전히 불편하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걸 반영하기라도 하듯 그 얘기는 모두의 입에서 끊이지 않고 한마디씩 흘러나왔다. 이렇게 눈이 오는데 어떻게 이사를 한다는 거야? 글쎄.... 개썰매로 하려는 모양이지 뭐. 아무래도 거짓말 같애. 그럼? 뭘 물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젠장, 이럴 걸 뭐하러 만나자고 해? 솔직히 말해 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어. 누구는 흥미가 있어서 왔는 줄 알아? 우리들의 만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 그럼 이게 친목계인가? 빌어먹을, 구역질나는 정치 얘기 안 하면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잖아? 구속감을 느끼면서까지 만날 필요는 없어. 먼저 간 그 친구가 차라리 솔직한 건지도 모르지. 골치 아파. 제발 그만둬... 지난 연대가 막을 내리기 서너 달쯤 전에 생겨난 그 뜻하지 않은 불상사로 인해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만나지 못한 이면에, 사실은 만나지 않으려는 묵계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몸 담고 사는 이 땅덩어리의 비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세계가 축제의 물결로 떠들썩한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가 몸 담고 사는 이 땅덩어리만 그런 흐름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깊은 무력감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치적인 관심사로 한때 내남없이 침을 튀기고 핏대를 올리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대신 증권과 부동산, 고스톱과 포커, 그리고 방중술(房中術)과 포르노에 관한 얘기로 시간의 공백을 메꿔나가는 걸 목도할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그렇게 정신적으로 도태되어 가는 사람들까지 한동아리로 싸잡아, 세상 전체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간혹 정치를 입에 담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곳곳에서 야유와 조소와 욕설이 퍼부어져서 말한 사람만 면괴스러워지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겨울은 깊어가고 있었고, 그러면서 한 연대는 허망하게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연대가 막을 내리던 마지막 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있던 그날 밤 이후 근 서너 달 만의 만남이었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망년이 아니라 망년대(忘年代)를 빙자한 만남이었지만, 그날 우리가 확인한 것은 다만 한 가지, 우리가 대화의 소재를 상실하고, 그 상실감 때문에 서로에 대해 깊은 단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날 우리는 의도적으로 정치 얘기를 회피했다. 망무두서(茫無頭緖)한 가운데, 그리하여 그날 우리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밑도끝도 없는 잡담으로만 일관되었다.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았던가. 고스톱과 포커, 볼 만한 포르노와 폭력물, 그리고 구천일심(九淺一深)의 테크닉과 미아리 텍사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주고 받던 바로 그런 얘기들이었다. 어느 순간인가 우리 중의 하나가 이탈리아의 국회의원 치치올리나를 입에 담았지만, 그것도 역시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포르노 여배우로서> 라는 단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난 다음의 입길이었다. 그렇듯이 모든 얘기를 의식하면서 해야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을 우리는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 말고 달리 더는 아무 것도 통용되질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의미 없는 말만 통용되는 시간. 그리고 의미 있는 말이 철저하게 통제당하는 공간, 그러나 그런 시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통제하는 인위적인 힘의 정체를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에 대한 자유로움을 통제하는 적이 과연 우리 중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끈질기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내부의 적이 분명하리라는 것! 불행하게도 그날 우리가 확인한 것은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이 혐오였건 증오였건 혹은 저주였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가 우리를 의식하게 되었다는 그것만이 우리들에게는 분명한 현실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막을 내리는 연대와 막을 올리는 연대가 우리와 무슨 상관 있으며, 그동안 부질없이 부풀려온 시대에 대한 열정, 정치에 대한 기대감, 또는 변혁에 대한 설레임 따위들이 이제 더이상 우리와 무슨 상관 있겠느냐는 합의점에 우리 모두는 묵시적으로 동의했다. 어제 말하던 것을 오늘 말하지 않는다는 게 깨달음의 결과라면, 그렇다면 오늘 말하지 않는 것을 어제 말했다는 건 고스란히 무지망작의 소산인가? 우리는 어제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오늘을 통해 내일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겨진 게 있다면 그저 어제의 열정을 수치스러워하는 우리들,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부질없어 하는 우리들이 남겨겨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공감대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더이상 우리가 만나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 그날 술자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우리 중의 하나가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이런 발언을 했다. 이게 내 가슴에 남겨진 건 극단적인 허무뿐이고, 그리고 그 허무 속에서 끝끝내 되찾고 싶은 건 인간적인 낭만뿐이야. 그리고 나머진 아무것도 없어 ...... 카페에서 서둘러 커피를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 눈발은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그칠 눈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우리 중의 하나가 결별을 하듯이 손을 흔들고 떠났다는 것만이 우리들에게는 폭설보다 더한 폭거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었다. 관습이 낯설고 혼란스럽게 여겨질 때, 그때 사람들은 떠나는 모양이었다. 익숙해진 것에서 생겨나는 배반감을 견디지 못한채, 낯선 것을 수용하려는 마음의 여지를 털끝만큼도 마련하질 못한채, 그렇게 말없이 떠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횡단보도로 거의 다가갔을 때 때맞추어 녹색 신호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 몇몇이 연신 좌우를 살피며 빠르게 길을 가로질러갔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건너편 인도로 당도하기도 전에 붉은 신호등이 들어왔다. 붉은 신호등이 들어온 뒤에,그때 비로소 우리는 앞서 걷던 우리 중의 하나가 건너편 인도에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걸 볼 수 있었다. 빨리 건너오라는 시늉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시간과 거리로 해결될 문게가 결코 아닌것 같았다. 아주 먼 곳, 영원히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는 그런 곳에 그가 서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나도 갈래. 그때 우리 중의 하나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분명한 어조로 이탈을 선언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고, 그것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집에 가서 포르노를 보는게 낫겠어. 그러면서 그는 길 위쪽으로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 위쪽에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 몇몇이 몰려 있었다. 그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다시 길 건너편을 향하자 그쪽에 서 있던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가겠다는 신호였다. 개자식들...... 갈 테면 가라지. 남겨진 우리중의 하나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짓씹어 뱉았다. 셋 중의 하나였다. 여섯 가운데 정확하게 반이 떠나고 반이 남겨진 셈이었다. 그러나 이게 더이상 남겨진 셋 중에 떠나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묘한 결속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런 결속감으로부터 이미 떠난자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려는 새로운 공감대가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대단히 빠른 속도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셋도 <우리>가 아닌가. 신촌으로 가자. 우리 중의 하나가 전혀 새로운 표정으로 제안을 했다.거기? 나머지 둘이 합창을 하듯 거의 동시에 되물었다. 그래, 거기가서 신나게 마시고 기분 풀자구. 좋아 ! 진작에 이런 식으로 나갔어야지. 뒤늦게 신바람이 올라서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는 신촌방향의 국도에 이르러 택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이 그때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앞에서 멎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윈도우를 내리면서 운전석에 앉아 있던 젊은친구가 물었다. 자가용 영업을 하는 족속인 모양이었다. 신촌! 타고갈 생각이 있다는 듯이 우리 중의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꾸했다. 만 원 주세요. 길이 형편없어요. 오천 원 ! 에이, 그렇게야......육천 원 주세요. 결국 그 정도를 받을 요량으로 그는 처음부터 만 원을 부른 것 같았다. 타자! 흥정을 하던 친구가 먼저 차에 올랐다. 차로 달려봤자 십 분 거리도 안 될 곳을 육천 원씩이나 주고 가면서도 우리는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부담스런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그리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조금씩 들떠가기 시작했다. 낯선 환상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느끼게되는 이상야릇한 설레임이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세번째 목적지로 정한 카페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처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 왔구나....,..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대뜸 그런 느낌에 사로잡혀 버렸다. 후끈한 열기가 먼저 밀려나오고, 그 다음에 싸늘한 시선들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배타적인 눈빛들이 그 어둠침침한 실내로부터 우리가 서 있는 출입구 쪽으로 끊임없이 밀려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음악이 멎고 숨막히는 정적이 밀려들었다.팽팽한 긴장감이 극을 향해 치닫는 순간이었다. 그 잠깐 동안의 정적이 우리에게는 영원인 것처럼 여겨져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들처럼, 어째서 우리가 그들에게 철저한 배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입장은 그들도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들의 느닷없는 출현이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 놀라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깨고 나서 돌아보면, 절정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던가. 허무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이성의 오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그것을 볼 수 있는 뜻하지 않은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었다. 단지 그것일 뿐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쩐 일이에요? 모두들 한동안 안 나타나더니...... 이윽고 주인여자가 우리가 서 있는 출입구 쪽으로 나타나면서 어설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상당히 취한 얼굴이었다. 이상한 풍경이로군요. 실내를 휘둘러보며 우리 중의 하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일 파티를 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아홉 시부터 다른 손님은 하나도 안 받았어요. 어색하겠지만 저쪽 구석자리에서 한잔 하실래요? 가장 구석진 자리를 그녀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 자리로구만. 뜨악한 표정으로 우리 중의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머지 둘을 돌아보았다. 그리로 가 앉자는 표정이었다.그리로 가 앉자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왜 세 분만 왔죠? 병마개를 따면서 주인여자가 물었다. 셋이 오면 안 되나요? 우리 중의 하나가 표정 없는 얼굴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여자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안 될 건 아무것도 없죠. 하지만 오늘은 오래 마실 수 없어요. 폭설이 내리는 밤이니까...... 우리들의 의표를 찌르는 듯한 말을 남기고 그녀는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폭설이 내리니까, 이런 날 만나서 한잔 하자던 우리들의 약속은 이미 어제의 일이 되어 있었다. 이미 열두 시가 넘어 있었던 것이다. 오나가나 찬밥 신세로구만...... 우리중 하나가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그때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출현으로 그것이 잠시 중단돼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대 아름다운 생일날 종소리 울리는 저녁...... 잔을 비우고 나서 우리는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크가 놓인 테이블을 중심으로 이 십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았다. 그 파티석상의 한쪽 구석자리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여자 하나가 우리 쪽을 건너다보며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안면이 있는 여자였다. 우리가 여섯이었을 때,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안면을 익힌 여자였다. 어떤 종류의 기대감도 허용할 수 있었던 시절, 그리고 그 기대감을 위해 뜨거운 열정을 구사해도 전혀 과하게 여겨지지 않던 시절...... 우리가 여섯이었을 때, 이 카페에서 몇 번인가 자리를 함께 한 여자였다. 그 여자를 보고, 또한 그 여자와 함께 어울려 있는 사람들을 건너다보면서, 엉뚱하게도 우리는 광기로 얼룩진 지난 연대를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고,그 모든 것이 참담한 자괴감으로 되돌려진 오늘의 현실을 또한 비감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섯이었던 우리. 그리고 지금은 셋만 남겨진 우리. 응집된 환상이 역사를 만들고, 그 환상이 깨어진 뒤에 인간들은 자아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 간다고 말한 사람이 우리 중 누구였던가. 지난 연대의 마지막날 만났다 헤어진 뒤로 우리는 또다시 소원한 시간을 보냈다. 지난 연대의 마지막날 우리가 서로에게서 확인했던 그 허망한 단절감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남을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혹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만남을 의식적으로 기피한다 해도 그것은 어차피 정신적인 짐일 수밖에 없었다. 만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강렬하게 의식한다는 것. 우리는 이제 <우리>라는 그 무형의 집단의식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아주 이상스런 존재들이 되어 있었다. 지난 연대 내내 우리의 만남을 지탱시켜 온 버팀목이 정치적 관심사였다는 것이야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그 버팀목이 사라져버린 현실 속에서의 우리는 과연 어떤 형태로 잔존할 수 있을 것인가 -- 그것이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우리 모두에게 상당한 중압감으로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런 와중에서도 시간은 무시로 흘렀다.수은주가 영하로 곤두박질치고, 칼바람이 깊은 밤의 적요를 잔인하게 난자하는 아스스한 날들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새로운 연대에 거는 기대>라는 활자들이 곳곳에서 쏟아져나왔고, 아주 짧은 순간 뒤에 그것들은 도처의 길바닥에서 학살당한 시신들처럼 흉칙스럽게 나뒹굴곤 했다. 그런 나날이 새로운 연대를 더욱 남루하게 만들어나가던 어느날...... 느닷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룻밤 만에 대설주의보가 대설경보로 바뀌고, 그리고 그 말미에 21년 만의 폭설이라는 새로운 기록이 덧붙여졌다. 그 느닷없는 폭설이 우리 모두에게 그토록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눈이 내리니까, 눈이 너무나도 신나게 내리니까, 그러니까 이런 날 만나서 부담없이 한잔 하자는 제의였다. 그 제의는 받아들여졌고, 당연한 것처럼 우리는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새로운 연대가 시작되고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난 오늘, 그렇듯 한심스럽게 우리는 폭설을 빙자해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무엇인가를 빙자해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무엇인가를 빙자하지 않고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우리가 이미 그런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모른다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제 파티는 끝났습니다.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리며...... 모든 참석자들에게 사회자가 아주 여러번 감사를 드리며 오래지않아 파티는 막을 내렸다. 그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면서 우리도 또한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그들이 그곳에 있었으므로 우리도 또한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보다도. 우리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오로지 그들에게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식의 방기 상태를 다시 한번 방기하면서,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계산할게. 사람들이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밖으로 나가고, 누군가를 부르고 하는 그 소란스런 와중에 우리 중의 하나가 카운터로 갔다. 그리고 그가 계산을 하는 동안 나머지 둘은 초대받은 사람들 틈에 뒤섞여 먼저 밖으로 나왔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그때까지도 눈은 계속해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아, 미치겠어. 이 눈 좀 봐. 이 눈......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면서 여자들이 무시로 탄성을 내질렀다. 골목을 벗어나자 요란스런 엔진 소음과 함께 곳곳에서 뽀오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초대받은 손님들 중 상당수가 자가용을 몰고온 모양이었다. 승용차를 장갑차로 착각하는 건가? 이런 날, 빌어먹을......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둘 중 하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차가 힘이니까. 카페가 있는 골목을 들여다보며 나머지 하나가 짧게 말했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 하자 나머지 하나가 전혀 다른 상황을 우려했다. 돈이 부족한지도 모르겠군. 그러면서 둘이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려 할 때, 때마침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아직 안 가셨어요? 카페 주인여자였다. 그녀가 놀라는 눈으로 둘을 쳐다보는 순간, 어디선가 무더기진 눈이 땅바닥으로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털퍼덕, 느닷없이 어둠을 뒤흔들었다. 계산 끝내고 아까 나가셨어요. 아마 저쪽 블럭으로 나가신 모양이로군요.하지만 이제는 어차피 헤어질 시간이잖아요? 말을 마치고 그녀가 사라진 한참 뒤까지도 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셋이었던 우리가 둘만의 우리로 변해가는 데 소요된 시간-- 어쩌면 그것은 체념을 반영하는 최소한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결국은 모두 다 사라져가는구만......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길이 아닌지도 모를 길을 간신히 빠져나가면서, 우리중의 하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둘이잖아.아니 둘이니까 아직 우리잖아. 안 그래? 나머지 하나가 말을 마치고나서 다른 하나를 돌아보았다. 우리? 하긴...... 둘도 우리는 우리지.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빵! 빵! 빠一앙! 뒤통수를 후려치듯, 그때 등 뒤에서 느닷없이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표정으로 우리가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이번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엄청나게 밝은 빛살이 밀려들었다. 그 엄청난 광량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어서 그 라이트를 끄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꺼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우리가 옆으로 비켜나 눈살을 한껏 찌푸리머 승용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얼핏 보니 여자 혼자서 운전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좀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우리가 다시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가 윈도우를 내리며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바로 얼마 전에 카페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우리를 건너다 보던 여자-- 우리가 여섯이었을 때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안면을 익힌 바로 그 여자였다. 우리가 다가가자 아주 짧게, 그녀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타요. 우리의 행선지를 묻지도 않고 자신의 행선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운전에만 신경을 썼다. 조심스럽게 서행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 빈번하게 차체가 엉뚱한 방향으로 미끄러지고, 그러다가 가끔씩은 헛바퀴질로 심하게 몸부림을 쳐대곤 했다.어디로 가는 거죠? 즐비한 수은등, 눈덮인 가로수,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는 낯선 풍경을 내다보면서 우리 중의 하나가 여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 대신 질문을 우리에게 건네왔다. 술 한잔 더하고 싶지 않으세요? 난감한 표정으로 우리 중의 하나가 되물었다.이 시간에 술을 마실 만한 곳이 있습니까? 그녀가 곧바로 대답했다.샤갈의 마을로 가면 돼요. 샤갈의 마을? 거의 동시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한 여자가 백미러 속에서 독락(獨樂)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차가 다시 국도로 접어든 뒤에 우리 중의 하나가 느닷없이 다른 하나의 옆구리를 툭 쳤다. 저게 뭐지? 눈발이 춤을 추듯 너울거리는 희붐한 허공에, 마치 떠 있는 것처럼 거대한 굴뚝 하나가 솟아올라 있었다. 글쎄, 뭘까? 연기도 나오데 ...... 우리가 망연한 눈길로 그것을 올려다보는 사이 차는 좌회전을 했고, 그와 동시에 그 굴뚝은 우리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당인리 발전소예요. 좌회전을 하자마자 곧바로 차를 세우며 그녀가 말했다. 보이죠? 밖을 내다보니 주택가 골목 어귀에 그때까지도 문을 닫지 않은 수퍼마켓 하나가 있었다. 내려서 술을 사세요. 왜 그곳에다 차를 세웠는지, 그제서야 우리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중의 하나가 차에서 내려 술을 사러 가자 그녀도 곧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수퍼마켓을 지나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이내 모습을 감춰 버렸다. 어디 갔어 ? 술을 사러 갔던 우리 중 하나가 돌아와 그녀의 부재를 의아해 했다. 글쎄......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 녹이러 갔구만? 오줌? 그래.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풋, 우리는 거의 동시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도망가지 않을 거지 ? 그러다가 문득 표정을 바꾸며 우리 중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페에서 도망간 친구를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젠 도망갈 길도 없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다른 하나가 말했다. 내일은 교통두절되는 곳이 많겠어. 눈밭이 되어버린 국도를 내다보며 우리 중의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든 길이 다 막혀 버렸으면 좋겠어, 차라리...... 다른 하나가 등받이에다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때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우리 중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도 싸고 오네, 젠장...... 그로부터 거의 십 분 동안 우리는 한 여자가 자신의 승용차를 불도저처럼 몰면서 주택가 골목길의 눈을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가는 걸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밀려나가던 눈이 보닛 위로 올라오고, 드디어는 전면 유리까지 뒤덮어올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차는 멎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놀라운 뱃심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람보가 봤으면 여보하자고 하겠구만...... 차에서 내려서자마자 우리 중의 하나가 설레설레 머리를 뒤흔들었다. 차가 정차한 곳은 골목 끄트머리에 있는 어느 연립주택 옆이었다. 여기가 샤갈의 마을인가? 그 연립주택에 그녀의 거처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찌된 셈인지 그녀는 연립주택의 캄캄한 지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그 지하의 어느 철문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했다. 제 작업실이에요.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몇 가지의 허섭쓰레기들을 제빨리 주워내고 난 뒤에 그녀는 비로소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냉기가 가득한 그 실내로 들어섰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벽에 걸린 여러 개의 그림 액자들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림들...... 모두 다 샤갈의 그것들이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여자라는 얘기를 들었던 아주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아주 잠시 어설픈 자세로 서서 우리는 그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리다 만 몇 개의 풍경화가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었고, 그 옆으로 침대와 작은 책장, 전축, 탁자, 소형냉장고 따위들이 올망졸망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같은 문외한들의 눈으로 얼핏 보기에도 그곳은 작업에 몰두하는 화가의 전문적인 화실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뭐랄까. 그저 그림을 <그린답시고> 만들어 둔, 일테면 그런 자기과시용 화실이지 싶었던 것이다. 자가용까지 있는 여자가 난방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은 작업실에서 겨울내내 호호 입으로 손을 녹여가며 그림을 그린다? 침대에는 시트 대신 두꺼운 솜이붙이 덮여 있었고, 그 밑으로는 전선이 연결돼 있었다.아마도 이불 밑에 전기장판을 깔아 둔 모양이었다. 추우니까 술을 빨리 마시세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그녀와 마주앉았을 때, 술병을 따면서 그녀가 말했다. 위스키 한 병과 맥주 다섯 병의 마개를 그녀는 모조리 따버렸다. 위스키는 우리가 산 것이고, 다섯 병의 맥주는 그녀의 작업실에 있던 것이었다. 여기가 마지막 기착지인가? 여자가 잔에다 위스키를 따르는 동안 우리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물었다. 그냥 이쯤에서 파묻혀 버리고 싶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하나가 대답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금 이순간 세상에 엄청난 폭설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남겨진 우리 두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안온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중요한 건 오로지 그것뿐인 것 같았다. 그런 정신적인 안정감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은 잊거나 체념하고 싶었다. 설령은 그것이 한심스런 매몰욕구라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는 결과보다도, 우리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가고 있다>는 과정이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혀댄 때문이었다. 둘이 남겨졌을 망정, 이제 더이상 그런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써 우리는 얼마든지 마음의 평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내일은 몰라도 적어도 오늘은 그럴 수 있을 것이었다. <흩어졌다>는 결과가 아니라 <흩어져가고 있다>는 과정 때문에 수다한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지금은 그런 허망한 연대의 벽두가 아닌가. 추우니까 빨리 마시라는 여자의 얘기 때문이 아니라, 비로소 회복되기 시작한 정신적인 안정감 때문에 우리는 술을 빨리 마셨다. 술이 아니라 정신적인 안정감이 결국은 추위를 잊게 해준 셈이었다. 이른 저녁부터 상당량의 술을 마셔온 셈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그제서야 비로소 후끈거리는 취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가끔씩 여자가 지난 연대의 우리 모습을 되새기게 하는 얘기를 꺼냈지만, 우리는 그저 들어주기만 했을 뿐, 얘기의 전개를 허용할만한 어떤 종류의 빌미도 더이상은 만들어 주질 않았다. 당신들 여섯이 몰려와 노래를 부르던 그날밤, 지난 연대에 그 카페에서 만난 당신네들과 비슷했던 사람들, 혹은 당신네들이 정치 문제로 격론을 벌일 때...... 라는 식으로 여자는 가끔씩 입을 열었지만, 대부분의 얘기가 우리 두 사람의 의도적인 비협조로 인해 막을 올리자마자 곧바로 다시 내려야 하는 형국이 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것이 답답했던지 여자는 자주 담배를 피웠고, 담배연기를 내뿜는 횟수만큼이나 빈번하게 술잔을 비워냈다. 주량이 상당한 모양이죠? 건네는 잔을 단 한 번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에게 어느 순간인가 우리 중 하나가 물었다. 첫 남자가 가르쳐 준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주량이 대단했군요? 우리 중 다른 하나가 홍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때는 마시는 법만 배웠어요. 주량은 그 남자가 떠난 뒤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거니까...... 한숨을 내쉬듯,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서 아주 길게 담배연기를 허공에다 내뿜었다. 구체적인 사연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아주 커다란 공동처럼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우리는 상당한 것을 직감적으로 시사받을 수 있었다. 취기가 오를수록 무엇인가가 절실해지는지, 그녀는 생각날 때마다 한번색 오디오에다 테이프를 꽂았고, 또 때로는 그것을 끄고 혼자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녀가 반복적으로 듣는 노래는 단 한 곡뿐이었다. 그게 무슨 노래냐고 우리 중의 하나가 묻자 여자가 한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탁자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스콜피온스. 그게 제목이요? 우리 중의 하나가 되묻자 그녀가 다시 덧붙였다. 스틸 러빙 유. 고개를 숙인 채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때부터 여자는 계속해서 그 말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스틸 러빙 유, 스틸 러빙 유......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는 전에 들었지만, 진짜 하는 일은 뭡니까? 여자의 감정이 상승과 하강을 몇 번인가 반복하고 난 뒤에 우리 중 하나가 물었다.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들고 아주 몽롱한 눈빛으로 우리를 건너다보며 피식 웃었다. 하는 일? 글쎄, 하는 일이야 많죠.하지만 어떤 일을 해도 <한다>는 실감이 안 난다는 게 문제이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많이 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럭저럭 사는 거로군요? 우리 중 하나가 비아냥거리듯 되받아쳤다. 그럭저럭 ? 그럭저럭이지. 그럭저럭 아닌 게 어딨어 ? 아주 심드렁한 표정으로 여자는 말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표정을 바꾸며 자신의 얘기에 엉뚱한 단서조항을 달았다. 나이 사십이 될 때까지만 그렇게 살아볼 거예요. 그렇게 살아본 뒤에는? 상당히 취한 목소리로 우리 중 하나가 그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치기어린 감상이나 저열한 의식의 사치쯤으로 그녀의 얘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할 일이니까...... 지금은 대답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듯 그녀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때까지 이런 식으로...... 이렇게 혼자 살겠다 그겁니까? 그녀가 피우는 담배의 필터에 분홍빛 루즈가 묻어나는 걸 유심히 건너다보던 우리 중 하나가 다시 물었다. 혼자 살지만 사랑을 하죠. 대답을 하고 나서 그녀는 손을 들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재빨리 뒤쪽으로 쓸어넘겼다. 그 표정이 마치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그것 같았다. 혼자 살지 않아도 사랑은 할 수 있을 텐데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 중 하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두 눈을 치뜨면서 분노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반말을 했다. 말장난 하지 마. 당신들이 지금 둘이라 그건가? 둘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셋이나 넷, 혹은 다섯이나 여섯은 또 무슨의미가 있는데? 난 솔직히 말해 당신네들이 그 카페에서 매번 떼를지어 몰려와 떠들어대는 걸 들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혐오했었는지 몰라.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 아주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계속해서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 기세인 것 같았다. 그때 우리 중 다른 하나가 재빨리 그것을 제지했다. 그런 쪽으로 얘기가 전개돼 나가는 걸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젠 여섯이 아니에요. 보다시피 이젠 이렇게 둘만 남았어요. 그러나 그녀는 더욱더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결국은 둘도 안 남는다는 걸 알아야지. 결국은...... 당신은 이성보다 감성이 강한 여자로군요...... 한동안 침묵이 흐른뒤에,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우리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사람의 생은 언제나 고달픈 법이에요...... 머리를 떨구고 있던 다른 하나도 중얼거렸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질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만 망연하게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무게가 더해지고, 오래지 않아 실내의 모든 것들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먼 곳에서 휘몰려오거나 혹은 먼 곳으로 휘몰려가는 듯한 바람소리가 가끔 들리고, 그 처연한 웅웅거림에 귀를 세우면 그때는 또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방이 적연부동(寂然不動)했다. 짓눌리고 비틀린 기억의 잔상들마저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아득하게 밀려나가고, 오래지 않아 남겨진 우리 둘의 의식에는 드넓은 여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비록 둘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로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의식이 지워져 나가는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안간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따금 여자 혼자서 술을 마시는 소리, 그리고 공허롭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먼 데서 오는 여음처럼 희미하게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그가 보고 싶어요. 누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줄 수 없나요? 내가 그를 기다린다고......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서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잘게 부서져, 남겨진 우리 둘의 등판 위로 눈처럼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잠시 뒤에 우리는 여자가 마지막 신음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춥고 배고파. 그리고 남자와 자고 싶어 ...... 붉은 태양과 흰 염소, 그리고 한다발의 꽃과 두 여인, 옹망졸망하게 눈덮인 마을과 헐벗은 겨울나무의 풍경들이 아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런 풍경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여자가 어깨를 두드리는 소리, 머리를 떨군 채 의식을 잃어가는 둘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깨우는 소리가 꿈 속에서인 것처럼 아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몽중에 그러는 것처럼, 그때 우리 중 하나가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나머지 하나의 손을 필사적으로 거머쥐었다. 2. 적도기단 --- 영혼이 무기력해지는 적도기단, 그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시를 쓰지 못한다. 1. 대기 하라 ...... 오전 아홉 시경에 그들에게 구두로 전해진 명령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언제까지, 어떤 식으로 대기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는 애초부터 없었다. 참으로 막연한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명령이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하달되어진 것인지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분명한 사실은 단지 그것이 명령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대기하고 있던 그 두 시간 동안, 그들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열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기별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그 명령이 잘못 전달되어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설령 제대로 된 전달이었다 할지라도, 그 명령에 사용되어진 어휘만은 분명 잘못 택해진 것임을 그들은 서로에게서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어휘 선택이 아무리 잘못되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명령이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대기라는 게 정확하게는 무슨 뜻이죠?" 일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회를 기다린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상병이 기계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잘못된 거예요. 기회를 기다리라니, 우리에게 이제 더이상 무슨 기회가 있을라구요. 안 그런가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일병이 상병을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어차피 말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상병은 더욱더 무표정한 얼굴로 침상 끝에 걸터앉은 일병을 내려다보았다. 내무반 한가운데 미동도 않고 버티고 선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그 어떤 세상사에 대해서도 더이상은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그것처럼 지극히 태연해 보였다. "결국 우리는 기회를 박탈당한 인간들인가요?" 일병이 겁먹은 눈빛으로 상병을 올려다보았다. 기회를 되찾을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전혀 없겠느냐, 요컨대 그런 애원의 빛이 그 검은 눈망울 속에서는 가득히 출렁이고 있었다. "경험 이라고 생각해" 상병의 말은 더할 나위없이 담담했다. "대가가 너무 큰 경험이라는 데 문제가 있어요" 일병이 울상을 지으며 대꾸했다. "대가가 큰 만큼 얻는 것도 있겠지" 문득 고개를 쳐들며 상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이건 도대체 ......" "됐어. 그만두자" 말을 마치고 나서 상병은 침상 끝에다 엉덩이를 붙였다. 진력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밑도끝도없는 대기 생활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실 진력이 나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짓물러터져서 숨막히게 하는 공간에서 그들은 여전히 대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그들의 몸은 어느덧 빈틈 없이 땀에 젖어 있었고, 배어난 땀으로 인해 녹색 제복의 곳곳이 짙은 얼룩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몇십 년 만의 혹서라고 연일 떠들어대는 매스컴의 보도를 구태여 빌지 않더라도, 이 여름의 무더위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할 만했다.잡초를 뽑다가 쓰러지거나, 군풍기 교육대에서 기합을 받다 탈진한 사병들이 벌써 여러 명째 의무대로 실려갔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쓰러진 병사들은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병자로서의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군기가 빠져서 그런 거라는 판에 박힌 듯한 진단만이 그들에게는 덧붙여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군기 빠진 사병들은 연일 속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패전의 기색이 완연한 나날一 지금은 폭양과 폭염이 가장 상대하기 힘겨운 난적으로 간주되는 위기의 건계(乾李)였다. 상병이 푸우, 한숨을 내뿜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 앉아 있는 게 몹시 답답한 모양이었다. 커다란 내무반 창유리앞으로 걸어가는 그 등판 전체가 땀에 젖어, 전투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제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사방이 조용했다. 낯설고 어색한 정적이었다. 그 정적 속에 파묻힌 건물이 바다 속에 가라앉은 폐항을 연상케 했다. 상병의 등판을 사뭇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던 일병의 시선이 서서히 출입문 쪽으로 옮겨져갔다. 답답하기론 일병도 상병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대기하라는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 녹색 제복 사회에서, 거역할 수 없는 게 명령이라는 걸 모른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명령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그들을 통제하고 있었다.내무반 창유리 앞에 선 상병의 시야로 드넓은 연병장이 밀려들었다. 뙤약볕이 한껏 내려앉은 그 연병장이 옥양목을 펼쳐놓은 것처럼 하얗게 떠올라 있었다. 그곳에서 한 병사가 연병장 가장자리를 따라 뛰고 있었다. 철모와 배낭, 소총과 탄대까지 착용한 완전군장 구보였다. 그 어깨에 멘 총신(銃身)에서 가끔씩 반사광이 반짝거렸다. 지칠대로 지쳤는지, 뛰다 걷고 걷다 다시 뛰곤 하는 그 동작이 비할 데없이 고적해 보였다. 그러나 그 병사를 숨어서 지켜보는 눈동자가 이 건물 어느 창가엔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걸 상병은 잘 알고 있었다.그것이 그에게는 숙달된 경험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대위 계급장을 단 깡마른 장교가 그들이 대기하고 있던 내무반으로들어선 건 정오가 가까워서였다. 폭양이 쏟아져내리는 연병장에서 완전군장 구보를 하던 사병이 대취한 사람처럼 중심을 잃고 제멋대로 흐느적거리던 무렵이었다. 상병과 일병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차렷자세를 취하며 그에게 경례를 했다. 충성 ! 그러나 장교는 그들의 경례를 받지 않았다. 장교의 얼굴은 짜증과 피로로 다소 지쳐 보였으나, 그러면서도 그 눈빛만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모자를 벗어드는 그 이마에서 주르륵,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지체해야 할 촌각의 여유도 없다는 듯 그는 빠르게 말했다. "한 시까지 의무대로 가라. 상당히 힘든 상황이다" 대위는 상병의 얼굴을 직시하며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상병이 대답했다. "기대를 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상병의 무표정한 얼굴을 의아스런 눈길로 바라보면서 대위는 무슨 얘기인가를 하려다가 갑작스럼게 말끝을 흐려버렸다. 그래서인지 입언저리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처음부터 기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상병은 분명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괜찮겠나?" 상당히 어색한 표정으로 대위가 물었다. 그러나 상병은 더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욱 어색하게 여겨지는지 대위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기대를 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후의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볼 테니까 어쨌거나 의무대에서 기다려봐라. 내가 그리로 전화를 하마" 말을 마치고 나서 대위는 다시 모자를 썼다. 의무대로 가라는 자신의 지시에 대한 상병과 일병의 반응이 미심쩍었던지, 그는 내무반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번 다짐을 주었다. "한 시까지다. 알겠나?" "예 ......" 거의 동시에 상병과 일병의 입에서 대답이 홀러나왔지만, 그것이 끊고 맺듯이 명쾌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요컨대 어떤 불가항력적인 절망감에 그들은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세 시간 가까운 대기 뒤에 떨어진 새로운 명령이란 게 고작 시간 맞춰 의무대로 가라는 것이었으니, 어찌면 그런 심상(心狀)에 그들이 사로잡히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령이었다. 언제까지 어떤 식으로 대기하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던 그것이 명령이었듯, 의무대로 가라는 이것 또한 명령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어차피 모든게 이런 식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는 집단이란 걸 상병과 일병은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명령 앞에서 그들은 또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기하라는 한 마디 명령 때문에 죽어나간 지나간 시간들이 갑작스럽게 되살아나서 그들의 목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중대장님 !" 대위가 마악 내무반을 벗어나려 할 때 갑작스럽게 일병이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외침이었다. 상병과 중대장은 물론, 일병자신까지도 그 외침이 몰고온 섬뜩한 여파로 인해 한동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대위가 걸음을 법추고 등을 돌렸다. 그 두 눈에서 찰나적인 광기가 번쩍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왜? 라고 묻지는 않았다. 다만 일병의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표정이었다.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견뎌내기 힘든 장구(長久)가 그 정적 속에는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상병과 대위의 시선이 일병에게 집중되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좀체로 파적(破寂)의 운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 자신이 대위를 불러세운 이유를 전혀 모르고 있거나 갑작스럽게 망각한 듯한 표정이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것처럼 그는 고작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냥......" "그냥, 뭐?"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대위가 다그쳤다. "그냥...... 혹시 말이죠" 마지못해 입을 열면서 그는 옆에 서 있는 상병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출입문께에 서 있는 대위를 향해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저희가...... 혹시 저희가 직접 연대장님께 얘길하면...... 그러면 안 될까요?"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일병은 떠듬떠듬 말을 뱉어냈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고, 또한 자신의 입에서 어떤 종류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지도 전혀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이마 위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주르륵, 굵은 줄기를 이루며 콧잔등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렸다. "잔말 알고 한 시까지 그리로 가기나 해, 임마 !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대위는 지금 일병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불필요한 어떤 종류의 사담도 배제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게 배제하고 싶어하는 눈치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기피하려는 기색이 분명할 터이었다. 절대로 그런 것에 얽매이거나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자기 경계심이 그 두 눈에서 무섭게 번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 같은 새끼들......" 누구에게 그러는 것인지, 대위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 상병은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도 그는 한동안 계속해서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분기(憤氣)와 혐오감이 묘하게 뒤섞인 듯한 표정이었다.그러다가 압자기 생각난 것처럼 그는 등을 돌려 일병을 향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지, 방금 했던 그 말?" 일병의 감정 상태를 분명하게 확인해 보고 싶어하는 눈빛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지......" 일병은 아주 체념적인 어조로 말했다. 왜 그랬는지는 고사하고, 그런 우유부단한 자신의 성품 자체를 그는 회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떨군 채, 아주 낙담한 모습으로 그는 서 있었다. 그런 일병의 모습에서 상병은 의외의 나약함을 잃고 있었다. 모든것을 신앙과 연관시켜서 생각하던 평소의 그가 전혀 아닌 것 같았다.틈날 때마다 성경을 펼쳐놓고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도와 사도 바울의 여행로를 골똘히 들여다보며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믿음을 심화시켜 나가던 그 든든하던 독실(篤實)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믿음의 반석 위에서 삶이 고양되던 한 기독교도의 모습은 이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거기에는 다만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는 겁에 질린 병사 하나가 더할 나위 없이 왜소한 몰골로 서 있을 뿐이었다. 믿음이 배제된 인간에게 나타나는 더없는 나약함과 초라함을 상병은 읽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믿음이라는 게 이렇게도 보잘것없는 피막이라는 생각을 상병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씩 일병에게서 부러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도 사실은 그런 굳건한 믿음에서 우러난 긍정적인 자세와 쉽사리 동요되거나 현혹되지 않는 든든한 이성을 그가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내밀한 신뢰감 때문이 아니었던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그가 가지고 있다고 상병은 생각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게라는 생각을 그는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보다 더욱 심하게 그는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일병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가는 걸 보면서 상병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힘을 내. 어차피 이런 결과가 오리라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한심하군요, 정말" 어금니를 다져물며 일병은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지금은 최악의 상황이 아니야. 그리고 그런 고통 앞에서 초연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단지 길들여지거나 은폐할 수 있을뿐이지. 힘을 내라구" 일병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상병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야죠. 그래요. 힘을 내야죠" 상병에게 건네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다짐을 하듯 일병은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어금니를 굳게 다져물었다. 그리하여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에게서 새로운 각오와 굳은 결의가 뜨겁게 용솟음치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정신적인 각성마저도 순식간에 용해시켜 버리는 숨막히는 정오 무렵 一지금은 영위(炎威)가 극을 향해 치닫는 광적인 폭양의 시간이었다. 2 그들이 의무대로 가기 위해 건물을 벗어났을 때, 태양은 그들의 정수리 위에서 작열하고 있었다. 깊은 무력감에 빠겨서 는적거리는 풍경이 한순간에 시야를 가로막아서 지레 숨통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사방은 여전히 깊은 적요 속에 가라앉아 있었고, 대기 속에는 바람 한점 없었다. 완벽한 진공 상태 속에 세상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방금 전에 자신들이 벗어난 회색빛 건물을 거의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까닭을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또다른 긴장감이 그들의 얼굴에서는 그늘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이명처럼 이따금씩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공명음들이 잘디잘게 부서져 무수한 반사광으로 도처에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날카로우면서도 찰나적인 빛살들의 명멸이 눈부신 백광(白光)처럼 펼쳐진 세상을 향하여,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폭양은 이제 액질의 즙(渟)처럼 도처에서 질척거리고 있었다. 병영의 옆구리를 끼고 뻗어나간 아스팔트 길을 따라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는적거리기는 거기도 하등 다를 바가 없어서, 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물렁물렁해진 역청의 감촉이 부드럽게 발바닥으로 전해져왔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곳에 따라서는 군화 밑바닥의 빗금 무늬가 또렷하게 판박혀지는 곳도 더러 있었다. 그제서야 곳곳에 타이어 자국이 박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길 양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플라타너스 잎새들도 목을 늘어뜨린 주검처럼 무겁게 휘늘어져 있었다. 이제로부터 족히 몇 시간은 모든 사물이 그러할 것이었다. 팽대하던 열기가 비로소 잦아드는 저물녘, 그리고 지상의 모든 사물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생기를 아주 잠시 되찾게 해주는 새벽녘......그러나 그런 냉량(冷凉)의 시간이 꿈처럼 지나고 나면, 새로운 날은 언제나처럼 눈부신 돋을볕으로부터 또다른 광란을 서두를 게 분명했다. 요컨대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중대장이 정말 최선을 다할까요?" 빨래 건조장을 지나칠 무렵 일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투복, 러닝셔츠, 팬티, 양말 등속의 빨래들이 건조한 대기 속에 가지런하게 널려있었다. 볕발이 잘 드는 덕장에 걸려 있는 건어(乾愼)처럼, 그 빨래들은 이미 물기가 가신 지 오래 된 것들이었다. "우리를 위해서 말인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상병이 반문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전방만 내다보고 걸을 뿐, 그는 일병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겠다고 했잖습니까? 기대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후의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말입니다" 분명한 어조로 말을 건네며 일병은 상병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기대감을 못 버리고 있구나. 그동안 그만큼 지켜봤으면 이젠 체념할 때도 됐을 텐데 ......" 어째서 아직도 그런 부질없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그런 은근한 질책이 상병의 말꼬리에서 생략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건" 일병이 입을 열자 상병이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알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론 이런 상황에서야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겠지.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달라. 그걸 알아야지" 분명한 어조로 상병은 잘라 말했다. "그럼 도대체 그는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겁니까?" 막막한 표정, 힘없는 어조로 일병은 물었다. 상병을 향했던 그의 눈길이 한 순간 전방으로 옮겨졌다가 이내 아스팔트 노면으로 떨어졌다. 사막의 열사(緣悚)와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포도(鋪道), 거기에서 후끈후끈한 복사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얘기겠지. 우리를 희생시켜서라도 말이지" 모자를 벗어들고, 그것으로 그는 이마에 맺혀 있던 굵은 땀방울들을 닦아냈다. "그들은 도대체 상식도 없는 겁니까? 어쩌면 인간들이 ......" "인간들이니까 그러는 거겠지.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면서 그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일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명령의 권위에 대한 집착심 때문에 그들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걸 여물처럼 씹고 또 씹고. 그리고 되새김질까지 하면서 말이지" "한심 하군요" "한심하다는 걸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나는 거지" 푸우, 말을 마치고 나서 상병은 날숨을 한껏 길게 내뿜었다. "저는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그들이 제정신을 차릴 줄 알았어요" 서양 사람들의 제스처처럼, 그는 양손을 들어올려 보란 듯이 흔들어댔다. 답답하다는 시늉이었다. "그게 그들에게는 제정신이야.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제정신이 그들에게 돌아온다면, 그러면 아마도 그들은 제복을 벗게 될 거야" 그렇지 않겠느냐는 눈빛으로 상병은 아주 잠시 일병을 돌아보았다. "속성과 맹점, 그런 게 힘이 된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하기야 뭐,그런 힘이 세상을 뒤집기도 하는 세상이니까 더이상 말하고 자시고할 건덕지도 없겠지만, 그래도 난 그 힘의 본질이 이토록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일 줄은 정말이지 꿈에서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허망하다못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걸 가능하게 하는 핵이 뭔지 모르나?"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그게서야 다시 쓰면서 상병은 물었다. "명령요?" "그래, 바로 그거야. 명령 ......" 명령이라는 말을 스스로 음미하듯 상병은 낮게 중얼거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일병에게는 전혀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는 <명령>이라는말의 여운 속으로 그 스스로가 빠져들어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때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침묵의 시간. 더이상 그들은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지만, 그러나 침묵의 골이 시간의 행간보다 훨씬 깊고 드넓게 여겨져서 상당히 당황하는 표정들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갑작스럽게 팽창하는 듯한 위기감, 그리고 터무니없는 경계심의 고조. 그러나 아주 짧은 시간 뒤에 그들은 침묵이 또다른 대화의 출발점이라는 걸 깨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거운 내면의 기류가 또다른 감정의 포화 상태를 위해 서서히 소용돌이를 이루어나가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의무대는 그들의 병영으로부터 꽤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리도 거리였지만, 주변에 펼쳐진 단조로운 풍경들이 보행을 더욱 지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무료함을 느끼게 하는 녹음과 우중충한 블록건물, 가끔씩 눈에 띄는 계단식 평지와 전투구호가 나붙은 백색 푯말,즐비하게 늘어선 동종(同袍)의 트럭과 지프,그리고 조금만 거리가 생겨나도 누가 누구인지를 분간키 어렵게 하는 한결같은 녹색 제복들...... 그런 단조로운 풍경들이 그들의 시계(視계)를 가로막았다가 멋쩍게 뒤로 물러나곤 했다. 낡고 오래 된, 새로울 게 털끝만큼도 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단조롭기 짝이 없는 풍경 속에 사실은 이 제복사회의 무서운 맹점과 강점이 동시에 은폐돼 있었다. 때로 삶에 윤기를 더해주는 사소한 상상력 이나 창의력마저도 무의미한 것으로 과감하게 통제해 버리는, 그것이 또한 이 집단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대단한 힘의 출발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명령이었다. 그것이 곧 이 획일화된 제복사회를 지탱케 해주는 요지부동의 핵이었던 것이다. 도로로부터 10여 미터쯤 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한 자그마한 교회당이 모습을 드러낼 무렵, 황갈색의 흙을 가득 실은 트럭 한대가 느리게 그들을 지나쳐갔다. 차량의 꽁무니에서 솔솔솔 흘러내리는 흙줄기가 아스팔트 위에다 붉은 직선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상병이 그것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안 일병은 언덕 위의 교회당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정오 무렵의 태양 아래에서는 첨탑 끝에 붙박인 십자가에서도 반사되는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교회당만은 짙은 산그늘 속에 가라앉아 있어서 그늘 없는 세상과 확연하게 가름되는 어떤 시혜의 징후 속에서 안존하는 것 같았다. 믿음을 위해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 그 뚜렷한 시혜의 징후가 너무나도 별개인 것처럼 여겨져서 일병은 심한 조갈을 느꼈다. 일병이 교회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릴 무렵, 상병은 또다시 모자를 벗어들고 이번에는 그 챙으로 부채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나친 절제로 인해 그 동작은 손목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모자가 절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붙러일으켰다. 불필요한 동작을 그는 가능한 한 배제하려는 것 같았다. 체내로부터 밀려나오는 땀의 양이 동작과 비례한다는 생각을 그는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포장도로를 버리고 의무대로 통하는 유일한 비포장도로로 접어들 무렵, 십여 명씀 되어 보이는 일단의 제복들이 야트막한 언덕길을 넘어오는 게 보였다. 한결같이 왼쪽 옆구리에다 오렌지빛 식기를 파지(把持)한 사병들이었다. 그제서야 일병은 아하, 탄성을 발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중식 시간이잖아요, 지금?" 어이없게도, 너무나 당연한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군" 파블로프의 개처럼 시간에 길들여진 식욕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상병도 일병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무엇을 기억하고 또한 무엇을 망각했는지조차도 제대로 판별해낼 수 없을 만큼 아뜩한 기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그들이 자각할 수 있는 건 다만 찌는 듯한 무더위와 요지부동의 명령뿐이었다. 그걸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모난곳에서 순간적으로 꺾어지는 한 줄기 반사광처럼, 너무나도 무의미한 소멸 속으로 자신들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말 것 같은 극에 달한 위기감이 갑작스럽게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식기를 파지한 제복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일병은 그들 중에서 몇몇 눈에 익은 안면들을 발견해냈다. 그들은 의무대에서 근무하는 사병들이었다. 그러나 일병은 그 훨씬 전부터 그들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들의 옆구리에 파지된 오렌지빛 식기를 발견하던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그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병들이 쑥색 식기를 사용하는데, 그들만 유독 오렌지빛 식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의무대에서 근무하는 그 몇 되지도 않는 제복들에 대해 일병은 꽤 오래 전부터 묘한 반감을 느껴오고 있었다. 자신들도 어차피 제복을 몸에 걸친 별수없는 존재들이면서,그러면서도 그들은 항상 다른 제복들과 분명하게 구별되려는 안간힘으로 용을 쓰곤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모든 사병들이 식당의 보관함에다 식기를 비치하고 사용하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사병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주머니에서 허겁지겁 스푼을 꺼내 식사를 할 때도 그들은 단정한 제복과 말끔한 얼굴로 저희들끼리 모여앉아 식기와 스푼을 다시 한번 끓는 물에 씻고 나서야 비로소 식사를 시작했다. 완전군장 구보나 행군을 할 때도 그들은 앰뷸런스를 타고 따라오면서 가련하다는 눈빛으로 사병들을 내다보며 키들거리곤 했다. 어쩌다 병이 나서 의무대로 찾아가본 사병들은 그들이 그곳에서 군의관보다 더욱 거만하게 행세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주구(走狗 )들이었다. 같은 제복이면서도 다른 제복들과 분명하게 구별되지 못해 기를 쓰고 버둥거리는 그들을 향해, 그래서 않은 사병들은 말했다. 우리는 땅개지만 저 새끼들은 똥개라고. 대열을 맞춰 지나가던 제복들이 힐끔힐끔 상병과 일병을 돌아보았다. 그들 중의 어느 누군가가 상병과 일병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서로 교차되고 난 직후에, 쟤네들이 어쩌고 하는 얘기가 무리 중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상병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 머리가 푹 숙여지는가 했는데, 거의 동시인 것처럼 다시 들어올려지면서 몸 전체가 홱하니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렸다. 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그들을 향해 돌아섰던 것이다. 뙤약볕이 그 이마에서 무수하게 반사되고 혹은 잦아들어서, 땀은 이제 비오듯 그의 얼굴 곳곳에서 굵은 줄기를 이루며 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느닷없는 경련처럼 그의 입술이 갑자기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입술만이 아니라 그 몸 전체가 어떤 걷잡을 수 없는 경련으로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 순간, 그의 두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는 그것이, 작열하는 태양이 아니라 인내와는 거리가 먼 끔찍스런 살의라는 걸 일병은 직감적으로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가요, 그냥......" 일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상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든 걸 반영해 주듯 가슴팍만이 아주 크게 들썩거릴 뿐이었다. 그 가슴팍이 평상을 되찾은 다음에야 그는 비로소 몸을 돌렸다.그러나 그는 순간적으로 완전히 탈진해 버린 것 같았다. 젖은 빨래처럼 상체가 후줄근하게 늘어져 있었고, 하체에도 힘이 없는지 걸음이 좌우로 크게 빗나가고 있었다. 간신히 입을 열어 그는 일병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디 가서 좀 쉬었다 가자" 그러면서 그는 언덕 주변의 숲을 살피기 시작했다.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만한 한적한 그늘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어차피 지금은 중식 시간이고, 아직도 한 시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일병은 상병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언덕길 좌측의 무성한 잡목림 속으로 자신이 먼저 들어갔다. 상병이 그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살폈다. 명령을 수행하는 도중에 임의로 취하는 휴식이 조금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한 시까지는 아직 꽤 많은 시간이 남겨져 있었지만, 재수가 없으려면 별일이 다 생겨나는 법이었다. 그런 재수없는 길을 그들은 지금 가고 있었던 것이다. 3. 드넓게 뻗어나간 가지와 무성한 잎새가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내는 아카시아나무 밑둥치에다 등을 기대고 그들은 앉았다. 손바닥만한 떡갈나무 잎새들이 성하게 주변을 메운 아늑한 그늘이었다. 그 큼직큼직한 잎새 사이로 언덕 밑에 세워진 하얀 건물이 내려다보였다. 상병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일병은 그 아래쪽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쏟아지는 폭양 속에 정수리를 드러내고 있는 그 건물의 흰 빛이 유난히도 확대돼 보였다. 산자락을 긁어내고 정지(整地)한 그 마당에 앰뷸런스 한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옆구리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가 폭양과 정적속에서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억압되어온 욕구를 예리하게 자극하는 듯한 색상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피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리고 더욱 오래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결국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진한 색상마저도 폭양과 정적 때문에 결국은 흰 빛으로 무화되고 말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병은 나무에다 머리를 기댔다. "도대체 명령이란 걸 누가 만들어냈을까요?" 자세를 좀더 편안하게 고쳐앉으며 일병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 ......"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상병이 입을 열었다. "남을 부려먹는 재미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인간들이 만들어냈겠지" "얼마 전에 사병 식당 명언 칠판에 적혀 있던 몰트케의 말 생각나요?" 나무에다 기댔던 머리를 떼어내면서 일병이 상병을 돌아보았다. "아니, 난 그 칠판 안 봐" 그러면서도 일병이 하려는 얘기가 사뭇 궁금한지, 상병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슬그머니 일병을 돌아보았다. "그날 칠판에서 그 말을 읽고 돌아와서 사전을 찾아봤어요. 그리고 몰트케란 사람이 프러시아의 유명한 군인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렇지만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그가 한 말이 저에게는 무척 감동적이었어요" "뭐라고 했는데 ?" 뜸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명령된 것은 반드시 이행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행되어질 수 없는 것을 명령해서는 안 된다" 입에 올릴 때마다 감동이 새로워지는 훌륭한 명언이다, 그렇지 않느냐---요컨대 일병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젠장, 그런 걸 왜 사병 식당에다 써두나? 장교 식당에다 써놔야지" 말이 말 같잖다는 게 아니라, 명령을 수행하는 당사자들에제 도대체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런 표정으로 상병은 느닷없이 언성을 높였다. "어쨌거나 참 적절한 표현이죠?" "그렇긴 하군. 그 말을 들으니까 이런 말도 생각나는군. 용인된 권력은 합리적인 일에 사용해야 한다......" 머리를 다시 나무에다 기대며 상병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무성한 잎새 사이로 얼핏얼핏 올려다보이는 하늘이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순간순간 모양새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건 어디에 나오는 말이죠?" "어린 왕자" 아주 미미하게, 그 그늘 속에서 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손처럼 아주 가끔씩 떡갈나무 잎새들이 살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동화의 세계처럼, 참으로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어린 왕자가 나타날 만한 장소가 결코 아니었다. "솔직히 얘기해 봐요. 억울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나무에다 기댔던 등을 곧추세워 앉으며 일병이 측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원시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면 기분이 더 비참해져" 상병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에 붙박여 있었다. "어쨌거나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엉덩이를 틀어 아예 상병과 마주되게 앉으며 일병은 재차 물었다. "물론 억울하지. 하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게 사실은 더 억울해. 뭔가가 억울하게 생각되면 그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게 되는 게 인간인데,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통로가 전혀 없어 보이잖아?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는 게 진짜 억울하다는 얘기야" "전에도 이렇제 억울하다는 감정을 가져본 적 있나요?" "글쎄 ...... 없다고 할 수 없겠지"허공에 붙박여 있던 시선을 거두어내며 비로소 상병은 일병을 돌아보았다. "전 머리에 털 난 이후 이게 꼭 두번째예요. 첫 번째는......" 얘기를 해도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일병은 상병의 눈치를 살폈다.그러나 좋다 싫다 따위의 감정적 반응과 전혀 무관한 표정으로, 그때 상병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해서 일병은 좀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처음의 자세로 돌아갔다. 온몸이 점점 더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졸면 죽는다, 추위 속에서 발을 구르머 잠과 싸울 때처럼, 그는 의식이 몽롱해지는 걸 피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억울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는 신세로군요, 지금 우리는......" "말하지 마" 상병이 눈을 감은 채 나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인간이 억울해지게 되는 데는 공식이 있어. 힘의 논리가 아니라 논리의 이중성 때문에, 그 극간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건 인간 세계의 숙명 같은 거야. 두 발로 걷고 엄지손가락을 가진 짐승이 지상에서 가장 무서운 짐승이라는 말이 있잖아. 어차피......" 어차피 그 이상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묘한 여운을 남긴 채, 그러나 그것 자체로 이미 단절의 의미를 분명하게 완성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점차로 잦아들어갔다. 뭐랄까, 그것은 마치 화면을 점점 더 흐리게 하면서 흑막에 이르게 하거나, 혹은 소리를 이격시킴으로써 음량을 서서히 감소시켜 나가는 정진적인 기법의 일종처럼 전혀 뜻하지 않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침묵의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그 침묵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와해시켜 주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 새로운 공감대는 그들의 편편치 못한 현실을 지극히 부드럽고 안온하게 위무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른 게 아니라 시간의 행간, 그 여백의 면적이 점차로 드넓어져 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게 언제였지?" 눈을 감고 있던 상병이 잠꼬대처럼 몽롱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바다요?" 뜻밖의 질문이라는 듯 일병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상병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 ...... 바다 말이야" 눈을 감은 채 그는 바다를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바다를 떠올리기 위해 자기 최면을 거는 사람처럼 그 목소리가 여전히 몽롱했다. "바다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일병은 다시 눈을 감았다. 바다라 ...... 작열하는 태양과 푸르른 창공, 한가롭게 떠도는 몇 점의 백구(白鷗)와 가뭇없이 드넓은 대양(大洋), 그리고 키 작은 해송과 부드러운 솔바람, 흰 파도, 뭉게구름, 달아오른 백사장...... 방황과 동경, 갈망과 향수로 얼룩진 모든 인간들에게, 발길 닿을 때마다 영원한 생명의 상징처럼 숨쉬며 밀려오는 바다...... 그 바다가 일병의 뇌리에서도 드넓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기억의 암층에서 잠자던 그것이 다시 눈을 뜨고, 순식간에 거대한 몸짓으로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주 오래 됐어요. 고등학교때...... 그래요, 교회 하계 수련회때 갔던 게 마지막이었을 거예요" 눈을 감은 채, 맑은 날의 해면처럼 잔잔한 표정으로 일병은 말했다. "바다로 가고 싶었는데 ......" 졸리운 듯한 목소리로 상병은 중얼거렸다. 듣기에 따라서는 혼잣말같기도 했다. "누가요?" "나" "아...... 이달 말에 휴가였었죠?" 일병이 눈을 뜨고 상병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상병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의외로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체념 속에도 평화가 깃드는 것인가, 일견 허망함에서 우러난 듯한 웃음기까지 그 얼굴에서는 감돌고 있었다. 정묵(靜特)한 내면의 기류만 어른거리는 얼굴, 털끝만큼의 집착심도 없어 보이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리하여 바로 그 순간,휴가까지 박탈당한 한 병사의 얼굴에서 세상의 모든 빛이 무색해져버리고, 그것이 고스란히 그늘로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를 보면 왜 평화롭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 같았다. "글쎄요 ......"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일병은 떡갈나무 잎새들이 성하게 주변을 메운 전방을 내다보았다. 그 떡갈나무 잎새 너머, 거기에 바다가 있는것 같았다. "그건 바다가 인간들이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드넓은 수평이기 때문이야. 수평은 편안하고 안온한 것, 그리고 가장 안정된 상태를 뜻하는것이지. 수직 상태로 서서 만들어낸 모든 문제들이 극에 달할 때, 그때 인간들은 몸져 눕게 되지. 수평은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의 근원적인 휴식을 뜻하는 거야. 하루종일 선 채로 돌아치다가 잠자리에 눕게 될 때, 그때에도 인간들은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되지. 수직으로 살다가 수평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수직의 자궁이 바로 수평이라는 것.바다는 그런 상징을 생각하게 해" 수평을 꿈꿀 수 없는 현실, 그러니까 수평에 대한 그리움을 그는 그렇게 역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평에 관한 명상이 어차피 수직으로부터의 도피 심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는 분명하게 깨우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사실을 자인하듯이, 수직에 대한 두려움을 입에 담으면서 그의 표정은 서서히 어두워져갔다. "수직에는 힘이 있어. 그러나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힘이 필요하게 돼. 그게 바로 두 발로 서서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진 인간들, 엄지손가락을 가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끊임없는 쟁투가 되는거야. 힘의 가감에 따라 수직은 부러지거나 꺾어지거나 혹은 휘게 되지. 상대적인 힘의 결과야.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법이 필요하게 되는거고, 그 법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곧은 형태의 수직을 상징하게 되지. 그 법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곳이 어디지 ?"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상병이 물었다. "감옥요?" 갑작스럽게 두 눈을 휘둥그렇게 치뜨면서 일병이 되물었다. "그래. 맞았어. 감옥이야. 그러면 감옥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지?" 스무고개를 하듯이 상병이 재차 물었다. "철창?" "맞았어. 쇠창살로 만들어진 문이야. 그리고 그 부분에서 재미있는 발상을 떠올릴 수 있는 건, 모든 쇠창살들이 수직으로 서 있다는 거야. 차갑고 견고한 수직. 그게 바로 법의 상징이고, 그리고 망가진 수직들이 지겹도록 지켜봐야 하는 냉혹한 정의라는 거야. 하지만 모든 수직은 숙명적으로 불안을 내포하고 있어. 그래서 세상은 항상 가변적인 상태로 혼들리거나 전혀 다른 것으로 뒤집히곤 하는 거지. 어차피 수직은 물구나무를 서도 수직 이니까. 아주 가끔씩 난 그런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수직에 관해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상병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수평에 대한 그리움이 수직에 대한 냉혹한 현실 인식에서 막을 내려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얘기였다. 안쪽에서 출발해서 한바퀴를 돌아오면 어느새 바깥쪽이 돼 있고, 바깥쪽에서 출발해서 다시 한 바퀴를 돌아오면 또다시 안쪽이 돼 있는, 그런 표리무변(表裏無邊)의 얘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직이 끝날 때 수평을 꿈꾸고, 수평이 끝날 때 수직을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적인 지향성(志向性)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일병은 바로 그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평과 수직, 그것이 몰고 온 느닷없는 충격의 여파때문이었다. 그 충격의 여파는 직접적인 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았고,그리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모든 종류의 불안과 공포, 절망과 좌절감이 일시에 되살아나 그의 숨통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억압되어온 감정의 분출, 혹은 폭죽이었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느껴본 적이없는 분별력, 절제된 감정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냉혹한 현실 감각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위기감이 극도로 고조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그런 걸 다스릴 만한 내면의 여력이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남겨진 건 다만 날카로운 현실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절망적이라는 판단 때문에 그는 갑작스럽게 눈두덩이 욱신거리는 걸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차갑고 견고한 수직. 이제 더이상 일병의 뇌리에서는 바다가 살아 움직이지 않았다. 수평이 사라져버린 날카로운 현실 때문이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푸르른 창공, 한가롭게 떠도는 몇 점의 백구와 가뭇없이 드넓은 대양, 키 작은 해송과 부드러운 솔바람, 흰 파도, 뭉게구름, 달아오른 백사장 따위들이 더이상은 연상되질 않았다. 그리하여 방황과 동경, 갈망과 향수로 얼룩진 인간들에게, 발길 닿을 때마다 영원한 생명의 상징처럼 밀려오곤 하던 그 바다는, 처음부터 그의 기억 속에 없었던 것처럼, 애초부터 이 세상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까마득한 미궁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그의 시야로 밀려드는 건 그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뿐이었다. 메마른 땅과 건조한 대기, 기세등등한 폭양과 풀죽은 녹음, 땀에 젖은 제복과 늘어진 육신...... 그리고 명령. 결국 남겨진 건 그런 것들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매미 울음소리, 그 뇌파를 뒤흔드는 듯한 공명음이 맹렬한 기세로 일병의 귓구멍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아아, 눈물겨운 수직의 세상이여. 사방은 여전히 한낮의 땡볕 속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대기 속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평을 상실해 버린 한 인간의 과거와 미래, 그 뿌리와 우듬지는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있었다.늙은 노모가, 어린 여동생이, 몸담았던 교회가, 십자가가, 믿음이, 중단된 학업이, 불투명한 미래가...... 한 순간인 것처럼 살아오르고 또한 스러져갔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제 더이상 자신을 방어할수 없게 된 인간처럼 그는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 끔찍스런 폭양 속에 팽개쳐진 모든 사물이 그러하듯이, 그도 역시 지치고, 그도 또한 늘어져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등을 기댄 나무 뒤편의 그늘이 보이지 않게 조금씩 넓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4. 좁고 긴 복도가 시작되는 의무대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그들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언덕길을 빠르게 내려온 탓으로 그들의 호흡은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언덕으로부터 의무대까지의 거리가 그리 먼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극심한 무더위 속에서 뜀박질을 한다는 건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은 어느덧 한시 십분이 돼 있었다. 어느 정도 호흡이 잦아들자 그제서야 역한 약품 냄새가 그들의 콧구멍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에테르 냄새가 아니면 클로로포름 냄새인 것 같았다. 그 역한 약품 냄새를 그들이 처음부터 맡지 못했을 리 없건만, 그것이 그제서야 자신들의 후각으로 그토록 맹렬하게 밀려드는 이유를 그들은 알 수 없었다. 대여섯 개 정도의 방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의무대 복도는 한결같이 빛이 차단돼 있었다. 그래서인저 현관으로부터 안쪽으로 곧고 길게 뻗어나간 그 좁은 통로의 끝 쪽에는 눅눅하면서도 푸르스름한 어둠이 실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잔혹스런 억압을 통해 조작되어진 듯한 평온이 그 실내에는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복도의 어느곳으로도 마땅히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채, 그들은 여전히 땡볕이 어른거리는 현관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서성거리는 그 입구 쪽에는 유리 칸막이가 가로질러진 진료 접수 창구가 있었고, 그 맞은편 벽 쪽에는 약품광고가 새겨진 목제 장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에 앉을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료 카드가 비치된 접수 창구 안쪽은 비어 있었고, 그 협소한 공간의 한쪽 구석에서는 낡은 선풍기 한 대가 저 홀로 돌아가고 있었다.누구를 위해 그러는지를 스스로도 모르겠다는 듯, 그 선풍기는 일정한 간격으로 동체를 떨며 진저리를 쳐댔다. 그 비좁은 공간으로 몸피에 비해 키가 유난히도 작아 보이는 병장이 들어서고 나서야 그 낡은 선풍기의 진저리는 일단 멈추어졌다. 금테안경을 쓴 병장은 온몸에 희멀건 비곗살이 올라서 지극히 자연스럽제 팔과 다리, 허리, 둔부 등에 잘록잘록한 마디가 생겨 있었다.방금 무엇인가를 먹고 온 듯 느긋하게 이를 쑤셔대며 들어선 그는 창구 앞에서 서성거리는 상병과 일병을 뜻없는 눈길로 바라보면서 선풍기의 작동 스위치를 <회전>에서 <고정>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쑤시개를 입에 문 채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그는 상의를 벗어 의자의 등받이에다 걸었고, 그 의자를 넉넉하게 뒤로 빼면서 앉을 준비를 했다. 그 앞쪽에는 자그마한 철제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그 테이블 위에는 표지가 닳을 대로 닳은 주간지와 만화가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윗머리가 꽤 길게 자라서 가리마 자리까지 생겨나는걸 보니, 그는 아마도 제복을 벗을 날이 코밑에까지 다가온 말년 병장인 모양이었다. 그 존재의 어느 구석에선가 벌써부터 싱그러운 자유의 냄새가 풍겨져나오는 것 같았다. 살이 푸지게 오른 몸집을 의자에다 밀어넣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테이블 위에다 손을 얹으며 유리 칸막이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부 중대에서 왔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일병이 칸막이 앞쪽으로 바투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병장은 일병을 보지 않았다. 말을 건넨 건 일병이었는데,이상하게도 그는 일병 뒤쪽에 서 있는 상병을 먼저 쳐다보았다. 그래서 일병은 병장이 자신의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칸막이 안쪽으로 말을 밀어넣었다. "본부 중대에서 왔습니다" 그제서야 병장은 일병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본부 중대에서 왔다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그 머리가 한쪽으로 느릿하게 기울어졌다. "본부 중대라구요?"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一그런 표정으로 병장이 되묻는 것 같았다. "한 시까지 이곳으로 가라고 해서 왔는데요" 다소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일병은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이유로 이곳으로 가라고 했느냐, 그걸 묻고있는 거요, 나는 지금 !"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병장은 말에 힘을 주었다. 그 분명한 억양과 강세가 스스로도 대견한 모양, 그는 더욱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일병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연락이 안 왔습니까?" 당황한 표정으로 일병은 상병을 돌아보았다. 보기에도 답답했던지,그때 상병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일병을 옆으로 밀었다. "행정반에다 확인하쇼. 뭣 땜에 가라고 했는지 연락이 와 있을 테니까 ! " 화가 난 듯한 어투로 상병은 빠르게 말했다. 그러자 칸막이 안쪽에 앉아 있던 병장이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정색을 했다. 얼굴에 떠오르는 그 기색이 사뭇 엄정해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저항 행위가 오로지 그것뿐이라는 듯, 그는 끝끝내 갈등이 심화된 침묵만을 고수했다. 그런 어색한 대립의 시간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를 이루며 빠르게 그들을 지나쳐갔다. 드디어 병장이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로 슬그머니 손을 뻗쳤다. 대세는 이미 상병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셈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병은 계속해서 병장을 노려보았다. 무엇에 대해서인가, 견딜 수 없는 분노 같은 것으로 그의 두 눈은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 대하기조차 꺼려지는지 병장은 아예 고개를 숙인 채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본부 중대에서 연락온 거 있나?" 병장은 이제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낡은 주간지 표지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주간지의 내용보다 더 퇴폐적인 삶을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갑작스럽게 유명해진 여우(女優)가, 그 표지보다 더 낡은 웃음을 흘리며 쓸데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본부 중대가 아니고...... 그러니까...... 그래 알았어"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병장은 제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화 내용으로 인해 생겨난 행동의 변화가 분명한 것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통화를 통해 어떤 얘기를 전해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전혀 새로운 눈빛으로 상병과 일병을 건너다보았다.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게, 그 두 눈에서 싱싱한 호기심이 빛을 발하고있었다. 상병과 일병을 남겨둔 채, 병장은 좁고 긴 복도 끝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복도 끝 쪽의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그의 러닝셔츠가 유난히도 희게 빛났다. 그 맨 끝 쪽에 있는 방 앞에 서서 그는 서너 번 노크를 했다. 그리고 상병과 일병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그는 그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짧은 순간 뒤에 다시 나타난 그가 이번에는 상병과 일병에게 빠르게 손짓을 했다. 오라는 시늉이었다. 그 방안에 있는 누구에게선가 와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낸 모양이었다. 그들이 그곳으로 다가가자 병장은 손짓만으로 어서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나서 자신은 다시 접수 창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다소 어둑어둑한 실내가 상병과 일병의 시야로 밀려들었다. 좌측 벽 쪽에 세워진 암갈색 책장과 우측 벽 쪽으로 난 작은 창유리가 묘한 대조를 이루는 방이었는데, 그 나머지 공간에 놓인 테이블, 의자, 선풍기, 스탠드 등속이 조화와는 전혀 무관한 듯한 위치에 제멋대로 배치되어 있는 게 또한 특징적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상당히 불안정해 보이는 방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책장이 끝난 곳의 벽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었고, 선풍기는 반대편 창틀 밑에 처치 곤란한 폐풀처럼 방치돼 있었으며, 갓이 길쭉한 스탠드는 묘하게도 테이블 위에 쌓여있는 여러 권의 서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한낮인데도 그 스탠드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형광불빛의 뚜렷한 조명권 내에 앉아서 한 인간이 의학 원서를 읽고 있었다. 불빛 때문인지 주변의 다른 사물에 비해 그 얼굴은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치 각광(脚光)을 받는 무대 위의 연극배우처럼 다소 비현실적인 분위기로 상병과 일병에게는 보여졌다. 그가 바로 군의관인 모양이었다.상병과 일병이 경례를 하자 그는 비로소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 상병과 일병이 서 있는 곳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향, 다시 말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측 창 쪽으로 천천히 옮겨져갔다. 군의관의 시선이 옮겨간 그 자그마한 창유리는 보란 듯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산자락 쪽이라서인지 시원한 바람도 넉넉한 빛도 그곳으로는 제대로 밀려들지 않고 있었다. 그 창유리 위로 떠오른 녹음이 지나치게 단조로운 풍경화처럼 움직임을 멈춘 채 나른하게 정지돼 있었다. 이윽고 군의관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것처럼 그는 눈을 크게 치뜨면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시키는 대로 그들은 서너 걸음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비로소 사실적인 질감을 회복하면서 뚜렷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젊고 깜끔해 보이기는 했지만, 감정이 없어 보여서 어딘지 모르게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듯한 면목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자신이 읽고 있던 의학 원서를 기계적인 동작으로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십육절지 한 장이 놓일 만한 공간이 간신히 만들어졌는데, 그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이 마치 상병과 일병을 위해 군의관이 할애할 수 있는 인간적인 여백의 전부인 것처럼 보여져서 오히려 그를 비인간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짐작케 했다. 그는 이 귀찮은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듯했고,그 시간 뒤에 도래하게 될 자신만의 내밀한 시간을 열렬하게 학수고대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사람이 죽어가는 시간에도 더할 나위 없이 초연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많은 시간을 인술과 무관한 기술 내지 의학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과시할 것 같았고, 그 결과로 언젠가는 반드시 대단한 의학적 명성과 권위를 얻게 될 것 같았다. 그런 이기적 집념의 소유자처럼 그는 보였던 것이다. 그때, 접수처에 앉아 있던 병장이 몇 장의 서류를 가지고 들어왔다.그리고 그것을 군의관이 할애한 그 알량한 빈 자리에다 맞춤하게 올려놓은 다음,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군의관은 펜을 들고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상병과 일병의 이름과 군번, 계급, 소속, 주특기 따위를 차례대로 물으며 준비된 서류에다 빠르게 기록해 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런 요식절차가 끝나고 나자 그는 고개를 들어올려 상병과 일병을 쳐다보았다. "어디 아픈 데 있어?" 군의관이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황당무계한 질문을 그는 던졌다. 자신이 일일이 진단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현명하고 합리적이며,또한 확실하리라는 어이없는 당위성이 역력하게 강조된 표정이었다. "없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상병과 일병은 대답했다. 그러나 군의관은 그들의 대답 따위는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다는 듯 서류의 여러 곳에다 빠르게 뭐라고인가 휘갈겨나가기 시작했다. <정상>이라고 쓰는 건지 <이상>이라고 쓰는 건지, 그런 것도 제대로 판별해낼 수 없을 만큼 그의 손목은 대단히 무성의한 홀림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구두 검진을 끝낸 뒤에, 그는 서랍을 열고 그곳에서 손가락보다 조금 더 굵고 길어 보이는 플래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상병부터 차례대로 입을 벌리고 그 구강을 자기 면전으로 들이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건성이기는 마찬가지여서, 아무런 이상도 그들에게서는 발견되어지지 않았고 또한 발견되어질 리도 없었다. "뒤로 삼 보" 예기치 않게도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쪽으로 걸어나오며 군의관은 전혀 다른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또 명령인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상병과 일병은 그 명령에 의해 선 자리에서 삼 보 뒤로 물러났다. "혁대 풀어" 출입문께에까지 물러난 그들에게 군의관은 또다시 명령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상병과 일병은 어쩔 수 없이 혁대를 풀었다. 당연히 명령에 의해 행해지는 동작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은 상당히 뜨악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명령이 끝난 건 결코 아니었다. "바지 내려" 군의관의 명령은 짧고 단호했다. 명령에 대한 어떤 용단이라거나 의지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명령 자체를 그 스스로가 다소 짜증스러워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은 별달리 긴장돼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심각하거나 진지해 보이지도 않았다. 여전히 그는 감정이 고갈된 사람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병과 일병의 표정은 그의 그것과는 아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황당무계한 명령에 대한 갑작스런 긴장과 초조, 그리고 다소간의 두려움과 은밀한 분노가 뒤섞인 듯한 묘한 표정이 되어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내려 !" 상병과 일병의 엉거주춤한 자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의관은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였다. 그리하여 어둑어둑하던 실내가 순간적으로 기우뚱 중심을 잃는 것 같았고, 그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더 불안정한 기류가 사방에서 소용돌이를 이루며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상병과 일병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바지를 군화 위로 밀어내렸다.누가 명령을 거역할 수 있으랴. "팬티도 내려" "팬티 ?......" 드디어 일병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군의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군의관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내려 !" 다시 한번 군의관은 반복했다. 쓸데없는 기대감 따윈 아예 걷어치우라는 듯 그의 목소리는 차고 날카로웠다. 이윽고 군의관의 시야에는 네 개의 다리와 두 개의 생식기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단지 입을 통해서 그런 일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명령이라는 것의 대단한 위력과 요지부동의 효용성을 새삼 실감하겠다는 듯 그는 두 사람의 하체를 흡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잡아" 목적어가 생략된 명령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명령을 듣고 난 한참뒤까지도 그들은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뭘 잡으란 말인가. 그걸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잡으라니까 !" 오른손을 들어올려 무엇인가를 움켜쥘 때의 손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군의관은 다시 한번 재촉했다. 그제서야 상병과 일병은 그가 무엇을 어떻제 잡으라는지를 분명하게 감지한 것 같았다. 一 남자의 외부 생식기. 해면체로 되어 있고 요도(尿道)가 통해 있음.자지. 남경(男莖). 남근(男根). 양경(陽莖). 양도(陽道). 양물(陽物).옥경 (玉莖). 옥근(玉根). 신(腎). 좆...... 결국은 그걸 잡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걸 잡으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겠는지, 그걸 잡고 난 뒤에도 그들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걸 오른손으로 움켜쥔 채 여전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엉거주춤한 자세가 어서 빨리 다음 명령을 내려달라는 애걸처럼 보여져서 기가 막혔다. "훑어" 군의관은 여전히 목적어가 생략된 동사를 구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손아귀에 바로 그 생략된 목적어의 실체가 쥐어져 있었으므로 더이상은 그것에 대해 골몰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시키는 대로 훑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다시 한번" 한 번으로는 불확실하다는 생각을 군의관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그러나 군의관이 원하는 바, 그 두번째의 확인 과정을 통해 상병과 일병은 급격한 감정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훑으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얼핏 견딜 수 없는 수치심으로 인해 몸서리를 치는 것 같았고, 그 다음 순간부터는 극에 달한 분노로 갑작스럽게 안구가 팽창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순간적인 변화가 아주 빠르게 그들을 스쳐간 다음부터 그들의 표정은 지극히 냉랭해지기 시작했다.그리하여 그들의 표정에는 이제 더이상 불안과 초조, 긴장과 두려움 따위에서 비롯되는 참담한 기색이 어른거리지 않았다. 그저 별다른필연성도 없어 보이는 명령에 기계적으로 응하겠다는 의도적인 방심만이 역으로 강조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무표정한 대응이 곧 그들이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큰 저항의 일종이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려는듯, 그들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움켜쥐어진 그것을 확실하게 다시 한번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의관이 애초부터 확인하고자 했던 그 어떤 이물질도 그들의 생식기에서는 밀려나오지 않았다. 위축될대로 위축된 남근에서 무엇이 밀려나올 수 있겠는가. 상병과 일병은 자신들의 그것에 대해 쓸쓸한 연민의 정을 느끼며 다시 차렷자세를 취했다. "뒤로 돌아" 다소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군의관은 손을 들어 어서 빨리 회전하라는 시늉을 했다. 목운동을 하듯 고개를 좌우로 두서너 번 갸웃거려보면서 팔짱을 끼는 그 표정에 녹녹한 무력감 같은 게 떠올라 있었다.그래서인지 초라하게 돌출된 두 사람의 둔부를 들여다보는 그 눈빛이 사뭇 몽롱했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럽게 고함을 내지른 건 도대체 무슨이유 때문이었을까. 등을 보이고 있던 상병과 일병이 어깨를 홈칫하자 그 엉덩이까지 따라서 움찔했다. "엎드려뻗쳐 !" 그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도 그는 그렇게 소리를 내질렀다.그 느닷없는 고함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그는 아주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띰으로써 그는 자신이 단지 무료함 때문에 그랬다는 걸 스스로 진단하고 또한 그것으로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것 같았다. 고함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병과 일병은 타일 바닥을 짚고 길게 엎드려뻗쳤다. 하의만 홀랑 벗겨져 있었으니, 그 꼬락서니의 우스꽝스러움이란 두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뒤로 삼 보" 실내의 어색했던 분위기가 짧은 순간 뒤에 다시 평정을 되찾자 군의관은 엎드려뻗친 그들에게 상당히 잔인한 복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하체가 홀랑 벗겨진 인간들을 엎드려뻗치게 해놓고 그 상태에서 다시 뒤로 삼 보를 기어오라니, 그거야말로 가학적인 취미라고밖에 달리 더는 판단을 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명령(!)이었다. 축생처럼 땅바닥을 네 발로 짚고 우스꽝스런 꼬락서니로 뒷걸음질을 쳐대는 상병과 일병의 얼굴이 흡사 대취한 사람의 그것처럼 빈틈없이 불콰해져 있었다. "엉덩이 쳐들어" 상병의 군화 뒤축을 자신의 발로 툭 차면서 군의관은 말했다. "다리 펴" 이번에는 일병의 군화 뒤축을 찼다. "쫙 펴" 어느 누구의 군화 뒤축도 차지 않았지만, 그건 둘 모두에게 내려지는 명령이 분명했다. 엎드려뻗친 채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양 다리를 쫘악 펴라는 그 단계적인 명령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러면 그가 이제껏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꼿꼿하게 서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간파할 수 있으리라. 一 소화기의 말단, 곧 대장(大腸) 끝의 직장(直腸)이 끝나는 곳에 있어 체내의 똥을 배설함. 개구리 . 뱀 . 조류(鳥類),. 어류(魚類) 등은 보통 배설구(排泄口)와 생식기(生殖器)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배설강(排泄腔)이라고 일컬음. 고등 포유동물의 똥구멍. 항문(肛門)...... 결국은 그런 것이었다. 오로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오랫동안 명령은 또다른 명령을 잉태했던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수치심을 철저하게 무너뜨려 나갔던 것이다. 그곳에 실핏줄의 울혈현상이 있나 없나를 확인함으로써 신체의 이상 유무를 판단한다는 그 인간적이어야할 진단 과정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비인간적인 명령에 의해 인성자체를 철저하게 짓밟아 나가야 하는지를 상병과 일병은 도대체 알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키는 대로 그렇게 했다.엉덩이를 한껏 쳐들고 두 다리를 기관단총의 양각대처럼 폈다. 펴도 아주 쫘악 폈다. 참으로 모멸스럽고 눈물겨운 자세였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흘러 머리 속으로 빠르게 밀려드는 것 같았고, 체내의 모든 혈관이 갑작스럽게 부풀어올라 금방이라도 툭 소리를 내며 터져버릴 것 같았다. 붉게 충혈된 네 개의 안구마저 한껏 부풀어올라 툭, 툭, 소리를 대며 떨어겨 내릴 것 같았다. 아듯히 먼 곳에서처럼, 그때 군의관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그들의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일어나 ......" 군의관의 입에서 떨어진 그 한마디 말에 의해 경직되어 있던 모든 시간들은 비로소 본래의 유연한 흐름을 되찾기 시작했다. 모든 게 다 끝난 것이었다. "됐어. 나가봐" 마지막 검진 결과를 서류에다 휘갈기며 군의관은 빠르고 낮게 말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내려진 군의관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상병과 일병은 다시 복도로 나와 접수처 맞은편 벽 쪽에 놓인 목제 장의자에 걸터앉았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 시간의 흐름이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건 현실이 지나치게 부각된 결과인 것 같았다. 그랬다. 이제 그들의 시야로 밀려드는 모든 지상의 사물들은 현실이라는 차원의 문을 고스란히 벗어나고 있었다. 의무대 출입문 바깥쪽으로 내다보이는 땡볕의 세상마저도 그런 몽롱함 속에서는 그저 광량이 지나치게 넉넉해서 무화되어버린 공동(空洞)에 불과했다. 작열하는 태양과 숨막히는 대기도 전혀 근거 없는 과장이거나 왜곡에 불과했고,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자는 인간들의 터무니없는 합의에 불과했다.모든 게 다 그랬다. 이것은 이것이 아니었고, 저것은 저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저 막연할 뿐인 시간이 더러는 흐르고 더러는 흐름을 거스르고 있을 뿐이었다. 실내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그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처럼 그것이 잔혹스런 억압을 통해 조작되어진 것 같다는 기분은 더이상 들지 않았다. 접수 창구 안쪽의 병장은 주간지를 들여다보며 조금씩 졸고 있었고, 그 졸음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듯 어디선가 아주 낮은 노랫소리가 홀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방에선가 라디오를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그 유행가의 선율은 지나치게 단조로워서 그곳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어느 누구든 졸음에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몽롱한 시간 속에 그들은 가라앉아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는 겁니까?"" 일병이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상병에게 물었다. 몹시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해야겠지. 중대장이 이곳으로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입술을 저그시 깨물며 상병이 대답했다. "기다려봤자 허사일 텐데 ...... 그렇죠?" "그렇겠지" "우습군요" "뭐가?" 상병이 일병을 돌아보았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모든 게 다 그런 것 같애요" "초조해 하지 마. 어차피 회피할 수 없는 일이야" 말을 마치고 나서 상병은 힘없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잠시 천정을 쳐다보다가 저그시 눈을 감았다. 피곤한 모양이었다.일병은 머리 둘 곳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이곳저곳으로 눈길을 옮겨가다가, 한동안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선을 고정시켜 출입문 바깥쪽의 나른한 풍경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사방이 조용했다. 뙤약볕이 내리꽂히는 좁은 마당의 지면이 이제는 조금씩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잊고 있던 무엇을 문득 떠올린 사람처럼 일병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의무대 안쪽의 좁고 긴 복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빛깔을 띤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밖을내다보았다. 하얗게 탈색된 듯한 공기가 거기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눅눅한 어둠이 여전히 넘실거리고 있었다.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두 세계의 경계 지점에 자신이 붙박여 있는것 같았다. 관자놀이가 심하게 지끈거리며 깊은 허탈감이 엄습해 왔다. 명암이 만들어내는 극심한 대비감 때문에 순간적으로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벽에다 머리를 기대고 그도 상병처럼 눈을 감았다.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의 단조로운 선율이 그제서야 잔물결처럼 잔잔하게 귓전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이율배반적인 평화가 그를 몹시도 우울하게 만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면들이 서서히 눈앞을 스쳐가면서 내면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눈부신 태양과 건강한 시민들,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슴 부풀게 하는 도시의 저녁 풍경과 푸르른 해변, 건강한 젊은이들의 몸짓과 해맑은 웃음들, 그러면서도 미온적인 세계 속에서 광란하는 불가사의한 삶과 악의에 가득찬 인위적 질서 따위들이 그의 내면을 극심한 혼란으로 소용돌이치게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결같이 조작처럼 여겨져서 그는 서서히 분노하기 시작했다. 내면의 저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그 점진적인 분노로부터 이상야릇한 냄새가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지닌 모든 불안의 위력을 그 냄새는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비밀스럽게 간직해 오던 동경과 남모르게 유지해 오던 나름대로의 삶에 대한 열정이, 그리하여 그 순간 그 냄새 때문에 순식간에 소멸되는 것 같았다. 안개 냄새였다. 젖은 기류의 밑바닥으로부터 피어오르는 그 부드러우면서도 싸늘한 안개 냄새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5. 04시. 정확하게 새벽 네 시에 비상은 발령되었다. 막사 곳곳에서 울려퍼거는 비상벨 소리로부터 그것은 시작되었다. 그 귀따가운 금속성 마찰음들이 신새벽의 정적을 갑작스럽게 뒤흔들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사병들은 재빨리 잠을 털고 일어나 각자의 군장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무표정한 얼굴과 기계적인 동작이었저만, 그 하나하나의 구분 동작은 대단히 민첩하고 정확했다. 입을 여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므로 군장이 맞부딪는 차가운 마찰음만 곳곳에서 단속적으로 튀어올랐다. 이윽고 군장이 갖추어지자 사방에서 군화 발자국 소리가 요란스레 울려퍼졌다. 그러나 놀랍도록 빠른 시간내에 북새통은 잦아들었다. 출동 준비가 완료된 것이었다. 예정되어 있던 비상이라서 사병들의 동작은 지극히 민첩했고, 그런 구분된 동작 하나하나가 전체적으로는 대단한 조직력을 만들어냈다. 순식간에 집결이 완료되자 중대장은 작전 개요와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첫째, 각자 배치된 참호에서 절대 이동하지 말 것. 둘째, 침투하는 대항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포할 것. 셋째, ㅇㅇ훈련단에서 침투하는 대항군은 모두 20명이며 그들의 철모에는 흰 띠가 둘려 있으니 그것으로 피아를 식별할 것. 넷째, 대항군의 영내 침투 목적은 주요 건물 폭파와 요인 암살에 있으며, 그것을 위해 그들은 붉은 폭파 딱지와 먹물이 든 물총을 소지하고 있으니 특히 영내 경계병들은 유의할 것. 다섯째, 대항군의 침투로 인해 아군의 피해가 발생할 경우, 대항군의 침투 경로를 일일이 추적해서 해당 경계병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엄벌에 처하겠다는 상부의 지시 공문이 있었으니 유념할 것. 여섯째, 대항군을 생포하는 사병에게는 l명 생포에 각 3박4일씩의 포상 휴가가 주어질 것이니 구미가 당기는 사람은 20명 모두를 생포해서 60박61일의 휴가를 가거나 말거나 그건 각자 알아서 할 것. 교육이 끝난 뒤에 중대장은 미리 작성해 두었던 비상 훈련 편성표를 발표했다. 각자 담당해야 할 초소와 참호, 그리고 2인 l조로 편성된 경계병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호명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상병과 일병이 같은 조로 편성돼 본부 건물 경계 참호로 배치되게 된 것도 바로 그 자리에서였다. 그것은 사소한 우연의 결과였지만, 일병은 그것을 전혀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졸병된 입장으로 때마다 그런 우연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고참이 누구냐에 따라 주어진 시간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어지거나 혹은 짧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복 사회에서 통용되는 모든 시간의 길고 짧음이 항상 절대치가 아니라 상대치로 결정된다는 걸 일병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상병은 시간의 절대치 위에다 심리적 부담감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그런 고참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상당히 과묵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그 묵중한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깊이가 있어 보였다. 거개의 제복들이 나타내게 되는 경박한 적응력과 그것은 무관해보였고, 상황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기회주의적 속성과도 그것은 전혀 근원이 달라 보였다. 허무의 뿌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이율배반적인 안정감이 그에게는 내재돼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고참과 같은 조로 편성되었다는 걸 어쨌거나 일병은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 경력이 일천한 졸병에게야, 고참을 잘 만난다는 것 이상의 행운이 더는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상이 발령된 그날 새벽의 안개는 참으로 황홀한 것이었다. 한치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자욱한 농무가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작전을 수행하기엔 가장 불리한 기상 조건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환상적인 안개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리멸렬하게 계속되는 한낮의 무더위에 염증을 느껴오던 제복들에게야말로 그 새벽의 안개는 일찍이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여름밤의 꿈 같다고 말하는 사병이 있는가 하면, 여자가 있어야 제격일 것 같다고 말하는 사병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침묵을 고수함으로써 그 안개를 더욱더 은밀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잠시 뒤에는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만 저벅저벅 농밀한 안개를 뒤흔들었다.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비포장 도로와 주도로가 분리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상병과 일병은 외곽 초소 경계병 대열에서 이탈하여 자신들에게 배정된 본부 건물 경계 참호로 향하는 직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본부 건물은 깊은 안개 속에 파묻혀 있었다. 건물 뒤쪽의 산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그 주변에는 불빛마저 없어서 전체적으로는 낡고 오래 된 성(城)을 연상케 했다. 첩첩한 안개 때문에 그것은 또한 귀기가 잔뜩 서린 악령의 소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듯 음험한 자태로 그 건물은 고스란히 안개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일층 중앙의 일직 총사령실에서만 가느다란 형광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건물 앞쪽의 자그마한 화단을 돌아 좌측의 참호를 찾아갔다. 건물 좌측의 후미진 곳에 참호는 있었는데, 얼핏 들여다보기에도 그 안은 상당히 깊고 넓어 보였다. 이윽고 그곳으로 들어가 전방을 내다보니 관측 가능한 범위가 건물의 좌측 벽면으로부터 50m쯤 떨어진 우측의 산 밑까지로 고정되는것 같았다.그 정도라면 수월한 범위였다. 관측을 방해하는 전방 장애물도 전혀 없어서 안개만 아니라면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게 있다면 그 참호의 위치에서는 본부 건물 정면 쪽이 완전히 사각 지대가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 부분이야 자신들의 관측 범위 밖이었으니 달리 더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그 책임 소재가 그들과는 전혀 무관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그들의 참호는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본부 건물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그건 마땅히 지휘관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했던 것이다. 안개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점차로 빨라지면서 시야가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여름날의 이른 새벽빛이 허공에 드리워진 어둠을 밀어내면서 시야는 더욱 드넓어져갔다. "졸리면 자거라. 밖은 내가 살필 테니" 가끔씩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잠을 쫓으려는 일병이 안쓰러운 듯 상병은 낮게 중얼거렸다. 총을 겨누고 있으면서도 일병이 계속해서 깜빡깜빡 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형식치레에 불과할 뿐인 이런 종류의 잦은 훈련에 대해 상병은 대체로 무감각한 편인 것 같았다. 별것도 아닌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려는 조직 사회의 어이없는 과장벽을 그는 싫어하는 것 같았고, 그런 것을 주도하는 지휘관들이나 그런 것에 맹목적으로 휩쓸려버리는 제복들의 단순성 또한 그는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체로 보아 그의 제복 생활은 막막한 현실속을 그저 묵묵하게 잠항하는 듯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삶의 본질과 속성을 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는 자신의 제복생활에 대해 특별한 감정적 기복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모든 면에서 상당히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커다란 기쁨이 없는 대신 커다란 슬픔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묵묵한 생활을 통해, 상병은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지는 현실적 압박감을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 스스로 승화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어떤 세상사에 대해서도 결코 집착하지 않으려는 삶의 경향一요컨대 그것은 힘이 완벽하게 배제된 삶인 것 같았다. 살아야 한다는 분명한 명제도, 살고 싶다는 뜨거운 열정도 그에게는 없는 것 같았고, 또한 살기 싫다는 명제도,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비관도 그에게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안쓰럽게 졸고있는 일병에게 졸리면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태도가 그에게는 지극히 독자적인 무관심의 일종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요컨대 그런 태도가 정신적인 여유라거나 인간미, 동정, 아량, 관용 따위와 전혀 무관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병은 상병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졸음이 가시고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안개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부대 주변을 에워싼 산기슭 쪽으로 빠르게 몰려가고 있었다. 전방을 가로막고 있던 첩첩한 안개도 소리없이 밀려와, 그들이 있는 참호 뒤쪽의 산비탈 쪽으로 물밀리듯이 빠르게 이동해갔다. 그러면서 서서히 아침은 오고 있었다. 그럴 무렵에 그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다발적인 호루라기 소리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은 긴장했지만 자신들의 시야에서 움직이는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핏 참호 밖으로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정된 참호에서 절대로 이동해서는 안 된다는 중대장의 지시 사항이 생각나서 그럴 수도 없었다.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직속 상관으로부터의 명령 !--- 어떤 경우에도 그걸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계속해서 참호 속에 서서, 자신들의 경계구역 안에 어떤 이상스런 조짐이 있는가, 그것만 더욱더 긴장된 눈빛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계 구역 안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호루라기 소리는 잦아들었고,그리고 한동안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난 뒤에, 여러 개의 군화 발자국 소리가 그들이 있는 참호 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러 명의 장교들이 그들이 있는 건물 측면의 후미진 참호 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이 멍청한 새끼들아!" 노란 바탕에 여러 개의 붉은줄이 둘러쳐진 완장을 착용한 일직 총사령이 다짜고짜 그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았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상병과 일병은 그 장교들에게 둘러싸여 본부 건물 앞쪽으로 이끌려나갔다. 본부 건물 앞쪽에는 허리에 권총을 찬 연대장과 몇 명의 장교들이 둘러서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철모에 흰 띠가 둘러쳐진 세 명의 대항군들이 서 있었다. 그제서야 상병과 일병은 본부 건물 출입문 위에 붉은 폭파 딱지가 한 장도 아니고 네 장씩이나 나붙어 있는 걸 보았고, 그리고 조금 전에 들려오던 그 호루라기 소리가 <상황 종료>를 알리는 신호였음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전 참모가 침투 경로를 확인하는지 대항군 중의 하나가 본부 건물 맞은편의 사병 식당 뒷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참패로 끝나버린 상황으로 인해 장교들은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눈치들이었다. 거기, 그 장교들 틈에 상병과 일병의 중대장도 이를 데 없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오래잖아 자신들의 부대에서 보내온 지프를 타고 대항군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 드디어 권총을 허리에 찬 연대장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 한심스런 새끼들아! 두 명씩이나 참호 속에 틀어박혀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적어도 한 놈은 밖으로 나와 주변 경계를 했어야할 거 아냐?" 요컨대 그때로부터 시작된 연대장의 분풀이는 대강 그런 요지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일관되었다. 상병과 일병의 경계 요령이 잘못되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경계 요령은 고사하고, 본부 건물에 폭파 딱지가 나붙게 되었다는 것 자체를 연대장은 이미 상병과 일병의 경계과오로 분명하게 단정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결과로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상병과 일병의 경계 과오에서 비롯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덤터기에 그것은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대항군들의 침투 경로가 그들의 경계 구역 밖이라는 걸 연대장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본부 건물 전체를 방호(防護)하는 데 단 두 명의 경계병만을 배치했다는 작전상의 허점도 그는 또한 참작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조건적이었다. 투시안을 가지고 있으라는 얘기보다 더한 그 억지가,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여지없이 통용된다는 게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다. 그 어처구니없는 연대장의 일방적 논고에 대해, 그러나 상병과 일병은 아무런 항변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느새 피고인이 돼 있었고, 그들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질 만한 가능성은 털끝만큼도 있어 보이질 않았다. 상황은 어느새 그런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연대장은 절대자였고, 그 절대자 앞에서 일개 사병들이 머리를 꼿꼿하게 쳐들고 항변을 하려 한다는 건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상병과 일병은 자신들에게 하달된 명령에 조금도 위배됨이 없이 경계 근무에 임했고, 그리고 그 기간중에 자신들의 경계 구역안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를 끝끝내 입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그 끔찍스런 욕설과 살벌한 분기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위기감이 고조될 때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오로지 중대장을 쳐다보는 일뿐이었다. 그가 바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변호인이라는 생각을 거의 본능적으로 떠올린 때문이었다. 당신만이 우리를 변호할 수 있습니다,당신만이 우리의 억울함과 연대장의 부당한 판단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침묵하고 있습니까, 어째서 당신은 우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방치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참으로 간절하고 숨막히는 애원의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주 교묘하게 중대장은 그들의 눈빛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들이 오직 하나뿐인 구세주라고 믿었던 바로 그 직속상관이 그들을 한 순간에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장교들틈에는 자신이 하달한 명령을 제대로 수행한 대가로 부당한 처벌을 받게 된 부하마저도 자신의 입지를 위해 가차없이 포기해 버리는 무서운 직업 군인 하나가 방관자로 서 있을 뿐이었다. 방관자로 서서, 그 어처구니없는 판결 과정을 다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각자 배치된 참호에서 절대로 이동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하달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였던가. 끔찍스런 유기의 현장,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하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두는 목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어이, 부관! 이 새끼들 인적 사항 적고 오늘부터 영창 대기시켜 !" 판결은 간단명료했다. 그리하여 일심 판결이 곧 최종 판결인 제판,변호인도 없고 항소도 허용되지 않는 즉결 제판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판결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그 판결을 내린 절대자는 자신의 권위에 어울리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퇴장해 버렸다. 모든 것이 참으로 순식간에 끝나버린 것이었다. 영창 대기. 그들의 밑도끝도없는 대기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숨막히는 위기의 시간은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일주일 내내 대기와 대기의 연장선상에다 희미한 기대감 하나씩만 달랑 걸어둔 채, 이제나저제나 해제의 시간이 오기만을 눈빠지게 기다리며 그들은 낯선 시간 속을 끝없이 부유해 다녔다. 그들에게 허용된 건 오직 대기뿐이었고, 그랬으므로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끔찍스런 폭양의 계절이었고, 그리고 숨막히는 대기의 공간이었다. 한낮의 무더위는 지상의 모든 사물들을 주눅들게 만들었고, 그런 세상이 때로는 회생 불능의 환자들로 가득 찬 낡고 오래 된 병동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그 일주일 동안 외부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그들은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나고 있는지, 바야흐로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차단된 사방의 벽, 완벽하게 유리된 공간, 명령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된 시간 속에 그들이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중대장이 연대장에게 찾아가 사정을 했다고 하기도 하고, 참모들이 그들의 입창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었다고도 했지만,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그들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지은 죄도 없이 죄인이 되어버린 애초부터의 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그 모든 일들이 자신들의 자의와 전혀 무관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명백한 상황 판단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무기력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끔찍스런 유기(遺棄)로부터 철저한 위기(委棄)까지, 그 일주일 동안 중대장이 스스로 그들을 찾아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절망감은 더욱더 배가(倍加)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대장에 대한 배반감은 서서히 모별감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그걸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때때로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간의 완류(緩流)에다 징검다리를 놓곤 했다. "명령의 절대적 가치란 걸 생각해 본 적 있나요?" "글쎄 ...... 합리성에 기초한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명령권자가 자신의 명령에 소신을 가지지 못하면 그땐 어떻게 됩니까?" "물론 소신도 중요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엔 명령 체계의 권위주의를 지적해야겠지" "그럼 마지막에 남는 건 도대체 뭡니까? 이렇게 명령이 명령을 무화시켜 버리면 말입니다" "계급이 남겠지" "명령의 정당성을 계급이 대신하는 셈이로군요" "계급이 곧 권위고, 그 계급의 권위가 바로 명령의 권위야. 하지만 계급과 합리적인 판단력이 비례 관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없어. 다만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말이 있을 뿐이지. 그리고 그건 자아를 포기하라는 뜻이야. 우리는 명령을 제대로 수행한 대가로 또다른 명령에 의해 폐기처분 당하는 희생물에 불과해. 권위의 모순 구조가 만들어낸 희생물" "이런 어처구니없는 희생을 권위의 발판으로 악용한단 말입니까?" "우릴 소모품으로 생각하니까" "기가 막히는군요. 정말......"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는 옷을 벗고 정치를 해. 기상 시간부터 취침시간까지, 오로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으라는 말만을 끝없이 되풀이하던 그런 사람들이 말이야" "그때에도 마찬가지로 나쁜 결과가 도래되면 자신들은 발뺌을 하겠군요" "명령의 부당성을 자인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상황을 강조하려 하겠지. 발포 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 발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뭐 그런 식으로 말야" "끔찍하군요,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 "실권자(實權者)가 사실은 실권자(失權者)가 돼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지. 용인된 권력을 올바르게 구사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개인적인 힘을 포기해야 하는 거야. 그걸 모르기 때문에 권력이 무소불능의 사력 (私力)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고, 그리고 도덕과 윤리와의 쟁투일 수밖에 없는 정치가 패도를 걷게 되는 거야.하나마나한 얘기 ...... 답답해" "숨이 막히는군요" 그들이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시피, 그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요컨대 <숨이 막히는> 한계 상황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대기의 공간에서도 상병과 일병의 태도에는 분명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일병의 좌불안석하는 듯한 태도에 비해 상병의 그것은 지나치게 묵중하고 또한 관조적인 구석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상병의 그런 태도를 일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믿길래 저렇듯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 그아말로 창졸간에, 이게껏 유지해 오던 일상적인 생활의 굴레에서 밀려나고 말았다는 생각 때문에 일병은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이없이 주어지는 많은 시간적 공백이 그를 지레 질리게 했고, 일찍이 경험할 수 없었던 정신적 긴장감이 시시각각으로 그를 놀라게 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종래의 보호를 거부하여 그를 보호받지 못하게 하는 상태에 두는 일>, 그리고 <버리고 돌보지 않음>一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그는 자신이 유기되고 또한 위기당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좀체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필요에 따라 이용되다가 때에 따라 버려지는 소모품처럼, 그 숨막히는 대기의 공간에 볼품없이 던져져 있는 자신의 처지를 그는 끝없이 비관하면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제복 사회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결과뿐이었다. 나쁜 결과가 초래되게 된 과정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야말로 파렴치한 변명 이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취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중대장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것과 대항군들의 침투 경로가 그들의 경계 구역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 그리고 대항군들이 규정을 무시한 채 철모를 벗고 행동했을 뿐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비상 발령 이전에 이미 영내로 침투해 잠복하고 있었다는 참작될 만한 정상 따위들이 그들을 구제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질 못했다. 비상훈련의 결과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절대자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은밀하게 내정해 두었던 교시물(敎示物)처럼, 철저한 좌시(坐視)의 대상으로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이유로 더이상 영창 대기를 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들은 또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마도 권위의 사전에 번복은 없는 모양이라고. "저는 중대장님이 명령하신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그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명령이 상황과 상대에 따라 매번 다르게 해석되어진다면,도대체 어느 누가 자신의 명령에 소신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그것에 복종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억울하다는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병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중대장실로 찾아갔다. 상병도 모르게 답답한 심을 견디다못해, 참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드디어는 그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병의 눈물 섞인 하소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대장은 이를 데 없이 냉랭한 표정으로 그의 말문을 이렇게 막아버렸다. "돌아가" 그 한 마디뿐이었다. 더이상 그는 입을 열지 않았고, 그것으로 일병과의 거리감을 분명하게 유지하려 했다. 그렇게 냉담한 반응을 노골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중대장의 태도를 보면서 일병은 더욱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계의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참패로 끝나버린 훈련의 결과, 다시 말해 부하를 잘못 두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자신도 연대장에게 호되게 당했다는 걸 중대장은 역으로 강조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피해는 너희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도 있다, 요컨대 그런 걸 묵시적으로 강조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는 일병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곳에서 등을 돌리고 나오면서 일병은 있는 힘을 다해 어금니를 악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중대장이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중오심 때문이었다. 아아, 도대체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나는 저런 인간을 찾아갔던 것일까....... 그러나 문제는 비단 중대장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장사병들은 별명(別命)이 있을 때까지 매일 저녁 일과 끝난 직후에 완전군장 구보를 실시하라는 지시가 연대장으로부터 하달되어진 것이었다. 참패로 끝난 작전, 어이없이 손상되어진 자신의 체면 따위를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취택(取擇)하게 된 일종의 보복 조치인 셈이었는데, 그 보복이 참으로 잔인했던 건 모든 장사병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 완전군장 구보에서 단, 상병과 일병만은 제외시킨다는 단서를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준엄해야 할 권위가 감정적 독성으로 변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그 독성은 전혀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고, 그것으로 인해 상병과 일병은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끔찍스럽게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기만으로도 숨통이 막히는 판에, 모든 부대원들로부터 비난과 원망과 증오와 질시가 이글거리는 따가운 눈총까지 무시로 받게 됐으니 뭔가, 그게 바로 피를 말리는 형벌의 과정이 아니고, 그게 바로 고사지경(枯死地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걸 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옳단 말인가.그것은 대기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이미 끔찍스런 참형(慘刑)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듯 힘겨운 대기와 대기의 나날을 통해, 일병은 자신이 현실로부터 완벽하게 버림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은 죄도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게 견딜 수 없이 괴로웠지만, 이윽고는 그런 억울한 감정도 제풀에 지친 듯이 빠르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많은 걸 원망했지만, 드디어는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 변화랄 수 있었지만, 그것이 감정적인 초연(超然)을 뜻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불행을 우연의 결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통해 필연적인 현실을 역으로 회피해 나가기 시작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행위의 결과를 우연의 결과와 동일시함으로써 얻어지는 다소간의 심리적 안정감, 그것이야말로 요행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림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아주 잠시 회피해보려는 얄팍한 사행심(射倖心)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것이 대단한 발견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그 어처구니없는 우연의 정리(定理)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이 아닌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고,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운행 질서가 불가사의한 우연의 맞물림인 것 같았다. 그런 우연과 우연의 지속적인 맞물림이 결국은 하나의 운명을 조성해내는 것 같다는 판단은 차라리 신비스런 일면이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예컨대 세상에 태어나는 시간이 아주 조금만 달라져도 우연의 연결 고리가 전혀 다른 쪽으로 이어지게 될 인생, 그 장구한 우연의 지속을 더듬어 볼 때, 그 중의 어느 한 순간만 달라졌어도, 적어도 지금과 같은 불행과의 조우는 분명하게 피해갈 수 있었으리라는 때늦은 안타까움에 그는 단단히 사로잡혀버린 것이었다. 아아, 살아온 날 중의 어느 하루, 그 어느 한 순간만 달라졌어도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을! 6. 의무대 복도는 여전히 깊은 정적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접수창구 안쪽의 병장은 여전히 졸고 있었고, 복도 끝 쪽에 괴어 있는 푸르스름한 어둠은 여전히 넘실거리고 있었으며, 출입문 바깥쪽의 좁은 마당에는 여전히 땡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낮고 단조로운 유행가 또한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고, 실내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모든 게 다 그대로였다. 상병은 여전히 벽에다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일병은 여전히 무기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앉은 공간에서 그들은 여전히 대기하고 있었지만, 의무대로 연락하겠다던 중대장으로부터의 전화는 여전히 걸려오지 않고 있었다. 오래 된 정적에도 진력이 났는지 일병도 이제는 상병처럼 눈을 감고 벽에다 머리를 기댔다. 오늘 오후가 아니면 내일쯤에는 일찍이 가본적 없는 영창에 갇혀 박탈당한 자유와 잃어버린 일상을 아쉬워하겠지...... 씁쓸한 미소가 저절로인 것처럼 입가로 밀려나왔다. 그러면서도 드넓은 평야와 동터오는 지평선, 낙엽을 적시는 가을날의 가랑비와 눈덮인 설원 따위가 두서도 없이 그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어쩌면 저금이야말로 희망 없는 현실을 수용하기 위해 안정을 취해야 할 시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게 과연 가능한가? 보일락말락하게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불안을 덜어낼 만한 온갖 것들을 다 떠올려 보았지만, 그런 짓거리야말로 의식을 학대하는 지나친 자학행위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만 두드러졌다. 그것이 설령은 환상일망정, 어쨌거나 인간의 삶에는 희망이 필요한 게 아닌가.그러나 지금 그에게 남겨진 건 그런 것과는 너무나도 무관한 것들뿐이었다. 희망을 무색케 하는 불확실한 미래와,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무기력한 영혼을 제하고 나면 남는 건 오로지 지친 육신밖에 없었다.희망과 무관한 현실, 그리고 현실과 무관한 희망, 그 숨막히는 간극속에 사실은 이성(理性)이 숨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눅들린 이성을 지배하는 건 팽팽한 긴장감일 터이고,그 긴장감에 채찍을 가하는 건 언제나 다스림의 차원 밖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불안과 초조가 분명할 터이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꿈을 꾸는가.희망이 환상이란 얘기는 곧 환상이 희망을 대신해줄 수도 있다는 얘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희망과 환상의 치열한 교전이 끝난 뒤에 갑작스럽게 엄습해 오는 허무감, 그것을 견뎌내지 못해 인간들이 때때로 삶에 단절을 꾀하기도 한다는 건 결코 새로운 발견일수 없을 것이었다. 드넓은 평야와 동터오는 지평선, 낙엽을 적시는 가을날의 가랑비와 눈덮인 설원 따위가 거듭거듭 눈앞을 스쳐가고,과거 속에 묻혀 있던 숱한 기억의 편린들이 온몸 구석구석에서 날카롭게 빛을 발하는 시간이 일병에게는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다만 한 가지, 찰나 속에서도 장구(長久)를 맛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인간, 그런 나약한 존재의 본능이 격렬하게 그를 스쳐갔다는 것뿐이었다. 따르르르릉.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던 실내의 정적을 갑작스럽게 뒤흔들기 시작한 건 하오 두 시가 조금 못 되어서였다.오래 된 정적을 무너뜨리며 살아오른 그 소리의 파장은 지나치게 충격적이었고, 그러면서도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일병이 눈을 뜨면서 그 전화벨 소리를 그날 새벽의 비상벨 소리로 착각한 건 결코 과민한 반응이 아니었다. 눈을 뜨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는 황황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날카로운 위기감이 느껴겼다. 그 실내에 처음 들어설 때 느껴지던 조작된 듯한 평온이 그제서야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낭자한 피와 죽음을 거부하는 듯한 발광이 사방에서 되살아나, 그때까지의 평온을 기어이는 광란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것 같았다. 나른한 오수에 빠져 있던 병장이 수화기를 집어드는 동안, 일병은 차단된 사방의 벽과 싸늘한 철창, 흐름을 상실한 시간과 영어(囹圄)의 몸 따위를 빠르게 생각했다. 텅, 텅, 텅, 사방에서 거대한 철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병장이 빠르게 입에 담는 통신보안, 의무대 황병장임다, 옛, 충성 ! 따위의 판에 박힌 듯한 수화 내용을 그는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지나치게 부각된 현실이 힘에 겨운 등짐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병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본부 중대 사병들 !" 상병과 일병이 긴장된 표정으로 접수 창구 앞에 섰을 때, 병장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잠시 사이를 두면서 그는 의자에 걸쳐두었던 자신의 제복 상의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그 즉시 피울 생각은 아닌 듯 테이블 위에다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중대로 돌아와서 다시 대기하랍니다" "그것뿐이었습니까?" 일병이 빠르게 물었다. "다른 얘긴 없었습니다" 전해줄 얘기가 그것뿐이어서 자신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병장은 말했다. 어떤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였으면 좋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그러나 그는 끝끝내 개인적인 사담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병이 너무나도 절망적인 표정으로 창구에서 등을 돌릴 때, 상병은 어느새 출입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7. 의무대로 갈 때와 똑같은 길을 되돌아가면서 그들은 극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마실 수는 없었다. 목이 말라요....... 숨을 헐떡이며 일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주변의 어디에서도 시원한 물이 샘솟는 곳은 발견되어지지 않았다. 언덕을 넘고 다시 주도로로 올라섰지만, 거기도 예외는 아니었다.정말, 사막보다 더하구나....... 체념적인 어조로 그제서야 상병은 중얼거렸다. 그리하여 물 한모금 얻어 마시지 못한 채 불볕더위의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죄수들처럼, 그들은 시간의 흐름보다 훨씬 빠르게 지쳐가지 않을 수 없었다. 포박당하지 않아도 더이상은 도망갈 곳도 없는 끝없는 지평 一 거기에는 오로지 살인적인 폭양만이 이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다시 대기하라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이윽고 일병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들은 하오 두 시의 극에 달한 폭염 속을 걷고 있었다. "이송시키기 위해서겠지" 앞만 보고 걷는 상병의 이마 위에서, 그때 태양은 사각(斜角)을 이루며 작열하고 있었다. 하늘은 탈색돼 있었고, 태양은 지나치게 부각돼 있었다. "혹시 말이죠" 말을 하기도 힘에 겨운지 일병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선가 우리들의 입창 대기를 해제하기 위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일병은 어떤 기대감을 갖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입창 신체 검사를 받았는데도 다시 대기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걸 그는 그렇게 희망적으로 해석하고, 또한 그것이 상병에게서도 동의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어리석은 기대는 접어두는 게 좋아" 상병은 여전히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이제 더이상은 부질없는 기대로 자신을 부풀리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지, 그걸 스스로에게 다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비관적입니까? 도대체 우리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안타깝다는 듯이 일병은 말끝을 흐렸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요행을 기대하지 마" 분명한 어조로 상병은 잘라 말했다. "요행이라구요?" <요행>이라는 어휘에 대해 일병은 상당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쓸데없는 기대감으로 자신을 구속하지 말란 말야" 못을 박듯이, 상병은 더욱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그런 종류의 기대감도 가질 수 없다면, 그럼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 숨막히는 현실을 견뎌나가라는 겁니까? 우리는 죄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걸 모르고 하는 얘깁니까?"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일병은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였다. 공포가 분노를, 안타까움이 반항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건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리라. "견딜 수 없는 건 이런 게 아냐, 임마!" 순간, 상병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일병을 노려보았다. "이런 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게 견딜 수 있다는 겁니까? 전 억울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무섭고 두려워요. 그걸 부정할 수 있습니까, 예? 영창은 놀이터가 아니라구요!" 무슨 터무니없는 얘기를 지껄이고 있냐는 듯, 일병의 표정과 어조와 몸짓 전체가 그 순간 갑자기 도전적인 양태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태도가 몰고 온 건 결국 어이없는 반전(反轉)뿐이었다. "그럼 자식아!" 상병이 그때 갑작스럽게 돌아서면서 일병을 향해 벽력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일병을 노려보는 그 눈빛에서 살기가 번뜩이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건 결코 아니었다. 몸 전체로 광기를 내뿜으며, 너무나도 많은 말을 그는 발작적으로 토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 말해봐! 어떤 기대와 어떤 희망을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는지, 그걸 말해 보라구! 영창을 간다는 것,그리고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것, 그게 그렇게도 두려운가? 그런 일이 왜 생겨났는지, 그런 건 뒤로 물리고 오로지 일신상의 불이익 그 자체만 두려운 건가? 그런 걸 그렇게도 애지중지할 생각이었다면, 너나 나나 태어난 것 자체를 후회했어야 해! 네 눈엔 내가 태연을 가장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냐,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나도 인간이고, 나도 희망을 갖고 싶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살고 싶어! 그런 걸 우리가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결과가 생겨났나? 아니잖아! 분명히 아니잖아! 참으로 절망스러운 건 바로 그런 거야! 우리들의 자의사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이렇게 절망하고, 이렇게 유기당하고, 이렇제 미물처럼 허덕거리게 만드는 저 악의에 찬 힘 ! 그것 때문에 나도 눈물겹게 절망하고 있는 거라구! 도대체 우리가 한 일이 뭔가? 도대채 어떤 일을 우리가 하고 또한 어떤 일을 우리가 하지 않았지? 아무것도 없어 ! 아무것도 없단 말야! 봐,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신세가 됐어! 악의에 찬 필연을 우연으로 위장해서 인간을 철저하게 도구화시키려는 몇몇 인간들에게 과연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 그리고 그런 인간 몇몇에게 이 세상 전체가 맡겨져 있다고 가정해보라고! 참으로 내가 두려워하는 건 바로 그런 거야! 정의와 무관한 세상, 그런 세상에 던져져서 자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허덕거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런 걸 한 번쯤 생각해보란 말야! 정의에 대한 기대감을 완벽하게 상실한 채, 참으로 정의와 무관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그 끔찍스런 사실을 말야!" 거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그는 한동안 가슴을 들썩이며 거칠어진 호홉을 가다듬었다. "난 그런 게 두려워. 힘을 잘못 사용하는 인간들. 그리고 이런 것 때문에 병든 개들처럼 쓰러져가는 인간들...... 그런 데 대한 두려움이 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거야. 영창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영창에 이르게 된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봐. 필연으로 가장된 우연은 운명이랄 수 있겠지만,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은 결코 그게 아니야. 그것이야말로 모든 걸 운명으로 체념하게 하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길들여지게 하기 위한 가증스런 힘의 책모일 뿐이지. 너나 나나 적어도 지금은 그런 걸 직시하고, 그리고 그런 게 얼마나 끔찍스런 것인지, 그런 걸 생각해야 할 때야. 그 나머지는 나도 몰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니까......" 굵은 땀방울이 상병의 이마에서 비오듯 홀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래도 그렇죠. 이제 도대체 뭡니까,예? 결국 우리는 폐기처분을 당한 거예요...... 소신 없는 명령을 수행하고,그 대가로 부당한 명령에 의해 처벌되고...... 그러고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게...... 그게 미치도록 괴로워요, 저는......" 온몸을 뒤틀면서 일병은 진저리를 쳐댔다. 어떤 주체할 수 없는 울분 때문에 참으로 이제 더는 단 한 순간도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그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 그러나 일병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상병은 더 이상 아무런 얘기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금니를 굳게 다문 채, 그는 한동안 복사열이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노면만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제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었다.그런 시간이 아주 잠시 흐르고 난 뒤에, 모든 것이 힘에 겹다는 표정으로 상병은 몇 번인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곧바로 돌아서서 일병에게 등을 보였다. 늘어진 어깨와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더할 나위없이 위태로운 몸짓으로 그 뜨거운 땡볕 속을 기어이는 다시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등판 전체가 빈틈없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일병은 상병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악의에 찬 힘이 어떤 것인지, 그것의 실체를 분명하게 간파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그것에 반항하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가던 길을 다시 가는 상병이 일병에게는 지독스런 내면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복사열이 가물가물하게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길을 걸어서 결국에 그가 이르게되는 곳은 어디일까? 이 뜨거운 땡볕 속을 걸어서 간다고 해봤자, 결국에는 눈물겨운 대기의 공간에 이르게 될 뿐인데, 그는 도대체 무슨 심사로 그 끔찍스런 길을 필연처럼 다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공간,비지땀을 흘리게 하는 무더위와 지리멸렬한 시간의 완보가 있는 곳.그리고 그 공간, 감당못 할 정적과 밑도끝도없는 명령이 숨통을 조여들게 하는 곳...... 그 공간이 갑작스럽게 되살아나서 일병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하여 그 시간의 태양이 그에게는 오로지 끔찍스런 절망의 핵으로만 여겨져서, 아무런 사전적 조짐도 없이 갑작스럽게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안구가 욱신거리는 건지 누선이 아려오는 건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 흐려진 시계(視界) 속에서도 여전히,일병이 가지 못하는 길을 상병은 가고 있었다. 복사열이 만들어내는 가물가물한 빛의 굴절 현상처럼,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면서 그는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날의 하루해는 지나치게 길었다. 태양은 잔인했고, 지상의 피조물들은 더할 나위없이 무기력했다. 태양이 만들어내는 단조로운 풍경이 고작 정복자의 폭압과 숨죽인 채 허덕이는 점령지의 시민 따위를 연상케 할 정도라면, 이제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새로울 게 없는 세상이었다. 여전히 땡볕은 무력(武力)에 가까운 기세로 쏟아져내리고 있었고,항거를 체념한 듯 지상의 피조물들은 한결같이 풀죽은 기색으로 늘어져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세상이 계속되어져 왔는지, 그런 걸 역으로 생각케 하는 태양의 그늘이었다. 8. 그날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의 종적을 감추어버리고 말았다.아침이 되어서야 그의 부재는 확인되었지만, 묘연해진 그의 행방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탈영일 게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렇게 단정할 만한 판단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중대원들에게 영내 수색 명령을 내리면서 중대장은 대단히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24시간 내에 나타나지 않으면 탈영으로 보고할 것이다" 그날 오후 2시경에 그의 주검은 발견되었다. 그의 주검은 전날 상병과 일병이 의무대로 가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던 바로 그 언덕 숲속의 아카시아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푸르른 창공, 한가롭게 떠도는 몇 점의 백구와 가뭇없이 드넓은 대양, 그리고 키 작은 해송과 부드러운 솔바람, 흰 파도, 뭉게구름, 달아오른 백사장...... 방황과 동경, 갈망과 향수로 얼룩진 모든 인간들에게, 발길 닿을 때마다 영원한 생명의 상징처럼 숨쉬며 밀려오는 바다...... 그 평화로운 수평의 상징을 떠올리며 덧없이 안타까워하던 바로 그 아카시아 나무 그늘이었다. 하오 2시, 그 극에 달한 폭양의 시간에 발견되어진 주검을 확인하기 위해 오래지 않아 의무대에서 사람이 왔다. 바로 전날 상병과 일병의 신체 검사를 담당하던 군의관一자신에게 도움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사람이 죽어가는 시간에도 더할 나위 없이 초연하게 보일 것 같던 바로 그 군의관이었다. 그는 여전히 전날과 다를 바 없는표정으로 이 귀찮은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듯했고, 그 시간 뒤에 도래하게 될 자신만의 내밀한 시간을 열렬하게 학수고대하는 듯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지는 몰라도, 그는 나무에서 끌어내려진 주검의 사망 시간을 새벽 2시경으로 추정했다. 염위가 극에 달한 하오 2시에 새벽 2시의 죽음을 추정하면서, 그러나 그는 죽음의 이유만은 단정적이란 듯 말없는 시신을 이렇게 비웃으며 사라겨갔다. "한심한 자식, 영창 가게 됐다고 목을 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의 판단은 군의관과 같았다. <입창비관자살> - 그게 이미 요지부동의 단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저마다의 단정이 전체적인 확신으로 확산되었을 때, 그 한 사람의 생애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매장이 완료돼 있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설령은 아닐지라도, 한 사람의 생애를 망각하는 데 소요되는 인간들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하룻밤의 흉몽처럼 그의 죽음은 잊혀겨갔고,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거론되지 않았다. 일병이 죽은 다음날 아침, 상병은 곧바로 입창되었다. 일병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입창 명령을 이행하라는 또 다른 명령이 기어이는 하달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영창으로 이송되면서 상병은 비로소 일병의 죽음이 명령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명령에서 벗어난 자아,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의지가 그 죽음의 의미 속에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는 자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적 의지를 그가 끝끝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무화시켜버림으로써, 오히려 그런 선택적 의지를 역으로 강요하는 듯한 광망(狂妄)한 현실 속에 그 자신이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년 내내 변하지 않는 기후처럼, 열독(然毒)이 온몸으로 퍼겨나가는 끔찍스런 폭양의 계절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3. 돌아오지 않는 詩人을 위한 심야의 허밍코러스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에 시인 이욱(李旭)과 내가 <문화통신>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건 전적으로 그와 나의 고약한 술버릇 때문이었다. 그때 이미 그와 나는 인사동 뒷골목에서 이차째의 술을 마신 뒤였는데, 웬지 모르게 그날따라 술기운이 제대로 퍼져 오르질 않아서 우리는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어떤 견딜 수 없는 울결(鬱結) 상태로 인해 술을 마시는 일이 차라리 곤욕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했는데, 술을마시며 살다 보면 더러 그런 날이 있었다. 술이 위벽의 모세혈관을 따라 혈액 속으로 순조롭게 휩쓸려 들어가야 술기운이 제대로 퍼지는 법이거늘, 이건 기껏 힘들여 마셔댄 술이 고스란히 위장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으니 뭔가, 밥통 속에 술병이 들어앉은 꼴이라. 서로가 서로의 그런 난감한 상태를 확인하면서 아무런 뜻도 없이 <에잇, 썩을!>이라거나 <육실!>을 거듭하면서,그러면서도 별 도리없이 그와 나는 생각날 때마다 잔을 들어올려 그 쓰디쓴 소주를 입안에다 무시로 털어놓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음주가 아니라 위험한 매설(埋設)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짓거리였다. 그렇듯 위장 속에다 무작정 비축하듯이 퍼부어댄 술은 어떻게 되는가. 어느 한 순간, 단 한잔 술의 점화(點火)로 인해 그것은 매설되어 있던 대전차 지뢰처럼 순식간에 폭발해버리게 되고...... 그리고 그 다음은 <기억에 없다>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가 고스란히 독이 되어가는 과정이 그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끔찍스런 독을 기를 쓰고 마셔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봄부터 시인 이욱과 나는 거의 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분명히 그것은 <못한> 게 아니고 <안한> 거였다. 그와 나의 만남이 으레 술자리로 연결되었으므로, 그것은 곧 그와 내가 그 지나간 시간동안 전혀 만나질 않았었다는 얘기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그러면서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어느덧 겨울의 어귀에 우리는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무슨 별다른 소식이 없었나 해서 서로에게 전화를 걸어본 게 두어 번 정도였는데, 교류로 치자면 그게 고작일 뿐이었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서 확인되는 어떤 무소식 때문에 지극히 절망하고 있었고, 혹은 절망하지 않기 위해 하찮은 소식일지라도 목이 타게 갈망하고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하던 소식은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전해지질 않았다. 폭양의 계절이 가고 조락(凋落)의 날들이 덧없이 흘러갔지만,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우리들이 기다리던 소식은 끝끝내 전해져오질 않았다. 그러면서 조석으로 칼바람이 면상을 후리고 지나가는 마지막 계절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겨울이 오기 전에야, 설마......> 하던 우리들의 기대마저도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것으로 고스란히 굳어지고 말았다. "신문 봤는가, 오늘?" 그날 아침에 내게 전화를 먼저 걸어온 건 이욱 쪽이었다. "무슨?" 오후 한 시가 지나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고,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골을 파고드는 벨소리를 견뎌내지 못해 기어 이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그의 송화에 응하기 시작했다.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이 선고됐어" 이욱의 목소리는 지극히 조심스럽고, 그러면서도 긴장돼 있었다. "아니 누가 그렇단 말야, 난데없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어 나는 다소 짜증스럽게 그에게 되물었다. "아니 이 사람이? 에잇, 말이 안 되겠구만. 나중에 잠깨고 정신들거든 신문 보고 다시 전화하자구. 알간?" 이욱이 감자기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아니 도대체 뭔데 그래 ? 알려나 달라구" 내가 목소리를 낮춰 능청을 떨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끊어 !" 그 한마디를 내뱉으며 그는 단호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결국 이욱이 걸어온 전화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탄불이 또 꺼졌는지 방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갈아 뒀어야 마땅할 터인데,그 한 치 앞도 대비하기 싫어하는 어쩔 수 없는 게으름 때문에, 말하나마나 뒤에 겪는 고생은 늘 배가(倍加))되기 일쑤였다. 어줍잖게도 소설만 써 보겠다고 6년 동안이나 몸담아왔던 직장을 버린 게 어느덧 l년이 다 돼 가는데, 소설에 대한 가능성이나 제능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 기간 동안 내가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구제불능성이라고밖에 달리 더는 판단되어지질 않는 끔찍스런 나의 게으름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욱은 어쨌거나 나보다는 한 수위의 사회성을 지닌 인물이 분명했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그리고 주목받는 시인으로, 그는 개인적인 입지를 성실하게 구축하며 살아가는 인정받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나의 대학 동창이었지만, 사회적인 면으로는 나보다 훨씬 높은 고지를 점하고 있는 대선배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마당에 떨어져 있는 조간신문을 집어들면서, 나는 이욱이 전화로 내게 얘기하던 내용이 무엇인지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신문 l면 머리 기사로 그 내용이 보도돼 있었던 것이다. - 문익환목사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선고. 방북 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돼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던 문목사와 유원호 씨에게 각각 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씩이 선고됐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와 함께, 형을 선고받고 교도소로 되돌아가기 위해 호송차에 오르는 노목사의 다소 초췌해 보이는 사진도 1면에는 함께 실려 있었다. 이것 때문에 이욱이 전화를 했던 게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나 신문은 더이상 보지않았다. 그 신문에 게재된 기사와 사진을 본다는 게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뜻했던 지난 봄이 생각났고,그러다가 갑자기 겨울!一 아아, 나는 방안이 너무 썰렁하다는 생각때문에 순식간에 기분이 비참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먼 이방(異邦)을 정처없이 떠돌며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을 한 영혼의 가련한 부랑(浮浪)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매캐해졌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퇴근하고 만나세" 이윽고 이욱에게 다시 진화를 걸었을 때, 나는 거두절미하고 그 말만 대뜸 건넸다. "그럴 줄 알았어, 도대체...... 도대체 이게 무슨 장난의 운명이란 말인가. 할턴 오늘은 좀 보세" 이욱이 말한 <장난의 운명> - 그제 참으로 적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의 퇴근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나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술자리가 시작됐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고 술잔을 기울이게 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서로를 위해 비축해둔 말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그 순간부터 갑작스럽게 당황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셔대는 술의 양과 취기가 전혀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 또한 아울러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노목사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일차에서 이차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우리는 정치 따윈 입에도 담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가슴만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가슴 속에서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끈질긴 연민의 정이 시린 새벽의 서릿발처럼 하얗게 퍼져나가는 걸 또렷하게 목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못 견딜 지경이되면 <에잇, 썩을!> 하면서 한 잔, 마주보기 뭣해서 장단을 맞추듯<육실 !> 하면서 한 잔 - 취해 오르지도 않는 술을 우리는 터무니없는 오기로 마냥 마셔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끝에, 결국 <문화통신>으로 가자는 제안을 먼저 입밖으로 꺼낸 건 이욱 쪽이었다. 사실은나도 은연중에 그곳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가 그걸 먼저 입에 담았으므로 나는 그저 그 신통스런 두 사람의 교감상태가 놀라워 입만 헤벌쩍하니 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서로가 그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더이상 주저하거나 새롭게 상대방의 의사를 타진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제법 빠른 걸음걸이로 인사동에서 광화문까지, 그 인적이 차츰 뜸해져 가는 냉랭한 밤거리를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통> - 우리들이 흔히 그렇게 축약해서 부르는 그 집은 참으로 대한민국에선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괴이쩍은 구석이 많은 술집이었다. 광화문통 뒷골목의 다 쓰러져가는 기와집 뒷마당을 베니어합판으로 뚝딱거려 칸을 만들고, 집 대문에다 흰 페인트를 칠해 그걸 그대로 출입문으로 삼고, 방으로 쓰이던 서너 평짜리 공간에다 탁자 두어 개 놓고, 마당으로 쓰이던 두어 평의 바깥 공간에다 다시 두어개의 탁자와 의자 놓고, 그 비좁은 공간의 한쪽 구석에다 술과 안주 담은 아이스 박스 하나 놓고, 그러고는 소주로부터 양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마실 것들>을 팔면서, 그러면서도 그 술집의 종류에 관해서만은 끝끝내 <카페>이기를 고집해, 흰 폐인트로 도색한 철대문 위에다 굳이 이라고 쓴 창호지를 내붙여 놓은 집 一그 집이 바로 그런 전대미문의 주막(!)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발길이 언제부터 그 집 문지방을 넘나들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희미하게는 <80년 그해 서울의 봄>이 사라지던 무렵부터, 혹은 <시절이 하 수상하여> 할 일이 오로지 술 마시는 일밖에 없는 것처럼 여겨지던 무렵부터, 알게 모르게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점차로 늘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심정의 소유자들이 모여 앉아서, 밖에서 떠들면 <큰 일>날 얘기를 <큰 일>이 나지 않고도 크게 떠들어 젖히기 위하여, 이심전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보면 그 연원으로 보아 그게 그리 크게 왜곡된 얘기는 결코 아닐 것이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직업들도 다종다양해서 승려가 있는가 하면 시인, 소설가, 화가, 평론가, 기자, 희곡작가,전위무용가, 방송 스크립터, 잡지 편집인, 교사, 대중가수, 고등 룸펜(高等 Lumpen), 정체 불명의 떠돌이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천차만별하고 또한 무궁무진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직업이 문제되지 않았고 나이가 문제되지 않았으며, 학력이나 학식의 박학(博學)과 다문(多聞) 따위들이 결코 문제되지 않았다. 그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묵계적인 합의처럼 형성되어 있는 기류 - 그게 바로 <인간적>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적>이란 것 - 그것은 곧 사람 사는 일을 통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따뜻한 온정>이란 것과 곧바로 상통하는 말이기도 했다. 요컨대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이에 대해, 적어도 그런 측면에서의 상실감 때문에 저마다 허기진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통>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드는 술집이었다. 그리고 그 집을 지키는 <대가 센> 주인여자가 사실은 인간적인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세상 풍파 꽤나 맛본 뒤에, 그 나름대로 세상 사는 주관을 꼿꼿하게 고수해 나가면서, 어떤 종류의 손님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화제가 풍부해진 50줄의 아낙네 -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불러도 전혀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을 만큼 그녀는 많은 단골들과 막역한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막역한 사이라는 것 때문에 전혀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그녀와 우리가 공범이 되게 된 그 근원적인 이유란 것도 곰곰 따지고 생각해 보면 그 막역하다는 관계 때문에 야기된 어처구니없는 불상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욱과 내가 지난 봄 이후 <문통>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이유를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도 우리처럼 죄책감과 연민의 정 때문에 항상 마음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공동정범(共同正犯)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지난 여름 장마철의 어느날엔가, 혹시 그간 무슨 소식이라도 없었나 싶어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결코 쾌연(快然)하게 지낼 수 없는 불편한 근황을 이렇게 주절주절 읊어댔었다. "그날 새벽에 아무래도 내가 뭣에 덮어씌웠지 싶은 생각만 드는게 그때 일만 떠오르면 소름이 쪽쪽 끼쳐. 너희들보다야 세상 더 산 내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어야지, 그게 대체 무슨 한심스런 짓이었는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드는구나. 게다가 네놈들까지도 발길을 뚝 끊어 버리니 모든 게 다 내 잘못 같기만 하고...... 이 더러운 물장사 잘못해서 정말 착한 놈 하나 잡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 요즘 사는 게. 오늘도 비가 추적추적 오니까 또 그놈 생각이 나더구나. 비를 쫄랑 맞고 들어와서 금방이라도 <누님 술 한병 줘요 !> 할 것 같은 거야. 게다가 어떤 놈들이 술 처먹다가 그놈의'쩔레꽃'만 부르면 아주 몸서리가 쳐지는 게 소름이 쪽쪽 끼쳐. 도대체 이게 무슨 업인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그날 그녀가 전화에다 대고 <그놈의 쩔게꽃>이라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하마터면 입밖으로 탄성을 토해 낼 뻔했다. 아아, 그놈의 '찔레꽃'.그놈의 '찔레꽃'때문에 결국은 모든 게 이 지경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게 아니었던가.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아니 네놈들?......" 인사동에서 광화문까지, 그 썰렁하게 인적이 끊어져 가는 자정 무렵의 인도를 따라 묵묵히 걸어올라간 이욱과 내가, 이윽고 <카페 문화통신>의 철대문 앞에 당도했을 때, 때마침 빈 안주 접시를 들고 문지방을 내려서던 주인여자가 밖에 선 우리를 발견하고 대뜸 내뱉은 그 첫마디가 그랬다. 원래가 커다란 두 눈을 더욱 휘둥그렇게 치뜨면서, 요컨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빠져나온 <호도껍질 속> - 그 협소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그렇게 불렀는데, 거기가 바로 단칸방으로 쓰이던 곳을 개조한 유일한 카페의 공간이었다一으로 고개를 돌려 그곳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이 밖으로 나와 대문 앞에 서 있는 우리를 이끌고 저만치 골목 어귀 쪽으로 황망스럽게 앞장서 걸어나갔다. 갑작스럽게, 뭔가가, 대단히 심상찮은 쪽으로 휩쓸려가는 것 같았다. "아니 왜 그래요,누님?" 골목 어귀에 이르렀을 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왜 하필이면 이런 날 오냐?"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고 그녀는 입을 열었는데 그 입에서 물큰한 술냄새 가 풍겨져나왔다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저희들이 와서는 안 될?" 그녀의 안색을 보며 내가 물었다. "지금 저 안에 누가 있는 줄 알아?" 알고 나면 기겁을 하리란 표정으로 그녀는 말에 뜸을 들였다. "뭐, 대통령이라도 와 있습니까?"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들어앉아 있길래 이토록 오랜만에 찾아온 우리에게 턱없이 겁을 주는 거냐?一 이욱의 표정은 그랬다. "수인이가 와 있어" 이윽고 그녀는 아주 짧게, 무엇 때문에 자신이 우리를 이끌고 예까지 피해 왔는지, 그 이유를 사람 이름 하나 대주는 것으로 간단하게 대신했다. "뭐라구요?" 이욱이 터무니없이 커다랗게 소릴 질렀다. "아 ......"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머리 속이 패앵 도는 게 아무래도 술이 거꾸로 흘러다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갑작스럽게 눈앞이 아찔했던 것이다. 이 수인(李修仁).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그녀란 말인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오늘, 그녀가 저 협소한 <호도껍질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단 말인가. 이욱과 나는 갑작스럽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와말로 마주치제 되는 그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죄책감을 더욱 뼈저리게 만들고, 또한 세상살이에 무지망작(無知忘作)했던 우리들의 과오를 얼마든지 잔인하게 단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현제로선 모든 기득권이 그녀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이욱과 나에게 있어 <이수인>이란 이름 석 자는 끝이 잘 별러진 섬뜩한 끌과 같은 실체의 대명(代名)으로밖에는 달리 더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요컨대 그녀와 우리가 마주치제 된다는 것 一 그것은 명문화된 법과 가시화된 죄의 대좌(對坐)보다도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도의적인 신경전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할래 ?" 상당히 긴장된 눈빛으로 주인여자가 물었다. 그러나 마음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궤궤해져 있던 우리로서는 선택을 강요하는 듯한 그녀의 물음에 선뜻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옆에 섰던 이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꺼낸 뒤에도 잠시 뜸을 들였다. "어차피 한 번은 마주쳐야 될 거 아닙니까? 끝끝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오늘 같은 날 조용히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얘길 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면 ! - 요컨대 이욱의 얘기는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충돌을 불사할 각오를 이미 했는지, 그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내밀한 결의 같은 게 느껴졌다. "넌 ?" 주인여자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죠 뭐" 이욱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이었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결정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들어가자. 나도 사실 오늘 수인이를 처음 봤을 땐 아주 난감했는데, 술 몇 잔 같이 나누어 마시고 있다 보니 그런대로 또 괜찮은 것 같더라. 수인이가 워낙 말이 없는 애라서 그게 좀 찜찜하긴 하지만 뭐 별일이야 있겠니 ? 저 안에 아직도 너댓 명 더 앉아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들어가자" 그녀가 말을 마치고 앞장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어떤 뒤늦은 깨달음 하나에 사로잡혀 아하, 탄성을 내지르며 손바닥으로 가볍게 이마를 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동정범 세 명이 고스란히 다시 모여 자정이 가까워진 골목길로 허둥지둥 휩쓸려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야습(夜襲) - 으스스 어깨까지 움츠러드는 걸로 보아 기온이 빙점을 향해 빠르게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정이 가까워진 그 늦은 시각에, 이수인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는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호도껍질 속>, 그 비좁은 공간에는 그녀말고도 네 명의 지면(知面)들이 자기네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앉아 있는 각(角)진 구석자리를 향해 한결같이 등을 보인 자세여서, 그녀는 마치 그들로부터 아주 무시를 당하고 있거나 그녀스 스스로가 그들을 무시하고 있는 듯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벽에다 머리를 기대고 았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빈 소주병 하나와 새로운 소주병 하나가 반쯤 비워진 채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당근과 오이가 몇 조각씩 담긴 안주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녀의 앞쪽에 등을 보이고 빙 둘러앉은 사내들은 어처구니없게도 그 야심한 밤에 장기를 두면서 모두들 깊은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이리 앉아.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지들 말고" 주인여자가 우리와 이수인 쪽을 번갈아보며 어색한 공백을 메꾸기 위해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독스러우리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볼 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긍정하거나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앉아도 된다는 것인지, 앉으면 결코 안 된다는 것인지, 도대체가 그 얼굴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판단 여지도 드러내 보이질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앉자" 턱없이 멀뚱거리고 서 있기가 뭣했던지 이욱이 내 팔을 툭 치고나서 자신이 먼저 그녀 앞쪽의 긴 장의자에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 뒤를 이어 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오랜만에 보겠시다" 장기판을 들여다보며 행마(行馬)에만 골몰하고 있던 안면 하나가 그제서야 우리를 향해 아는 체를 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나와 이욱이 고개를 돌려 아는 체를 하자 그제서야 안면박대한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나머지 셋도 일제히 고개를 들고 인사를 건네왔다.광화문통에 있는 대기업의 홍보실에 근무하는 지면들이었다. <문통>에 관한 한 그들도 우리처럼 꽤나 뿌리가 깊은 터줏대감들이었지만,그들은 우리보다 세상을 삼사 년씩은 더 살은 삼십대 후반의 인물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이욱과 나를 알아보듯이 이수인을 몰라볼 까닭이 없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우리가 처음 이곳 문지방을 넘어섰을 때 一 물론 그 이전부터 그랬을 것이 틀림없겠지만一 전혀모르는 사람들처럼 이수인 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짐작컨대 합석을 하고 한 데 어울려 마시길 그들 쪽에서는 원했을 터이나,이수인이 그걸 무표정하게 거절했을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녀는 원래부터가 그렇게 찬바람이 쌩쌩 부는 여자였다. 그리고 단지 그것 한 가지만으로 그녀는,그녀가 <문통>에 발을 들여놓던 저 80년대 벽두의 그때부터 이곳에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됐었다. 그 80년대 벽두에 벌써 나이 갓서른에 이르러 있던 그녀의 특징은,냉소적인 대인관계 이외에도 꽤 많은 것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허리까거 이르는 긴 생머리와 커다란 가죽 숄더백, 그리고 멋들어진 끽연 자세와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으면서도 항상 촉촉하게 젖어있는 듯한 얼굴, 여름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 내내 바짝 마른 몸에다 헐렁하게 걸치고 다니던 검은 바바리 .......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여자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건 그녀의 출현이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이 더 지난 뒤였다. 물론 그녀는 세상을 아주 쉽게 살고 싶어하지도, 또한 아주 편하게 살고 싶어하지도 않는 그런 주관적인 삶의 소유자임이 분명해 보였다. 가끔씩 나타나서 소주잔을 앞에 놓고 멋들어지게 담배를 피워대며 미술에 관계된 잡지를 뒤적이거나 혹은 어떤 유명화가의 화집을 무표정하게 넘겨대던 그 모습에서는, 흔히 사람들이 자기 삶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데서 생겨나는 힘 一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혼히 <열정>이라고 부르는 과장된 자기과시 에너지가 분명할터이다 - 이 전적으로 배제된 데서 우러난 듯한 묘한 여백의 멋 같은 게 어른거려서 뭇사내들의 술기운을 쓸데없는 열정 - 여자에게 잘보이고 싶어하는 바로 그 부질없는 자기과시 에너지말이다--으로 달뜨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내들에 관해서는 극단적인 결벽증을 가진 여자처럼 매번 단호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것이 또한 그녀의 매력으로 둔갑해서 몇몇 얼빠진 인간들이 꽤나 그녀를 귀찮게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세월이 터무니없이 흘러 버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도 어느덧 <옛날>이 되어 있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녀는 어느덧 나이 마흔이 코밑에까지 밀려온 꺼칠한 여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표정 없는 얼굴로 소주잔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는 가름질한 머리카락들이 앞으로 휘몰려들어 반 이상 가려진 얼굴을 갑작스럽게 쳐들어 뒤로 세차게 젖히면서 아주 잠깐 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쳐다보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기 위해 그런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쨌거나 그녀는 아주 잠깐 동안 나를 그렇게 쳐다보았을 뿐, 그동안 잘 지냈냐는 나의 물음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도 하질 않았다. 다만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올려 빠르게 비워냈을 뿐, 그녀는 더이상 우리 중의 어느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누님, 소주 좀 줘요" 묵수(墨守)하는 듯한 이수인의 태도로 보아 일이 순조롭게 풀리긴 애초부터 글렀다는 생각을 했는지, 이욱이 느닷없이 커다란 목소리로 바깥쪽에 서 있는 주인여자에게 술을 시켰다. 소주 두 병이 마른 안주와 함께 주전자 가득 담겨 나올 때까지도 이욱과 나는 그녀와 아무런 얘길 나누지 못했다. 그 사이 그녀는 자작(自酌)한 소주를 다시 한 잔 비워냈을 뿐, 자신의 굳은 표정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씩 자정이 지난 골목길을 서둘러 빠져나가는 취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얼핏얼핏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내뱉는 쥐어짜는 듯한 욕지거리가 안으로 밀려들었을 뿐, 사방은 조용했다. 뒷좌석에 앉은 사내들도 거의 입을 열지 않은 채 장기판에만 골몰해 있어서 그 비좁은 실내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적연하기만 했다. 깊고 무거운 정적을 견뎌내지 못한 채, 이욱과 나는 한동안 서로의 잔에다 술을 따르고 그것을 비워내는 일만 계속해 나갔다. 흥이 있을수 없는 술자리에서, 얼핏 생각하면 술 마시는 그짓 이외에 할 수 있을만한 일이 달리 더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만, 그럴 때처럼 술 마시는 일이 힘겹게 느껴지는 때도 세상살이에서는 그리 흔치 않을 터였다. 주인여자도 달리 더는 할 일이 없는지 우리 곁에 자릴 잡고 았아 아주 가끔 반 잔씩 잔을 비워냈을 뿐, 더이상은 이수인과 우리를 위해 아무런 중재의 제스처도 지어보이질 않았다. 그런 의도적인 짓거리야말로 이런 괴괴한 분위기에서는 이를 데 없이 어색하고 면괴스러운 가식의 일종으로 전락하고 말리란 생각을 그녀도 또한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용회선배한테선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까?" 이윽고 이욱이 고개를 곧게 쳐들고 그녀를 정면으로 건너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제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것 같았고, 그 취기에 힘입어 그녀와 어떤 종류의 얘기든 얘길 하고 싶어하는 눈치 였다. 사실 우리가 이수인이란 껄끄러운 존재가 죽치고 있는 <호도껍질 속>으로 과감하게 머리를 들이밀 용기를 추스를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술에 대한 버리지 못할 의타심 때문이었다고나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각심한 문제도 취하고 나면 말짱 무득무실(無得無失)하게 여겨져서, 숨통을 콱콱 질리게 하던 인간들의 소갈머리가 만판 대범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 一 적어도 술에 관한 한 이욱과 내가 그런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욱의 질문에도 그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고 그 연기를 적당히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는 일 이외에 그녀가 달리 나타낸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용회선배의 무소식을 안타까워하는 우리 모두의 절박한 심정을 그녀는 단지 묵살하는 태도 그 하나만으로 아주 잔인하게 즐기고 있는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그녀 자신도 또한 그런 절박한 심정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끝끝내 드러내보이지 않으려는 데서 오는 전도된 오기 一그걸 고수하려 하는지도 또한 모를 일이었다. 아아, 그녀야말로 그 청승맞은 노래'찔레꽃'을 얼마나 좋아했던 여자인가 ! 그놈의 '찔레꽃' 때문에 결국은 모든 게 이 지경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게 아니었던가 말이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이 저릿해지고, 들으면 들을수록 사는 일의 곤비(困憊)를 곱씹게 만드는 그 청승맞고 서러운 노래 -'찔레꽃'과 함께 나타났다가 그것과 함께 사라지곤 하는 희대의 방랑자가 있었다. 평생을 오로지 방랑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이 강산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찔레꽃'을 부르고,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또다시 종적을 감추어 버리는 인물. 그를 아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향이 어디인지,나이가 몇인지, 학력은 어떻고, 가족사항은 어떤지 ...... 그런 기초적인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방랑벽과'찔레꽃'이외에, 그에 대해 달리 더 무엇이 확인되어졌던가. 어떤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예전의 어느 한때 출가한 승려로 세상을 떠돌았다고 하기도 하고, 또다른 어떤 사람은 난세의 어느 시절엔가 그가 시를 쓰는 시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고도 하고, 그런가 하면 저 암울했던 독재정권의 어느 시절엔가 그가 알 만한 곳으로 끌려가 근 한 달 동안이나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었다고 덧없이 씁쓰레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었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되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게 풍설처럼 떠돌았고, 그는 그 풍설 속에서 살아가는 신비로운 인물처럼 여러 사람들의 인구에 끝없o] 회자될 뿐이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지용회(池龍回)였다. 그가 <문통>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게 아마도 80년 그해 가을의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민주의 봄>을 열망하던 무수한 사람들의 기대감이 고스란히 추풍낙엽이 되어 떨어져내리던 그 가을의 어느날, 어떤 강렬한 인상을 지닌 풍각쟁이처럼 그가 느닷없이 이욱과 내앞에 생면부지의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낮술이 벌겋게 취한 얼굴로 실성한 사람처럼 히쭉히쭉 웃으며, 그 낯선 모습을 최초로 드러내던 그날,<문통>의 문지방을 넘어서면서 그가 최초로 부르던 그 노래 一그게 바로 '찔레꽃'이었다. 그리하여 그와 조우하던 그 첫순간부터 이욱과 나는 그의 강렬한 인상에 단단히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낡고 헐렁해 보이는 검정색 양복에 검은 베레모와 검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런저런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 당시에도 여전히 세상물정에 눈 어둡던 우리들에게, <아아, 저 인물이야말로 이 말라 비틀어진 시대를 파격적으로 살아감으로써 어떤 초탈의 경지에 이른 희귀한 방약무인(傍若無人)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오랫동안 떨쳐 버릴 수 없게 했던 것이다. 그 무렵은 그런 시절이었다. 그 어느 곳으로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차단된 현실, 그 막막한 의식의 폐쇄감 때문에 걷잡을수 없이 주리가 뒤틀리던 시절--- 그럴 때 그런 희귀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는 게 좁은 의미에서는 일종의 정서적 해방, 곧 카타르시스가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우리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부르던 '찔레꽃'이야말로 그런 기대감을 한껏 부풀리게 하는데 있어 중요한 징후로 작용을 했다. <문통>에 발을 들여놓던 그 첫날부터 그는 그 노래를 여러번 되풀이해서 불러야 했는데, 그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게 된 필연적인 곡절이 아마도 그 노래의 전체적인 정조(情操)가 그의 삶 속에 그대로 용해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는 어줍잖은 생각을 그날 나는 이미 하고 있었다. 결국 그의 노래는 그날 이후부터 <문통>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대화를 중단시켰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여러번의 재창을 간곡하게 원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찔레꽃'이야말로 오랫동안 억압되어온 현실에 대한 포한, 그 비통의 극치를 맛보게 하는 몸서리 쳐지는 비가(悲歌)였던 것이다. 그와 우리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날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검정 일색의 차림으로 그는 이욱과 내가 무시로 드나들던 <문통>에 자주 나타나 우리와 같이 술을 마시곤 했다. 그렇게 만남이 더해져 가면서 우리는 그의 마음이 유리처럼 투명하면서 여리고,또한 세상 사는 방식에는 털끝만큼도 길들여지지 못한 인물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우쳐 나가기 시작했다. 집도 절도 없이 끝없이 부유하면서 살아가는 부평초 같은 삶의 소유자. 물론 그는 항상 무일푼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서는 비난과 질시의 눈총을 따갑게 받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이욱과 내가 술값을 지불하고 난뒤에도 여러번 차비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가 하면 잠을 재워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그에게 돌아가야 할 집이 없다는 것과 먹고 사는일 자체가 오로지 그런 식의 몸에 배인 손벌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 또한 우리는 그 무렵에야 비로소 께우칠 수 있었다.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라는 인물 자체가 도통 그런 상식선의 발상을 고스란히 무색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발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세상을 언게까지 이런 식으로 살 거요?" 그 무렵의 어느날 밤, 기어이는 내가 그에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그가 또다시 손을 벌린 때문이었다.이런 젠장,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지 ! - 술김에 아마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의 그 한마디 말에 그는 그만 기겁을 한 표정으로 내 손을 덥썩 잡고는 어쩔 줄을 모른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다신 안 그럴께, 응? 정말 미안해" 그러다가 이내 내 손을 놓고 그는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황망스럽게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그 밤을 끝으로 꼬박 일 년 동안 그는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도대체 그가 그날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갑작스럽게 겁먹은 표정이 되어 버렸는지 나로서는 그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뒤에 이욱이 어디선가 전해 들은 얘기를 내게 다시 되새김질해주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가 내게 전해 준 얘기란 것도 <일설에 의하면>으로 시작된 것이어서 그 정확한 사실 여부는 끝끝내 확인을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70년대의 어느 한때 불순분자로 지목이 돼서 연행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모질게 고문을 당했었다고 하더구만. 그러니까 그때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누가 자신에게 언성만 높이면 갑작스럽게 사색이 돼서 안절부절을 못한다는 거야. 실제로 그는 길을 가다가도 경찰 제복만 눈에 띄면 뒷골목이건 어디건 죽어라고 도망을 친다더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욱은 그날 아주 눅눅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는데, 그로부터 며칠뒤에 그는 내게 이런 얘길 다시 건넸다. 그게 바로 인간 지용회에 대한 자신의 견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그는 아무래도 지용회라는 인물이 한때 시를 썼었다는 일설을 사실로 믿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여진 우리가 보균자라면 그는 희귀한 무균자(無菌者)인 셈이지. 그가 현실로 돌아와 안주하면 이 세상에 미만해있는 박테리아 때문에 그는 죽게 될는지도 몰라. 그는 세상을 초탈한 인물이 아니고 세상을 공포스러워하는 인물이 분명할 거야. 그가 한때 고문을 너무 당해서 피해망상증이 생겨났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지만, 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렇게 때묻지 않은 영혼을 이제 세상 사람들은 아주 도외시하거나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이 돼 버렸다는 게 보다 심각한 문제지. 이건 내 생각이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이 그를 욕하고 무시하고 혹은 박절하게 대할지라도, 적어도 우리만은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자. 정말이지 그는 영혼이 아이 같은 사람이고,그 존재 자체로 이미 시인이 되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니까......" 그로부터 일 년쯤 지난 뒤에 <그 존재 자체로 이미 시인이 되어있는지도 모를 사람>은 목발을 짚고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한쪽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술을 마시고 교통사고를 당했노라 멋적게 얘기하면서, 그는 또다시 '찔레꽃'을 들려주기 위해 우리 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그는 우리와 같이 어울려 많은 시간을 보냈다.그러던 어느날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그는 또다시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어느날 그는 또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한동안이 지난 뒤에는 예외없이 또다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끝없는 머물기와 떠나기 一떠나기 위해 머무는 것인지 머물기위해 떠나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출몰이 끝없이 반복되곤 했던 것이다. "오늘도 비가 추적추적 오니까 또 그놈 생각이 나더구나. 비를 쫄랑 맞고 들어와서 금방이라도 <누님 술 한 병 줘요> 할 것 같은 거야......" 지난 여름 어느날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문통> 주인여자가 입에 담던 <그놈>도 바로 그였다. 그 주인여자를 위시하여 이욱과 나에게 참으로 견뎌내기 힘든 공범의 멍에를 뒤집어씌워 놓고 갑작스럽게 사라진 존재, 도대체 지금 이 차가운 겨울 날씨에 어느 강산을 끝없이 헤매고 있을지, 생각날 때마다 무거운 죄책감과 견딜 수 없는 연민으로 눈물겹게 만드는 존재. 아아, 돌아오지 않는 시인이여, 우리들의 '찔레꽃'시인이여 ....... "좋습니다. 정 그렇게 우리가 못마땅하게 여겨진다면 일방적으로라도 우리가 해야 할 얘기를 하겠습니다. 용회선배가 사라지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물론 우리 때문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우리가 얼마 만큼 괴롭게 지내왔느냐 하는 얘기도 하질 않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문제를 이렇듯 피곤한 감정 대립으로 몰고 가는 게 과연 바람직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용회선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우리가 가능한 한 마음을 모아서 그가 돌아을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야 할 이때에, 우리가 우리의 과오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데, 과연 이런 식으로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도저히 더이상은 못 참겠단 표정으로 이욱이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였을 때, 여자는 어느덧 세병째의 소주를 자작으로 비워 나가고 있었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간여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자세는 꼿꼿했고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두 눈이 약간 충혈된 것 같았지만, 그 눈빛만은 변함없이 깊고 드넓게 가라앉아 있어서 오히려 어떤 각성된 의식의 저변을 감지케 했다. "내가 당신에게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여자가 최초로 내뱉은 그 싸늘한 한마디의 말이 실내의 공기를 갑작스럽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우리는 물론, 내기장기를 끝마치고 패배를 흔쾌히 자인한 사람이 낸 열 병의 맥주를 마시고 있던 네 명의 지면들까지도 갑작스럽게 대화를 중단해 버렸다. <문통>의 터줏대감들인 그들이 지금 우리와 여자 사이에서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전모를 모르고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여자의 말에 경악한 사람은 바로 이욱 자신이었다. 여자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 - 아마도 그 싸늘한 한마디의 말 때문에 그는 질겁을 했을 게 뻔했다. 한때나마 <형수님>,<이욱 씨> 운운하면서 친밀하게 지냈던 그 모든 관계를 한 순간에 말끔하게 척제(滌除)해 버리는 듯한 그 분명한 격리 의지 一 이욱의 입장에서야 <당신>이란 그 말을 그렇게 말고 달리 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랴. 그토록 콧대 세던 이수인이란 여자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들의 <형수님>으로 둔갑하게 된 건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도 몇 달이 더 지나고난 지난 겨울의 어느날이었다. 또다시 사라져서 한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용회선배가,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이수인이란 여자를 대동하고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문통>의 문지방을 넘어섰던 것이다. 의아한 눈빛으로 그 두 사람을 쳐다보는 뭇사람들에게, 그때 그가 내뱉은 첫마디 - 게 <우리 같이 산다>였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싶어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치떴지만 웬걸, 이수인의 표정은 그걸 전적으로 긍정하다 못해 어울리지 않게도 다소곳하게 머리까지 숙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정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야아一 지용회 씨 기술 끝내준다이" "물건이 왔단가?"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그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언성을 높였지만, 그러나 정작 그 당사자인 용회선배는 눈도 깜짝하지 않으면서 연신 싱글벙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그 표정과 몸짓이 <애들은 저리 가라>였다. 자신도 자신의 현실이 대견하고 신기하고 또한 믿어지지 않는지, 그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연신 우쭐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 두 사람의 동거를 가리켜 <문통>의 단골들은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한결같이 침을 튀겼다. 어째서 이수인이란 콧대 높은 여자가 하고많은 사내들 중에 하필이면 지용회를 선택했을까? - 요컨대 그게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었다. 막말로 집도 절도 없이, 가진 것이라곤 오로지 부랄 두 쪽밖에 없는 유걸(流乞) 같은 인물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서방으로 맞아들였겠느냐, 그게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의구심이 그릇된 건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그 불가사의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의 내부에 끈질기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현실>과 <상식> 때문이라는 것, 적어도 그것에 의해 본질적인 판단이 전면적으로 방해를 받고 있다는 걸 그들 스스로가 깨우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 사는 일에만 충실하게 사로잡혀 있거나 혹은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동거에 대한 이욱의 판단은 상당한 설득력을지니고 있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그들의 결합이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런 삶의 귀결, 요컨대 남자에 대한 극단적인 결벽증으로 자신을 폐쇄시켜온 이수인이 어느날 갑자기 지용회라는 인물의 때묻지 않은 영혼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으리라는 것이었다.그의 영혼이야말로 보균자들로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무균자였기 때문에, 단순하게 한 남자로서가 아니라 영혼이 때묻지 않은 한 인간으로서 그녀는 그와의 동반을 결심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럴 듯한 견해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문통>을 들락거리면서도 이수인은 지용회라는 인간의 내면적 실체를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근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인간이 지니고 있는 무구한 영혼을 발견하게 된 거라는 얘기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런 것 같았다.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대망의 새해가 밝았다고 매스컴이 연일 떠들어대면서 <디데이>를 역산(逆算)해 나가던 작년봄부터 지용회를 대하는 이수인의 태도는 사뭇 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변모를 우리는 그저 지용회라는 인물에 대한 순간적인 호기심이나 동정심 같은 게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으로 간과해 버리고 말았지, 이렇게 동반자로까지 발전하게 되리라고는 정말이지 꿈에서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봄의 어느날 <문통>에서 지용회 선배가 부르던 '찔레꽃'을 들으며 그녀가 눈물을 흘리던 그 색다른 장면을, 그러니까 우리는 좀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동거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참으로 잘된 일로 받아들였다. 평생 역마살에 시달리다가 객사나 하게 될 인물이라고 생각해 오던 한 기인(寄人)의 정착을 어찌 그릇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겠는가. 그 자신도 난생 처음 맛보게 된 여자와의 동반생활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런 그를 보살피는 이수인의 정성 또한 주변 사람들을 감복하게 만들 정도였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보살펴 주듯, 그녀는 그렇게 용회선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펴 주었고, 당사자 또한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보살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무렵에 그가 부르던 '찔레꽃'을 들으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하얗게 난개한 찔레꽃, 그 눈가루 같은 꽃잎의 실체가 난분분하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걸 목도할 수 있었다.그제서야 우리는 그 이전까지 그가 그토록 무수하게 불러온 '찔레꽃',그게 꽃에 관한 노래가 아니라 한에 관한 덧없는 청승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찔레꽃'이 다만 꽃으로 환원하는데 걸린 세월이 그토록 장구했었으리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외로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어느 하루도 편하게 살아오지 못한 처지입니다. 물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되긴 했지만...... 아시다시피 우리의 애초 의도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거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런 악의도 없이 시도된 단순한 일이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었겠습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요컨대 우리를 그토록 극단적으로 미워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연 이 모든 게 다 그릇된 정치, 뒤틀린 현실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니겠습니까? 부탁컨대 제발 생각을 좀더 넓게 가져주십시오. 우리도...... 우리도 아주 비참한 기분입니다" 이욱은 이제 이수인을 향해 읍소하듯이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정치 ?" 이욱이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가 대뜸 두 눈을 치떴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얄팍한 짓거리가 아니냐는 듯, 그 눈빛이 사뭇 날카로웠다. "적어도 넓게 보면 그렇다는 뜻이고, 좁게는 서로가 서로를 미워해야 할 때가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죠" 이욱이 다시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다시 소주잔을 들어올려 순식간에 잔을 비워 버렸다. 그 표정이 말이 아니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는 이욱을 건너다보다가 그녀는 문득 무엇인가를 생각해낸 사람처럼 자신의 가죽 가방을 열고 그곳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한 부의 신문을 꺼내들었다. 아, 그녀가 그 신문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 문익환목사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선고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문통>으로 와서 우리와 맞닥뜨릴 게 뭔가> 라고 찜찜해 했던 최초의 생각을 갑작스럽게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이욱과 내가 바로 그 기사 때문에 그토록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듯, 그녀 또한 그 기사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문통>을 찾아온 게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 기사와'찔레꽃'시인, '찔레꽃'시인과 그 기사 사이에 내재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또다시 곱씹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래서 그 일과 관계 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문통>으로 모여들게 된 게 틀림없어 보였던 것이다. 찔레꽃이 난개하던 지난 5월, 그 쩔레꽃만큼이나 다정다감하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던 한 행복한 가정에 느닷없이 휘몰려온 돌풍. 한 노목사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온 나라가 벌집을 들쑤셔놓은 것처럼 들썩거리던 그 5월에, 도대체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불상사가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일까. 이수인과 지용회 선배가 둥지를 치고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던 그 보금자리로, 친분 있는 몇몇 사람들이 몰려가 겸사겸사 하룻밤 재미있게 놀아보자고 약속했던 날이 바로 그날이었을 것이다. <문통>에 모두 모여서 같이 가기로 사전에 뜻을 모아두었던 그날, 공교롭게도 이욱과 나는 약속 시간이 두어 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비로소 <문통>에 당도할 수 있었다. 밤 8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어이없게도 10시가 지나서 당도했으니 먼저 온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리 만무했다. "용회가 먼저 온 사람들 데리고 갔어. 니들 오연 예서 술 마시고 있으라고 하더구만. 지가 다시 연락한다나 어쩐다나" 이상스럽게도 손님이 하나도 없던 그날밤, <문통> 주인여자는 뒤늦게 나타난 우리들에게 그렇게 시큰둥하게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자신이 초대되지 못한 걸 그녀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몇 명이나 갔어요?"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아쉽다는 표정으로 이욱이 물었다. "뭐 몇이나 되겠냐? 알 만한 떨거지들 넷이 같이 갔지" 결국 용회선배가 다시 연락할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는 얘기 때문에 우리는 퍼질러 앉아서 할 수 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통> 주인여자와 우리가 함께 술을 마시며 기다린 시간이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겨 버렀고, 그리고 오래잖아 새벽 한 시를 향해 숨가쁜 질주를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저런 세상 얘기 나누며 마신 술이 어느덧 평소의 주량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연락을 하겠다던 용회선배로부터는 한심스럽게도 전화 한 통도 걸려오질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 곳에 퍼질러 앉으면 도통 끝장을 보고야마는 그 어쩔 수 없는 기질로 미루어보아, 연락이 오긴 아예 글러버린 터수라고 투덜거리면서 세 사람은 더욱 빠르게 술잔을 돌려나갔다. 그러다가 새벽 한시 반쯤이 되었을 때, 주인여자가 문득 자신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후려치면서 이런 말을 폭죽처럼 터뜨렸다. "이런 정신 좀 봐! 용회가 지난번에 지네집 전화번호 알려 준 게 있었지, 참!" 한 정신 나갔다가 비로소 되돌아온 사람처럼 그녀는 황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번호 기록부를 찾으러 나갔다. "일부러 안 알려준 거 아뇨, 누님 ?" 내가 능청을 떨자 어느새 전화번호부를 찾아들고 자리로 돌아오던 주인여자가 이렇게 눈을 부라렸다. "이 짜석들이 사람을 뭘루 보는 기야, 엉?" 그녀는 많이 취해 있었다. 그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많이 취해 있었다. 어쩌면 그 취기 때문에 우리가 용회선배의 전화번호를 보면서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해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 가만 있어 봐. 연락도 안 하고 도대체가 괘씸한데 우리 이 사람들 골탕이나 한번 먹여 주자. 어때?" 이욱이 눈을 번뜩이며 알 만한 제의를 했고 주인여자와 나는 그 제의에 대해 어떤 종류의 거부도 없이 대뜸 응해 버리고 말았다. 이욱의 머리 속에 이미 그 <골탕작전>에 관한 시나리오가 전광 석화처럼 빠르게 완성되어져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주인여자와 나는 무턱대고 그의 제안에 동조를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흥미진진한 모사로 인해 우리 모두는 전혀 새로운 기대감으로 조금씩 기분들이 들떠가기 시작했다. "네가 전화를 걸어서 목소리를 팍 죽이고 이렇게 말해. 아, 여기 치안본부 대공분실인데, 거기 지용회라는 사람 있지? 하면서 아주 반말지거리로 나가버리라구. 그리고 있다고 하거든 말야......" 이욱의 시나리오는 참으로 시의 적절한 구석이 있었다. 한 노목사의 밀입북 사건으로 세상이 온통 뒤숭숭하던 때에 그런 시나리오를 짜냈으니, 그게 어찌 씨알이 안 먹힐 수 있었겠는가. 지용회라는 인물이 지독스럽게도 겁이 많은 인물이라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그 시나리오야말로 있는 그대로가 섬ㅉ한 골탕이 되기에 조금도 부족한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낄낄거리는 가운데, 드디어는 내가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 거기 지용회 씨 댁이죠?"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나의 목소리는 아주 다른 샤람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녜, 그렇습니다만......" 수화기를 집어든 사람은 그 집 방문객 중의 하나였다. 아마도 그가 전화기 가까운 곳에 앉아 있다가 수화기를 집어든 모양이었다. "지용회 씨 지금 집에 있죠?" "예, 있습니다" "아, 여기 치안본부 대공분실인데, 그 사람 좀 바꿔 주쇼" 나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또박또박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러는 나를보고 이욱과 주인여자는 내 옆에서 그야알로 배꼽을 움켜쥐고 포복절도를 하고 있었다. "실례지만 무슨 일입니까?" 전화를 받은 인물이 사뭇 놀라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야심한 밤에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니 ! -- 놀라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잘못된 일일 것이었다. "잔말 말고 바꿔 !"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쐐기를 박아버렸다. 그러자 수화기 저쪽에서 "지용회 씨,치안본부 대공분실이래. 바꾸라는데?", "날? 왜?", "모르겠어" 어쩌고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 이윽고 겁먹은 듯한 용회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지용회야?" "예. 제가...... 그런데요" "아, 여기 치안본부 대공분실인데, 당신 이욱이라는 시인 알지?" "이욱이요?" "그래, 시 쓰는 이욱이라는 인물 말야. 알지 !" "그 사람...... 잘 모르겠는데요" "잘 몰라? 지금 누구 놀리는 거야? 우리 정보망에 이미 당신네들 관계가 낱낱이 체크돼 있어. 거짓말할 생각 아예 버려! 알아 몰라?" "몇 번 술을 같이 마셨지만...... 잘 몰라요" "어쨌든 알지?" "예 ......" "좋아. 그 이욱이란 친구가 밀입북을 해서 지금 북한엘 가 있는데,당신 지금 곧바로 와서 수사를 좀 받아야겠어. 그러니까 꼼짝하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 알았어?" "......" "알았냐구 ! " "예 ......" 그러고 나서 나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참으로 기가 막힌 각본이었다. 통화를 하는 도중에 꾹꾹 눌러 참았던 웃음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나도 또한 옆에 있던 두 사람들처럼 배꼽을 움켜잡고 눈물이 날 지경으로 웃어제꼈다. "지금쯤 그 집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하이고,하이고 배야, 아하, 아하하하...... 아유 눈물이 다 나오네 ......" 주인여자가 탁자를 두들기며 자지러졌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 겁많은 용회선배가 어쩔 줄 모른 채 벌벌 떨고 있을 생각을 하니 정말이지 눈물이 찔끔거릴 지경이었다. "야, 전화 다시 한번 걸어 ! 곧 연행하러 갈 테니 튈 생각 말라고" 한참을 웃어대던 이욱이 내게 다시 주문을 했다. 대본에 없던 내용을 한 가지 더 첨가하자는 제안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내가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용회선배의 목소리는 이미 정상이 아닌것 같았다. "당신 지금 어디로 튈 생각 하고 있지 ? 우리 요원들이 이미 출발했으니까 잠시 뒤면 당신 집에 도착할 거야. 괜히 튀튀다가 잡히면 재미없어 ! 그러니 꼼짝 말고 집에서 기다려. 속옷과 양말 같은 것도 챙겨두고. 알았어 ?" 그러고 나서 나는 가차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아 버렸다. 아아, 그리하여 그날밤 그 <문통>에서 우리는 얼마나 통쾌하게 웃고 또 웃고, 그러면서 자지러졌던가. 세상 살면서 그렇게 지독스럽게 웃어본 건 정말이지 머리에 털 난 이후 처음이었다. 그 전화를 받고 나서 지용회선배가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달랑들고 그 야심한 밤에 미친 듯이 집을 뛰쳐나갔다는 걸 우리가 어찌 상상이나 했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집을 뛰쳐나간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리라고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었겠는가. 방북했던 목사도 돌아오고, 국회의원도, 대학생도 다 돌아왔는데,그만이 유독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리라고 도대체 우리 중의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었겠는가 말이다. 폭양의 계절이 가고 조락의 날들이 덧없이 흘러갔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덧 칼바람이 세상을 휩쓸고 휘몰려다니는 겨울이 시작되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은 죄 때문에 발 뻗고 맘 편히 잠들 수 없는 공범들의 나날은 끔찍스런 고통으로 피멍이 들어갔다. 지은 죄도 없이 머나 먼 이방을 정처없이 떠돌며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을 가련한 한 영혼의 부랑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그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뭐가 된단 말인가. 죽고 싶을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들이 정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희들의 잘못을 정치 쪽으로 전가시키려는 게 아니라,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근원적인 이유가 다 그런 데서 파생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때때로 들기도 한다는 것이죠. 설령 저희가 그런 장난 전화질을 했다 할지라도, 단지 그 전화 때문에 용회선배가 그토록 혼비백산해서 집을 뛰쳐나간 이유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저희가 설령은 장난 전화질을 했다고 할지라도, 무엇 때문에 하고많은 거짓말 놔두고 하필이면 방북사건을 빌미로 잡았겠습니까? 그동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억하 심정도 때로는 생기더란 얘기죠. 정말이지 저희들의 심정은 그랬습니다. 그 모든 게 다 그런 전조에 의해 파생된 터무니없는 결과가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 말이죠" 말을 마치고 나서 이욱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신문의 한쪽 귀퉁이가 조금씩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비약하지 마. 정치라구? 그래 그게 어쨌다는 거야? 정치가 용회씨를 도망가게 했다는 거야, 지금?" 여자의 얼굴은 이제 빈틈없이 불콰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눈도 이전보다 훨씬 붉게 충혈돼 있어서 금방이라도 어떤 폭거를 자행할 것같은 숨막히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비약이 아닙니다. 절대로 비약이 아니라구요" 이욱도 상당히 취해 있었다. 취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식의 정면충돌을 자행하려 하지 않을 터인데, 그 자신의 내면에 가득 들어 차있는 어떤 견딜 수 없는 울분 때문에 그는 도저히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비약이 아님 뭐야? 바로 당신들의 그 미친 짓 때문에 난 가정을 잃어버린 몸이야. 알아?" 여자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으며 술잔을 손에 들었다. "그래요, 미친 짓이었죠. 그래 미친 짓이었으니 이제 우리보고 도대체 뭘 어쩌란 말입니까 !" 이욱이 갑자기 벽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아. 그와 거의 동시에 여자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이욱의 면상으로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여자의 몸이 거의 반사적으로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그래 이 개자식아, 네 말마따나 정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치자.용회씨의 정신적인 상처가 고문 때문에 생겨났다고 치자. 그래서 그런 전화 한 통에 놀라서 미친 놈처럼 정신없이 도망가게 되었다 치자구.그러니 어찌란 말야? 그러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구! 정치 때문에 모든 일이 그렇게 됐으니 날더러 도대체 누굴 원망하고 누굴 욕하란말야! 정치가를 욕할까? 미안하지만, 미안하지만 당신네들이나 나나 그런 거창한 인물들과는 무관하게 취급되어질 수밖에 없는 힘 없고 별볼일없는 인간들일 뿐이야. 그러니 내가 누굴 욕해? 미안하지만 힘 없는 내가 욕하고 저주하고 원망하고 또한 증오할 수 있는 유일한대상은 결국 당신네 같은 인간들일 뿐이야. 그런데 뭐라구? 정치? 그걸 모를 인간들이 어딨어? 그러나 알면 뭘해, 알연 뭘 하냐구우 !-- " 마지막은 발악이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는 거의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다가 끝내는 오열을 터뜨리며 탁자 위로 얼굴을 쑤셔박고 말았다. "자, 우리 진정합시다" 장기를 두고 나서 맥주를 마시던 지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옮겨왔다. 나와 이욱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들은 모든 걸 다 알 만하니 참으라는 시늉까지했다. 얼굴에 소주 세례를 받고 멍청하게 서 있던 이욱이 갑자기 무너지듯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여자는 엎드린 채 계속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욱이 표정없는 얼굴로 소주잔을 거푸거푸 비워냈다. 기갈 들린 사람 같았다. "자, 우리 같이 앉아서 한잔 합시다" 네 명의 지면들이 우리를 위로하겠다는 표정으로 자신들의 술을 가져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 누가 애초부터 악감을 가지고 그런 일을 했겠소? 다 어려운 때이니 서로서로 돕고 삽시다. 한잔 해요, 자" 내게 술을 따라주며 한 사람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래요. <찔레꽃> 시인도 조만간 돌아올 겁니다. 그렇게 떠도는게 원래부터 그의 체질이 아니었습니까? 우리 모두 다 그를 위해 건배나 합시다" 또다른 사람이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의 잔에다 술을 따를 때,탁자 위에 엎어져 있던 여자가 갑자기 상체를 세우며 기우뚱 중심을 잃다가 가까스로 벽을 짚었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부축하려 하자 일없단 듯 내 손을 후려치며 그녀는 좌중을 빠져나갔다. 주인여자가 내게 따라나가 보라는 눈짓을 했다. <문통>의 철대문을 간신히 벗어난 여자는 불과 서너 걸음도 옮겨놓질 못한 채 골목 쪽으로 난 <호도껍질 속>의 들창 밑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서너 병의 소주를 혼자 다 비워냈으니 속이 뒤집히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연해 토해대는 걸 보노라니 내 속이 메슥메슥해지면서 욕지기가 치미는 것 같았다. 그녀의 토악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더이상은 올라올 건덕지도 없는데 그녀는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꽥꽥거리며 마른 구역질을 해댔다.이따금씩 토해지는 그 마른 구역질 소리가 신새벽의 냉기를 칼칼하게 뒤흔들 뿐 더 이상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질 않았다. 적연한 세상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푸르고 시려운 빛으로 별들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등을 두드려 드릴까요?" 내가 여자 등 뒤로 바투 다가서며 입을 열었으나 그녀는 필요없단듯 거세게 손을 뒤로 휘저었다. 더 이상은 토해낼 건덕지도 없는데 무엇때문에 저렇듯 쪼그리고 앉아 마른 구역질을 계속해댄단 말인가. 내가 씁쓸한 기분으로 담배를 꺼내물 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음(鼻音)이 분명한 듯한 그 소리는 아주 가늘게 시작되었지만, 곧 이어서는 한 가닥 한 가닥 선율 위에 선율이 더해지듯 그 음역(音域)을 점차로 넓혀 나갔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숨을 죽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이윽고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 낮고 부드러운 선율이 점차로 드높아져가고 있었다. 아. 그제서야 나는 그것이 바로 내 머리 위쪽의 들창에서 밀려나오는 소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호도껍질 속>에 앉아 있던 어느 누군가가 혼자서 허밍을 시작했던 것이고, 곧이어서는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그 선율을 따라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은은한 허밍코러스가 되어 들창 너머로 밀려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져 버린 시인이 부르던 노래, 돌아오지 않는 시인이 부르던 노래 一그것이 이제는 그를 위한 허밍코러스, 돌아오지 않는 시인을 위한 심야의 허밍코러스가되어 적연한 세상 밖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 ♩♩♩♩♪♩♩♩♩♩♩♩ ♩♪♩♩♩♪♩♩♩♬♩♩♩ ♩♪♩♩♩♪♩♩♩♪♩♩♩ "아우, 개자식들, 이 나쁜 자식들......"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있던 여자가 갑작스럽게 두 귀를 틀어막으며 미친듯이 머리를 뒤흔들어대기 시작했다. 4. 먹고 사는 일에 관한 명상 1. 재개발 지구로 지정된 산동네, 그 비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을 내려가면서 그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만상을 찌푸린 것처럼 하늘이 잔뜩 끄무러져 있었다. 눈이 내리기 직전과 대단히 흡사한 날씨였지만, 기대감을 아무리 부풀린다 해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만추의 계절, 지금은 시월말이 아닌가. 그러니 눈에 대한 기대감보다, 아직은 조락으로 더욱 숙연해져야 할 그런 만추의 계절일 수밖에 없었다. 낙엽비가 내리고, 낙엽눈이 내린다는 시월...... 며칠 전 신문을 읽다가 추려낸 문구 하나가 빠르게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붉고 노란 잎의 나무가 집 주위를 단풍등(燈)처럼 밝게 해주고, 바람이 불거나 안 불거나 낙엽눈, 낙엽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다는 그곳이 어디였던가. 미국의 어느 국립공원, 그 가을 풍경을 묘사해 놓은 해외특파원의 글을 읽으면서 그날 그는 터무니없이 깊고 드넓은 몽환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단절돼 온 계절 감각이 그 글을 읽고 난 직후부터 온몸 구석구석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의 돋을볕처럼 무수하게 반짝거리던 그것들은 오래지 않아 집어등만큼이나 커다란 발광체가 되어 어두운 내면을 속속들이 조사(照射)했고,그것으로 인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끄움, 온몸을 비틀며 신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산스럽기 짝이 없는 현실, 그 내면의 살풍경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그것의 이름이 아마도 추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불현듯 두 눈을 치떴다. 밤이었다. 백일이 갓 지난 아이와 아내, 그리고 그 자신이 날이면 날마다 새우잠을 자야 할 만큼 비좁고 을씨년스런 방구석이었다. 퇴세(頹勢)의 징후처럼 역력하게,방안 가득히 어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국의 가을 정취를 한껏 만끽하고 돌아와 만난 어둠이 너무나도 충격적이라서 그는 눈을 뜬 채로 다시 한동안의 시간을 몽몽하게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그것마저도 꿈처럼 몽롱할 뿐이었다. 현실이 환상인가, 환상이 현실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제는 그 자신이 또하나의 어둠으로 고스란히 해체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아내가 방문을 두드렸다.자요? 굼뜬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자, 밥상을 든 또하나의 어둠이 거기, 그 비좁은 뒤란 골목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산동네를 벗어나 시장 어귀로 걸어가면서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뺨을 만져보았다. 부분적이긴 했지만, 팽팽한 맨살의 감촉 대신 젤라틴처럼 물렁물렁한 느낌이 여전히 손바닥으로 전해져 왔다. 순간적으로 그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눈여겨 봐뒀던 개인치과는 시장 맞은편의 상가건물 이층에 있었다. 그리고 그 상가건물 끝쪽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치과 문제였다. 그곳으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 여부에 관한 망설임이 그에게 정도 이상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을 꼬박 쑤셔대던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는 했지만, 전례로봐서 그것이 완진하게 가라앉을 조짐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낸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야말로 변덕이 죽끓듯 하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하는 일만큼이나 요령부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제발 고집부리지 말고 오늘은 나가는 길에 치과엘 들러봐요. 그러다가 작년처럼 또 곪으면 어찌려고 그래요? 대문 앞까지 따라나선 아내가 그에게 신신당부를 했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건성으로 들어 넘기며 대꾸없이 골목을 빠져나왔었다. 치과? 차라리 그는 코방귀를 뀌고 싶은 심정이었다. 10년의 내력을 가진 이 뿌리깊은 고통에 대해 어느 누가 나보다 더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이 고통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의사보다 더 깊고 세밀하게, 그러면서도 독특하게 알고 있다고 그는 자부하고 있었다. 지난 10년, 그 장구한 세월을 통해 그는 자신의 고통에 독자적인 방식으로 적응해 왔고, 그 결과로 이제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의사와 상관이 없는 어떤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설령 상관이 있다 해도 의사들의 치료라는 게 그의 고통을 멎게해준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그것은 상관이 없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치과를 꺼리는 이유는 그가 경험한 몇몇 치과의사들의 대단히 건성적인 태도, 그러면서도 그것을 위장하려는 듯이 보이는 권위주의적 어투에 그가 진즉부터 질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급변하고 진보적인 경향들이 도처에서 불꽃을 튀기는데, 어찌해서 치과의 의료행위만은 그토록 전근대적이고 여전히 고답적인 것인지, 그로서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이 나라 정치인들이 고수해 온 저 유구한 작태처럼, 지난 10년 동안 그가 경험한 치과의사들은 참으로 구태의연했고, 그 구태의연함이 선천적인 것처럼 대단히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리고 이 어수선한 세상에 자신들이 그토록 구태의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고통이 극에 달해서 어쩔 수 없이 치과를 찾았을 때, 그들이 그의 구강을 들여다보고 들려준 얘기는 굳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쯔츳,부었구만>, <아이구, 이거 고름이 나오네>, <아니 이 지경이 되도록 견뎌냈단 말이오?>一대충 그런 식이었다. 그러고 나서 엑스선 촬영을 하게 하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묻지도 않고 곧바로 스캐일링을 시작하는 의사도 있었다. 어느 해 여름엔가, 그때는 통증이 시작된 직후에 볼따구니를 싸 쥐고 치과엘 갔었는데, 이번엔 젊은 여의사가 가타부타 다른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이 곧바로 수술 의사를 타진해왔다. 뽑을 거죠? 그 말이 그에게는 마치 <죽을래, 살래?> 하는 극단적인 표현처럼 받아들여져서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뇨, 뽑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는 표정으로 그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여의사는 상당히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마조히스트로군요. 마조히스트?...... 멍하니 선 채로 그는 한동안 그 말이 지닌 묘한 뉘앙스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한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사전적 의미 그대로 신체적 . 정신적 고통을 통해 성적쾌감이나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의 소유자로, 실제로 의사가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간 때문이었다. 피학성 변태성욕자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날 치과를 나오면서 그는 그 말을 아주 여러번 되뇌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조히스트, 마조히스트....... 그러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결심 하나를 굳혀 나가기 시작했다. 마조히스트 할애비가 될 망정, 이 사랑니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뽑지 않으리라! 그리고 사랑니가 잇몸을 뚫고 올라와 기어이는 마지막 어금니로 자리잡을 때까지, 그것이 몇 년이 걸리든 끝끝내 참고 견뎌내리라! 고통의 조짐이 보인다고 그 즉시 그것을 파헤쳐서 뽑아 버리는 것보다, 몇 년이 걸리든 그것을 견뎌낸 결과로 그 자신이 사랑니를 마지막 어금니로 간직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인류에게서 퇴화되고 있는 치아면 어떻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치아면 또 어떻단 말인가. 그 고통을 감내하고 또한 극복하기 위해 자신과 처절하게 싸우지 않을 수 없는 그 과정을 그는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을 뿐이었다. 고통의 세월을 견뎌낸 상징물처럼, 그야말로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고통의 징표처럼, 그는 기어이 사랑니를 마지막 어금니로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그것은 허연 치관(齒冠)을 드러낼 만큼 적잖이 솟아올라 있었다. 그는 치과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지나 곧바로 상가건물 끝쪽에 세워진 공중전화부스로 들어갔다. 손으로 왼쪽 뺨을 다시 한번 쓰다듬어 보면서, 그는 기어이 사랑니 문제를 <오늘의 운세>로 돌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치과로 간다고 해봤자 지금은 아무런 묘수도 있을수가 없는 시기였다. 그저 약방에 들러 진통제와 소염제나 사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전화기에다 동전을 투입하고 곧바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신호가 가는 동안 부스의 유리벽을 통해 그는 시장골목을 내다보았다. 잔뜩 흐리긴 했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점차로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그는 오늘이 주말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쨌든 주말이면 인파가 늘어나게 마련 아닌가. 시간은 어느덧 정오가 훨씬 지나 있었다. "여보세요" 동전 떨어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여자의 음성이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왔다. "아, 문학시대사죠?" 사뭇 조심스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시죠?" 상당히 세련되고 여유 있는 목소리로 여자는 수화(受話)를 했다. "저 하미경 씨 좀 부탁합니다" "네, 제가 하미경인데요" "아......" 그러고 나서 그는,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입을 벌린 채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여자가 다시 물었다. "누구시죠?" "아, 저는 김윤수입니다. 일전에......" 그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 떠듬거리는 사이, 이번에도 역시 여자가 이쪽의 불편을 세련되게 해소시켜 주었다. "아, 네. 근데 무슨 일로......" 얼핏 생각하기에 전화를 걸어올 일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인물인데 무슨 일일까, 그녀는 그게 사뭇 궁금하다는 어투였다. "저 다름이 아니고 말이죠. 이번 시월호에 발표된 제 소설 말씀인데요" 거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포기해 버릴까 어쩔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를 스쳐간 때문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뭐가 잘못됐나요?" 그녀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아, 그런 게 아니고 말이죠. 실은...... 그 원고료가 언제쯤 입금될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아, 네. 그건 저희 경리부에서 담당하는 건데. 어쨌든 잠깐 기다려보세요. 제가 알아볼께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돈이 급하신 모양인데, 이걸 어쩌죠?" 거의 오 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에 그녀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무슨 ......" "원고료 담당하시는 분이 그저깨부터 휴가중이라는군요. 원래는 이번 주에 원고료를 지급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분이 안 계시니 천상 다음주나 되야 지급이 가능하겠는데요. 어쩌죠?" 당신의 딱한 형편은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으나, 나로서는 도저히 어떤 식으로도 도움을 줄 수가 없고, 그래서 안타깝기 짝이 없다--그녀는 마치 그런 말을 우회해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됐습니다. 지난 주에 그분이 전화를 해서 제 통장번호를 묻고 이번 주에 입금을 하겠다고 하길래 그 결과를 알아보고 싶어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바쁘신데, 고맙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오히려 저희가 죄송하군요. 약속을 못 지켜드려서요" "별 말씀을요. 그럼" 수화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서자 갑작스럽게 온몸이 맥진해졌다.시장골목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음을 내딛는 모든 길에 안개가 가득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세상과 분명하게 단절되어 버린 듯한 급작스런 유리감, 그리고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것 같은 몽몽함一그런 것들이 한데 뒤섞여 묘한 피로감을 느끼게 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도 놀란다더니, 빌어먹을! 돈 때묻에 턱없이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웬지 모르게 자신이 종이보다 더 가벼운 존재가 되어 허공으로 붕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한두 번 있어 온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엄습해 오는 그 허탈한 느낌은 매양 한가지였다. 언젠가 그때도 돈 문제로 고심을 하며 새벽녘까지 작업을 하다가 울컥 화가 치밀어 사전을 뒤져본 적이 있었다. 개도 물어가지 않을, 도대체 돈이란게 뭔가!一그런 격분이 제어되지 않은 욕지기처럼 느닷없이 목구멍으로 치솟아 오른 때문이었다. 그러나 돈이 상품교환의 매개물로서 가치의 척도라거나 지급의 방편, 혹은 재화 축적의 목적물로 삼기 위해 금속이나 종이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그야말로 표리부동하거나 그 실체를 철저하게 은폐하기 위한 교과서적 풀이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돈에 대한 뜻풀이보다도, 오히려 그 밑에 열거된 속담들이 그에게는 한결 현실성이 있어 보였다. 그 속담들을 하나하나, 씹고 또 씹고, 되씹고 곱씹으면서, 그는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의식의 저작활동을 계속했었는지 모른다.그야말로 종이를 씹는 기분이었다. 돈 떨어지자 입맛 난다 돈 나는 모퉁이 죽는 모퉁이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 돈이 돈을 번다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하고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춘다 돈이 제갈양(諸葛亮)이요 돈이 장사(壯土)라 돈만 있으면 처녀 부랄도 산다...... 잠시 멍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오래잖아 당도한 마포행 버스에 부랴부랴 몸을 실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 중의 대부분이 도심으로 가는 노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들이었다. 도심으로 가는 노선 버스가 시야에 포착되면, 그때부터 사람들이 그 버스의 정차 위치를 미리 짐작하여 계주선수들처럼 앞쪽으로 재빨리 뛰어나가곤 했기 때문이었다. 뛰다가, 릴레이에 실패하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대부분이 나이 든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버스 정류장 전체,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모든 정류장들이 그의 눈에는 촌각을 다투는 거대한 계주경기장처럼 보였다. 그런 버스 정류장에서, 그는 때때로 서울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몇 가지의 생존 수칙 같은 걸 연상해내곤 했다. 살아 남고 싶은 자는 뛸 것. 뛰되 요령 있게, 남보다 지나치게 앞서 가거나 뒤떨어지지 말 것. 목표 지점이 확정되면 그때 사력을 다해 달릴 것. 일테면 그것은 부유하는 환상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의 생존 수칙 같은 것이었다. 우직하게 한 자리를 지키면서 한 우물을 파는 인간이 가장 어리석고 미련스런 패배자가 되어 버리는 터전. 그의 눈에는 서울이 그런 환상의 도성처럼 보여졌다.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보던 서울, 그리고 그로부터 10년도 훨씬 더 지난 뒤에 다시 돌아와 보는 서울一금석지감이 느껴질 만큼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해도, 적어도 그것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그에게는 여겨졌다. 그것이 그에게는 거대한 공포였고, 그리고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숨막히는 불안의 근원이었다. 너도 그들처럼 뛸 수 있는가. 너도 또한 그들처럼 요령 있게 뛸 수 있는가. 서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눈에는 거대한 난공불락의 요새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각개전투 병사들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아침마다 터져나갈 듯한 버스에 머리를 쑤셔박고 올라타는 그들의 안간힘은 필사적인 전의(戰意)를 닮아 있었고, 해질무렵 전철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들의 늘어진 어깨는 전쟁에 환멸을 느낀 패잔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도대체 먹고 사는 일이 뭔가. 어느날, 원고를 쓰느라고 꼬박 밤을 지새고 나서 그는 대단히 이른 아침에 재개발 지구의 가장 높은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 꼭대기에서 그날 그는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그 강북쪽의 새벽 하늘에서 아침 노을이 타오르고 하는 따위의 풍경은 이미 사치스런 감상이 되어 그의 마음에서 고스란히 사라져버리고 난 뒤였다. 실핏줄처럼 퍼져나간 산동네의 골목골목에서 아침 출근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거대한 항공모함에서 전투기들이 전장을 향해 일제히 출격하는 장면을 방불케 했다. 손에 봉지를 들고 좁은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그 봉지 안에서 연신 무엇인가를 꺼내 꾸역 꾸역 입안에다 쑤셔 넣으며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또다른 어느날 해질 무렵, 산동네 바로 밑에 형성된 시장 어귀에서 그는 다시 한번 보았다. 그렇게 집을 떠났던 사람들이 너무나도 무거운 걸음, 피로에 찌들 대로 찌든 몰골로 석양을 등지고 허탈하게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반복되는 매일을 통해 그들이 얻게 될 행복과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 뼛골까지 파고드는 존명(存命)의 비애에 대해 그는 오랫동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먹고 사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연탄이 몇 장 안 남았어요. 겨울에 땔 걸 한꺼번에 들여놓지 않으면 돈이 더 든다는데...... 산동네라서 차로 올라오지 않으면 져 날라다주는 품삯을 낱장마다 얼마씩 따로 붙여 줘야 한대요. 버스가 한강을 건너 용산을 지날 무렵, 그는 문득 집을 나서기 전에 아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해냈다. 그는 가을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벌써부터 겨울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 얘기를 꺼낼때마다 죄 지은 사람처럼 지레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아내로서는 보나마나 며칠 전부터 그의 눈치를 살펴 왔음이 분명할 터이었다. 어찌 준비할 게 연탄뿐이겠는가. 보나마나 남들 다 하는 김장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을 궁리를 그녀는 하고 있을 게 분명할 것이었다.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6만 원짜리 방에서 궁핍하기 짝이 없게 살면서, 그래도 돈 얘기 꺼낼 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비교적 밝은 마음가짐으로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편이었다. 꼭 한번 그녀는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이의 백일날이었다. 방이 워낙에 좁은지라 도저히 그곳에서는 글을 쓸 수가 없었고, 할 수 없이 재수생들이 득시글대는 동네 독서실에 나가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날 저녁을 먹으러 돌아와 방문을 열어 보니 아이의 머리맡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그녀는 소리없이 울음을 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따위 형식치레, 안하면 어때 ! 괜스레 가슴 속이 매캐해져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눈물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녀가 더이상 못 참겠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기어이는 억누르던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가 불쌍해서 ...... 아이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 길로 집을 나와 그는 동네 포장마차로 달려가 정신없이 소주를 마셔댔다. 그리고는 그도 울었다. 못난 애비, 못난 남편, 개도 물어가지 않을 소설가 새끼가 너무나도 원망스럽고 증오스럽고 또한 저주스러워서였다. 그러나 그가 눈물을 말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내는 잠에서 깨어난 아이를 안고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듯이 그에게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화난 거 아니죠? 그 다음날 그는 싫다는 아내를 강제로 떠밀어 아이와 함께 동네 사진관으로 보냈다. 백일잔치를 못 해준 대신, 2만4천 원짜리 백일기념 사진을 찍어 주라고 시켰던 것이다. 고정 수입도 없고, 한번에 얼마씩 거금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생활을 저탱해 나간다는 건 참으로 힘에 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명마저 구차스러운, 그런 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단편소설 몇 편을 발표하고 그 원고료를 받아 본 그로서는 그 돈이 너무나도 소중하고,대견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했지만, 그것이 생활비라는 명목으로 전환됐을 때의 초라함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쓴답시고 독서실에 앉아 있으면서, 그런 문제 때문에 그는 적잖은 시간을 부질없는 몽상으로 소모하곤 했다. 좋은 글을 쓰겠다는 의지와 먹고 사는 문제가 전혀 별개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철저하게 후자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전업작가가 되려면 적어도 벌어 놓은 돈이 넉넉하거나, 물려받은 유산이 상당하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딱 한 작품을 쓸지라도 공전의 베스트 셀러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거나, 먹지 않고 입지 않고도 살아갈 자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리라는 것 ....... 그러나 그 중의 어느 것과도 상관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고 그는 때마다 극에 달한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서른둘. 벌어 놓은 돈 전무(全無). 유산? --젓가락 한짝도 물려받을 게 없음. 글쓰는 재주마저 불확실. 도대체가 앞날에 대한 전망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어 보이는 처지였으니 뭔가, 그 자신이 파산선고를 내리고, 그리고 전업작가라는 가당찮은 직함을 재고의 여지 없이 일거에 박탈해 버려야 마땅할 형편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때때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출귀몰하는 도둑놈이 되어 있는 또하나의 자신을 발견해내곤 했다. 아아, 도대체 이 무슨 끔찍스런 망상이란 말인가! 그럴 때마다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진저리를 쳐대지 않을 수 없었다. 쿡, 자신이 쓰는 샤프펜슬로 사정없이 팔뚝을 찔러대고,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려 보면 그 시각이 대개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사이였다. 그 시간대가 아마도 망상이 발아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인 모양이었다. 그런 직후에 시원한 밤공기를 쐬기 위해 독서실 복도로 나가 창유리를 열고 내다보면, 그때마다 여의도 쪽의 어둠 속으로 우뚝하게 치솟아 오른 63빌딩, 그것이 마치 이룰 수 없는 인간의 꿈처럼 난감하게 그의 시야로 밀려들곤 했다. 결코 혼들려선 안 된다. 먹고 사는일,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사느냐가 다를 뿐, 보릿고개 시절처럼 끼니를 굶거나 헐벗고 사는 건 결코 아니지 않느냐. 아무것에 대해서도 초조해 하지 말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의 허기를 보이지 말자.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삶으로부터의 채무감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밀린 숙제를 하듯, 해묵은 빚을 갚아 나가듯, 그렇게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걸어 나가자. 어쨌거나 이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없고, 그리고 그 어떤 곳으로도 두번 다시 돌아갈 수 없지 않은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다만 헤치고 나아가야 할 전도가 있을 뿐 ...... 그러나 그런 식의 화해는 언제나 순간적인 안정감으로 자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현실로 등을 돌리고, 그리고 예기치 못한 치도곤에 또다시 시달리다 보면, 그런 식의 자기 다짐은 언제나 기억에도 없는 것이 되어 있곤 했던 것이다. 거기가 바로 원점이었다. 언제나 싸늘한 비수 한 자루가 목에 닿아 있는 듯한 생존의 막바지에서, 참으로 먹고사는 일에 초연해진다는 게 용기로 손꼽혀질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이 과연 그런 용기의 소유자를 진정으로 요구하는 시대일까. 차라리 그는 무너지고 싶었다. 한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잔인하게, 아주 초토가 되도록 자신을 짓밟고 싶었다. 글을 쓰겠다고 황량한 벌판 저 끄트머리까지 겁없이 내달았던 젊은 날, 현실의 모든 것을 제멋대로 무시해 온 자신의 오기 전체를 갈가리 찢어 발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다시 태어나서 두번 다시는 그런 터무니없는 혈기와 오기로 자신의 청춘을 송두리째 누더기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설령 다시 한번 소설가가 된다 할지라도,소설을 쓴 대가로 겨울에 땔 연탄을 살 수 있는 소설가가 아니라, 겨울에 땔 연탄을 사기 위해 의연하게 소설을 휘갈겨 댈 수 있는 그런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다른 무엇을 더이상 생각할 수 있겠는가. 공포스런 생존 때문에 정신적인 고뇌마저도 사치스런 장신구로 치부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지긋지긋하게 여겨질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바뀌면, 그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치를 떨어댄 어제의 자신을 또다시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후회하고, 그리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악순환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나날이었다. 도대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그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2. 윤수가 마포 럭키금성 빌딩 맞은편에서 버스를 내려 정인규(鄭仁圭)의 아파트에 당도한 건 오후 두 시가 훨씬 지나고 나서였다. 하늘은 여전히 끄무러져 있었고, 세상은 저물녘처럼 침침하고 음습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사하기엔 부적당한 날씨인 것 같았다. 하지만 혼자 사는 노총각이 이사하는 데 무슨 길일과 흉일을 따지겠는가. 인규는 이삿날보다도 이사를 하게 된 경위 때문에 살맛이 안 난다고 했었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 지난 반 년 동안 윤수가 만나온 유일한 고등학교 동창생이 바로 그였는데, 그는 만날 때마다 무슨 자기 암시를 하듯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되풀이하곤 했었다. 이사를 하게 된 동기를 모르는 윤수로서야 마땅히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때마다 인규는 묻지도 않은 신세타령을 늘어놓으며 윤수의 물음을 교묘하게 회피해 나가곤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 일을 못하고, 광고대행업체에서 프로듀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그는 몹시도 괴로워하고 있는 눈치였다. 대학에서 영화학을 전공한 그의 꿈이 무엇인지 윤수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겠노라, 친구들에게 자신의 포부를 공공연히 밝히고 다니던 친구였으니, 지금 자기 삶을 전락한 예술가의 그것으로 스스로 규정짓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반 년 정도를 충무로의 영화판에서 전전하다가, 단지 생계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광고대행업체로 입사하게 된 자신의 나약한 의지를 그는 영원히 저워버릴 수 없는 치욕처럼 때마다 되씹으며 괴로워하곤 했던 것이다.반 년 동안 한 편의 영화를 찍기위해 산지사방을 따라다니며 그가 <쥐 소금 녹이듯 찔끔찔끔> 받은 돈의 총액이 60만 원이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씹새끼들 !>, 그는 말끝에다 누구에게 그러는지도 모를 쌍소리를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러고나서 그는 가난한 집안의 장손, 그 밑도끝도없고 보상도 없는 도의적 희생의 참담함에 관해 주절거렸다. 자신이 받은 월급의 대부분이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로 보내지는 숨막히는 현실 속에 도대체 무슨 얼어죽을 꿈이 있고 야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一애초부터 영화를 꿈꾸었다는 것 자체를 가증스런 야망으로 치부하면서 <씨팔!>, 그는 몸에 밴 것처럼 또다시 욕설을 입에 담았다. 그런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윤수는 참으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출구없는 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막막하고 암울하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될 것이며, 어떤 말로 그에게 위로를 가장할 수 있을 것인가. 힘을 내라는 얘기도, 실망하지 말라는 얘기도, 다시 한번 시작해 보라는 얘기도, 아직 늦지 않았다는 얘기도, 그래서 윤수는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나른한 우울 정서가 온몸으로 엄습해 올 뿐이었다. 그런 것 이외에 달리 더는 아무것도 남겨진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데서 생겨나는 형언할 길 없는 무력감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결코 <가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거시적인 안목을 발휘해 <사회구조의 불합리성>이라든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따위를 또한 입에 담지 않으리라. 어떤 어휘, 어떤 수식어로도 그것은 결코 설명되지 않는 것. 그것은 그저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우러나오는 나른한 정서, 사는 일의 곤비로움에서 얻어진 어둡고 죽죽한 영혼의 기류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니까 ....... 인규의 여동생이 결혼을 하게 됐다는 얘기를 윤수가 전해 들은 건 인규가 이삿날을 결정하기 직진, 그러니까 바로 지난번의 만남에서였다. 그리고 그날에야 비로소 윤수는 그 결혼이 인규의 이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동생의 결혼 비용을 대기 위해 그는 결국 자신의 전세금을 빼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어차피 장남이니까....... 인규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웬지 모르게 기막힌 구석이 있어 보였다. 나이 서른둘인 그 자신도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는데, 그나마 아파트에 방하나를 얻고 그 전세금으로 박아둔 전 재산 5백만 원을 고스란히 동생 결혼비용으로 보내줘야 한다? 그가단지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럼,그 돈을 보내주고 나서 앞으로 거처는 어떻게 할 거냐는 윤수의 질문에 그는 아주 덤덤한 표정으로, 그야말로 남의 얘기를 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글쎄, 사글세를 살면 되겠지 뭐 ....... 그로부터 띠칠 뒤에 인규는 실제로 윤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사글세로 살아야 할 집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보증금 없이 월세로 12만원씩을 주어야 하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해골 굴릴 곳>을 드디어는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원래 전세 얻어 살던 아파트는 12층이었는데 새로 얻은 곳은 같은 동의 4층이라고 말하고 나서,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12층에서 4층으로 추락하는 거야. 이삿날 꼭 가겠다는 얘길 하고 나서, 윤수는 전화를 끊기 전에 그에게 이런 억지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털끝만큼도 우습지 않은, 그러면서도 웬지 모르게 우스갯소리를 건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불쑥 꺼낸, 그야말로 한심스런 말장난에서 그것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낙심하지 마라.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더라....... "많이 기다렸지?" 아파트 출입문을 열어주는 인규에게 윤수가 대뜸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 건, 시간이 어느덧 두시 반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삿짐을 같이 옮기기로 약속했던 시간이 원래 한 시였으니, 늦어도 아주 많이늦은 셈이었다. "아냐. 자고 있었어" 실제로 인규는 잠옷바람으로 현관에 서 있었다. 초인종 소리에 이제 막 장이 깬 듯 헝크러진 머리에 부석부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가, 안으로 들어서며 윤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인규를 쳐다보았 다. 그리고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다시 물었다. "회사는?" "지난 밤에 향방 훈련 받았어. 새벽 다섯 시에 왔는데 뭐" 별일 아니라는 듯 인규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그러고나서 현관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앞서 들어갔다. "짐은 언제 싸 둔 거지 ?" 방안을 휘둘러보며 윤수가 물었다. 이불을 제외한 나머저 짐들이 모두 박스에 넣어져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여 개 정도의 라면 박스에 넣어져 있는 그것들이 아마도 세간살이의 전부인 모양이었다. "짐이래 봤자 옷 몇 벌하고 책 몇 권이 전부인데 싸고 자시고 할게 뭐가 있냐? 그저께 밤에 박스 사다가 한 삼십 분 챙겨 버리고 말았지" "제기랄, 요정도 이삿짐 나르려고 사람 오라고 했냐? 혼자 해도 삼십 분이면 족하겠다" 인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윤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인규가 비죽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로 날라야 하니까 삼십 분도 과하지. 십오 분이면 족할테니까 말야" "싱거운 놈......" 턱없이 알량한 짐꾸러미가 오히려 맥빠지게 한다는 표정으로 윤수는 잠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인규가 정색을 하고 윤수에게 물었다. "참, 너 이해찬이라고 알지 ?" "국회의원 ?" 그런 이름을 가진 야당 국회의원 이외에 달리 더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건넨 되물음이었다. "아니, 우리 동창 말야. 거 왜 멀대란 별명 가진 놈 있었잖아?" 답답하다는 듯 인규가 손을 흔들며 부연 설명을 했다. "아, 그래 ...... 이제 생각난다! 그 키 크고 바짝 마른 애?" 담배를 손에 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윤수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그 자식 말야!" "근데 ?" "그자식이 어제 전화를 했더라구. 한동안 못 만났는데 주말에 만나 술 한잔 하자는 거야. 그래서 이사를 한다고 했더니, 이 조꺼튼 새끼가 뭐랬는 줄 아냐? 신사 체면에 이삿짐은 나를 수 없고, 이사 끝내고 나오면 근사한 데서 술 한잔 사겠다는 거야" "그래서 ?"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담배를 힘주어 빨아대며 윤수가 물었다. "그러라고 했지 뭐. 밑엘돈이 숨을 못 쉰다는 새끼가 술 한잔 사겠다는데 그걸 마다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네 얘기도 했어. 그랬더니 너 소설 쓰고 있다는 거 자기도 안다더라. 신문에서 봤다나 어쨌다나......" 흔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마다할 필요까진 없지 않겠느냐, 인규의 표정은 그랬다. "그래서 약속을 했어?" 왼손으로 뺨을 만져 보며 윤수가 물었다. 그러자 인규가 상당히 놀라는 표정으로 재빨리 되물었다. "왜, 가기 싫어 ?" "아니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 "왜, 어디 아파?" "이빨" "이빨이 어떤데?" "사랑니가 나는 중이야. 여기 좀 부은 것 같지 않아?" 얼굴을 바로하고 윤수는 왼쪽 뺨을 짚어 보였다. "얼핏 봐선 잘 모르겠는데...... 빼 버리지 그러냐? 난 군에 있을 때 뼈버렸는데" "벌써 십년째야. 이제 거의 다 올라온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술을 마시면 염증이 생길 가능성이 커" "너 정말 지독스런 놈이구나. 그게 무슨 신주단지라고 십 년씩이나 그 고생을 하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인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의사가 나보고 마조히스트라더라" "그런 소리 들어도 싸지, 싸" 의사가 아니라 자신도 그런 소리를 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 사랑니를 통해서 배운 게 많아. 통증이 극에 달할 땐 정말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런 반면에 악착같이 그 고통을 견뎌내고 싶다는 놀라운 집념이 생겨나기도 하는 거야.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랬어. 그래서 해마다 사랑니의 고통을 치러내면서 다시 한번 삶에 대한 정신무장을 하곤 했지. 생각같아선 죽을 때 뽑아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을 정도야. 이 사랑니속에 네 애비의 피눈물나는 고통이 모조리 숨겨겨 있느니라....... 제기랄, 별 우스갯소릴 다 하게 되는군. 그건 그렇고 해찬이 걘 뭘 하고지내냐?" 피식 웃고 나서 윤수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하긴 뭘 해, 놀고 먹는 거지.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걔네 아버지 갑부 소리 들었잖아? 특히 땅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많았는데, 요 몇 년 사이에 그게 모조리 천정부지로 올라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모양이야. 그거 다 팔면 아마 육칠백 억쯤 될 거라더라. 하지만 걔네 재산이 어디 땅뿐이냐? 근데도 그 새낀 맨날 죽는 소리를 해. 아버지가 수전노 같아서 자기한테 돈을 안 푼다는 거야. 그랜저 굴리고, 작년에 세계일주 여행까지 갔다왔다는 새끼가 그렇게 죽는 소리를 치니 니미랄, 우리 같은 놈들은 도대체 무슨 맛으로 살겠냐?" 기가 막히다 못해 아예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결혼은?" 어느새 꽁초가 되어 버린 담배를 표정없는 얼굴로 재떨이에다 비벼끄며 윤수가 물었다. "계집이 너무 많아서 못하고 있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한 채 사서 혼자 살고 있어. 어떤 놈은 장가를 가고 싶어도 돈 없고 여자 없어서 못 가는데, 어떤 놈은 너무 많아서 못 간다니 ....... 요즘 같아선 정말 세상 살맛 안 난다. 세상만사 다 귀찮은데 그냥 머리 빡빡 밀어 버리고 중이나 돼 버릴까?" 이삿짐을 나를 생각은 하지 않고 윤수와 인규는 한동안 그런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저마다 사회적인 입지를 확보하고, 그리고 시쳇말로 <잘 나간다>는 동창들에 관한 얘기였다. 국제적인 양담배 회사의 국내지사 대리로 있으면서 동창들 만날 때마다 몇 보루씩 양담배를 뿌리고 다니는 친구, 발빠른 투기행위로 벌써 맨션아파트 두 채를 마련한 친구, 부잣집 외동딸을 후려서 직장도 없이 자가용을 굴리고 다니는 친구, 판사가 된 친구, 검사가 된 친구....... 인규는 심심찮게 그런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신다고 했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자신이 술값을 계산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했다. 처음엔 자존심도 상하고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져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면서 그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표현을 썼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팔자소관으로 돌려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체념과 어떻게 다르냐고 윤수가 묻자, 그것이 바로 체념이라고 인규는 곧바로 대답해 버렸다. 생각해 보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다는 표정이었다.그러면서 그는 다시 물었다. 보릿고개 시절에도 그러지 않았는데, 어째서 요즘처럼 먹고 살 만한 세상에 부지기수의 청소년들이 떼강도가 되고 살인자가 된다고 생각하냐? 체념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는 나이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인규는 스스로 대답을 했다. 그 나이의 심성으로 가장 견뎌내기 힘든 게 아마도 상대적인 빈곤감일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청소년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사회로까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는 이유도 전적으로 상대적인 빈곤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처럼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뿐만 아니라 돈 문제로 극심하게 시달리게 될 때마다 거의 본능적으로 범죄를 꿈꾸게 되는 또하나의 자아에 관한 얘기도 그는 했다. 아주 담담하게 했다.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사이에, 가끔씩 윤수가 사로잡히곤 했던 그런 망상과 그것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인간이란 어차피 생리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 인간은 체념해야 하는 거라고, 그렇지않으면 자신을 버리게 되는 거라고, 그게 바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는 거라고....... 그야말로 숙명론자와 같은 얘기를 그는 끝없이 펼쳐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윤수는 알 수 없었다. 인규가 말하는 그 체념이 바로 극복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극복의 불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걸 알 수 없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모든 것을 체념한 뒤에 얻어지는 건 뭘까. 그리고 궁극적으로 잃게 되는 건 또한 뭘까.체념이 파행적인 충동을 거세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현실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나 개별화된 자아의 고유성까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순식간에 무화시켜 버리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더이상 살아야 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그래선 안 되는 거라고, 결코 그래선 안 되는 거라고 윤수는 생각했다. 가난이 옴이라연 체념은 암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세차게 머리를 뒤혼들었다. "야, 백날 해도 끝나지 않을 얘기 그만하고 어서 이삿짐이나 나르자.이러다간 어두워져도 끝내지 못하겠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며 윤수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간은 어느덧 세시 반이 지나 있었다. 그제서야 인규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댔다. 기지개까지 늘어지게 켜대고 나자 그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대며 그가 중얼거렸다. "으이그, 지긋지긋해. 먹고 산다는 게 도대체 뭔지 ......" 3. 윤수와 인규가 영동의 <다이너스티 클럽 하우스>라는 곳에 도착한 건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못 되어서였다. 날씨가 흐린 탓인지 어둠이 다른 날보다 훨씬 빨리 오는 것 같았지만, 날씨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때 이미 영동의 유흥가는 휘황찬란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다이너스티 클럽 하우스>라는 술집은 버스 정류장에서 오 분쯤 소요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의 외관이 중세기의 성(城)처럼 대단히 고풍스러워 보였다. 첨탑으로 만들어진 지붕과 석재로 처리된 벽면, 그리고 아치형 창 따위들이 한데 어우러져, 삼층 건물 전체가 얼핏 보기에 고딕식 건축물을 흉내내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건물 앞쪽으로는 너른 마당까지 갖추어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여러 대의 고급 승용차들이 주차돼 있었다. 굳이 같이 가자는 인규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해 그곳까지 가긴 갔지만, 그래도 웬지 모르게 윤수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식사를 한 뒤에, 곧바로 집으로 갔어야 옳았는데 ...... 하는 생각이 무슨 불길지조처럼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을 들쑤셔댔기 때문이었다. 술집 앞에 당도해서 그 호사스런 건물을 보고 난 뒤에는 <결정적으로 잘못 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건물뿐 아니라 술집 간판까지도 마음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다이너스티 클럽 하우스라니 ! <다이너스티dynasty> 라는 단어가 <왕조(王朝)>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그렇다면 이 술집은 오로지 왕의 직계나 혈통들만 출입할 수 있다는 그런 곳이란 말인가? 전적으로 그런 특권층만을 위해 만들어진 술집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윤수는 손을 들어 왼쪽 뺨을 만져보았다. 부은 잇몸으로 저녁을 먹어서 그런가, 가라앉았던 통증이 아주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해찬이란 친구는 실내의 정 중앙에 위치한 원형 스탠드 바에 앉아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실내는 대단히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손님을 접대하는 방식부터가 일반 업소와는 상당히 다른 것 같았다. 입구에서 빨간 체크무늬 상의에 나비넥타이를 맨 지배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그러고 나면 젊은 웨이터가 재빨리 그 손님을 인계받아 좌석지정을 해주고, 그 뒤에는 재복을 입은 테이블 담당 여급이 나타나 선 채로 술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왕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술을 마셔서 그런가, 실내가 넓고 좌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대단히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구, 이거 소설가 선생까지 오셨구만?" 자리에 았아 있던 해찬이가 윤수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말쑥한 정장 차림에 정발유까지 바른 모습이 얼핏 보기에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패션모델을 닮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술이 취한 듯 그 눈빛은 상당히 거슴츠레해져 있었다. "일찍 온 모양이지 ?" 인규가 해찬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세 시부터 마시고 있었어. 하지만 많이 마신 건 아냐. 이거 한 병 가지고 계속 깔짝거리고 있었으니까. 여긴 지겨우니까 이거 마저 마시고 나가자" 술병을 들어올리며 그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들어올린 술병은 윤수가 처음 보는 외제 양주병이었는데, 그 라벨에 이라고 씌어 있었다. "지난번 마시던 거하곤 또 다르네? 레미 마틴?......" 해찬이가 따라 주는 술을 받으며 인규가 그 술병에 관심을 나타냈다. "짜식아, 이건 <레미 마틴>이 아니라 <레미 마르텡>이라고 읽는거야. 모르면 좀 배워라, 배워. 불란서 코냑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윤수의 잔에다가도 술을 따랐다. 어차피 마시지못할 술이지만 받아는 둬야겠다는 생각으로 윤수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임마, 너처럼 화류계 생활이 전문인 놈하고 내가 같냐?" 잔을 들어올려 코끝으로 냄새를 맡으며 인규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해찬이가 다시 입을 열어 그 방면에 관한 자신의 다식(多識)을 한동안 과시했다. "불란서 하면 역시 코냑이지. 대표적인 걸 꼽자면 마르텔, 쿠르봐지에, 비스퀴 뷰셰, 헤네시, 레미 마르텡, 카뮈, 나폴레옹 같은 것들을 들 수 있지. 코냑은 프랑스 샤랑트 지방에서 생산되는 백포도주를 증류 해서 만드는 건데, 숙성기간과 혼합방식에 따라 급수가 정해져 있어.흔히 별 세 개짜리로 불리는 건 저급 코냑인데 보통 숙성기간이 삼 년에서 십 년쯤 된 거고, 중급 코냑에는 VO나 VSOP라는 표기가 돼 있는데 그건 최소 사오 년에서 최고 이삼십 년 정도 된 걸 뜻하는거야. 그리고 숙성기간이 삼십 년 넘은 최고급에는 XO나 VVSOP라는 표시가 돼 있지. 근데 마셔 보면 확실히 맛과 향이 달라. 깊이에서 차이가 난다 그거지" "이건 VSOP라고 표시된 거니까, 그럼 중급인 모양이로구나? 너같은 놈이 최고급을 안마시고 어째 이런 중급을 마시냐? 어울리지 않게......" 인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집에 그게 떨어졌어. 요즘 우리나라에선 XO나 VVSOP 같은 최고급 코냑이 가장 잘 팔린대" "VSOP라는 건 무슨 뜻이지 ?" 해찬이의 말이 끝난 뒤에 윤수가 술병 상단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그거? 그건 <베리 수폐리어 올드 패일 Very Superior Old Pale> 의 약자야. 그건 그렇고 자 건배나 하자. 오랜만이다!" 술잔을 들어올려 건배를 주도하는 해찬이를 따라 인규와 윤수도 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한 번씩 잔을 부딪혔다. 그러나 윤수는 잔을 입술에다 갖다대기만 하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걸 보고 해찬이가 곧바로 윤수에게 물었다. "왜 술을 안 마시지 ?" "사랑니 때문에 잇몸이 부었대" 인규가 윤수의 대답을 대신 해주었다. "그래 ? 부었으면 술을 마셔서 빨리 곪아 터뜨려야지. 뭐든 끝장내야할 일은 빨리 내는 게 좋다구" 아주 묘한 눈빛으로 윤수를 쳐다보고 나서, 그는 인규와 자신의 술잔에다 다시 한 잔씩의 술을 따랐다. 그게 끝이었다. 더이상 술이 나오지 않자 해찬이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가 계산을 했다. 그리곤 그곳에 있는 지배인과 뭐라고인가 얘길 주고 받았다. "조꺼튼 새끼, 아주 제멋대로구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규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기분 때문이 아니라, 해찬이의 행동방식을 전혀 모르고 있을 윤수를 의식해서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윤수와 인규가 밖으로 나왔을 때 해찬이는 어느덧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운전석에는 생면부지의 청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지배인까지 따라나와 차 옆에서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고 있었는데, 얼핏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어 보니 운전석에 앉아 있는 젊은 친구는 해찬이의 전용기사가 아니라 이 술집에서 고용하고 있는 대리운전자인 모양이었다. 해찬이가 지배인에게 무슨 얘길 했는지 몰라도, 사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그 지배인은 차에 탄 해찬이에게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무엇이 그렇게도 고마운지는 몰라도,그 지배인은 해찬이를 진짜 왕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윤수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고 귀여운 소년 하나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수업시간에 선생 모르게 도시락을 까먹으며 캬를거리던 소년. 그리고 수학여행길에 여학생 주소 하나를 받았다고 뛸 듯이 기뻐하던 소년....... 윤수는 그저 그 시절의 그 소년이 그리울 뿐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때도 그는 지금과 다름없이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그때의 그와는 연관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를 그때의 그와 연관시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윤수는 그저 그런게 우울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놀라운 변신과 재빠른 적응만이 훌륭한 삶의 미덕으로 간주되는 세상. 그리고 변하지 않겠다는 의지나 집념, 혹은 지조 따위가 고스란히 반편이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여지는 터전. 그건 바로 버스 정류장에서 한 자리를 지키며 버스가 자기 앞에 정차하기를 기다리는 인물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어떤 버스도 지정된 위치에 정차하지 않고, 또한 정차할 수도 없는 세상이 잘못된 것일까. 윤수는 더이상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심화되기도 전에, 그는 기어이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왼쪽 뺨을 어루만지지 않을 수 없었다. 통증의 정도가 점점 더 깊어지고 또한 광범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말대로 치과엘 들러 진통제라도 한대 맞아 둘 걸 잘못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후회를 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때였다. 통증이 시작되고 난 뒤에는 어떤 종류의 진통제도 제대로 약효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걸 그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통증이 시작되고 난 뒤에 남겨지는 건 언제나 견디는 문제뿐이었다. 견디는 방법 이외에 달리 더는 아무런 묘수도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설령 수술을 원한다 해도 그것은 통증이 가라앉은 뒤에나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독한 진통제를 두 알 세 알씩 투입해도 그 약효는 삼십 분을 넘기지 못했다. 바랄긴 따위의 진통제를 근육에다 주사하면 그럭저럭 한 시간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잡을 심사가 아니라면 어느 병원에서 그렇게 한 시간에 한 대씩 진통제를 주사해 주겠는가. 진짜 모르핀을 맞으면 두 시간 정도는 통증을 잊을 수 있었다.그러나 그 두 시간 동안은 모르핀이 몰고 오는 현기와 메슥거림 때문에 고스란히 자리에 누워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얼음찜질, 쑥찜질, 아카시아 뿌리 삶은 물, 명태 삶은 물, 백반 녹인 물에 이르기까지 - 지난 십 년 동안 그것이 치통에 좋다고만 하면 거의 써 보지 않은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다 임시변통을 위한 것이었을 뿐, 근본적인 치유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남는 문제는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뽑느냐 견디느냐 一그것 이외에 달리 더는 아무런 방도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차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들어서고 난 직후부터 윤수는 본격적으로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통증의 초기 증세가 극단으로까지 치달을 기세를 보이면 그는 언제나 그랬다. 마지막 결전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아주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의 결기를 거듭 추스르곤 했던 것이다. 그럴 즈음에 차는 주차장에 정차를 했고, 해찬이는 대리운전자에게 3만 원을 건네주며 수고했다는 표시로 몇 번인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뒷좌석에 앉은 인규와 윤수에게 엄지손가락으로 내리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목적지가 자신의 아파트라는 얘기를 끝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피곤하다, 정말 피곤해. 일 주일 동안 꼬박 포커를 쳤더니 이젠 정말 못 견디겠어. 우선 샤워부터 하고 나올께, 잠깐만 기다려" 아파트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윤수와 인규가 보는 앞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어던지고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너 이 새끼 옷 좀 볼래?" 해찬이가 욕실로 들어가고 난 직후에, 응접세트에다 닥치는 대로 던져 놓고 간 그의 옷을 들추며 인규가 재미있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 ?" "이 새끼 옷에 달라붙어 있는 상표들 말야" 그러면서 인규는 양복 상의부터 차례차례 들춰 나가며 그곳에 붙어있는 상표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소르젠떼 ...... 그리고 이건 삐에르 발만...... 임마누엘 웅가로......로얄 파크...... 옳지, 이건 빠꼬 라반...... 그리고 이건 기라로슈......" 옷을 들추고 나서 이번에는 양복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 지갑, 만년필 등속의 상표까지 들췄다. "포트 폴리오...... 몽블랑...... 삐에르 가르뎅 ...... 어휴, 개스키! 이건 완전 짬뽕이로구만. 도대체 이 새끼 좆은 어느 나라 좆일까?"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인규는 혀를 내둘렀다. "인터내셔날이겠지 뭐" 풋, 웃음을 터뜨리며 윤수가 입을 열었다. 부은 잇몸 때문에 안면 근육이 몹시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래도 나오려는 웃음을 굳이 참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그의 얼굴 표정이 더 우스워 보이는지, 인규는 한동안 어깨를 들먹이며 캬를거렸다. 삼십오 평 아파트의 실내는 혼자 사는 사내의 집이 전혀 아닌 것처럼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것이 파출부 때문이란 걸 윤수가 알게된 건 그로부터도 한참이 더 지나고 난 뒤였다. 가죽으로 된 응접세트와 장식장, 외제전축, 텔레비전, 오디오 등속이 거실에는 놓여 있었고,응접세트 맞은편 벽면에는 흑인 여가수의 대형 패널이 걸려 있었다.유방을 거의 다 드러내고 청바지 지퍼를 반쯤 내린 선정적인 포즈의 사진이었는데, 그 하단에 그녀의 이름이 인쇄돼 있었다. 휘트니 휴스턴WHlTNEY HUSTON. "저 새낀 저 여자 사진을 보면서 가끔씩 수음을 한대"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보는 윤수에게 인규가 들려준 말이었다. "그러길래 내가 뭐래 ? 인터내셔날이라니까......" 손으로 왼쪽 뺨을 지그시 누른 채 윤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지 ? 자, 자, 이제 자세를 잡고 앉자구" 무슨 자세를 잡자는 것인지는 몰라도,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온 해찬이는 다른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곧바로 거실의 불부터 껐다. 벽면에 부착된 작은 장식등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모두를 소등한 뒤에, 그는 주방으로 가 다시 한 병의 양주를 들고 나왔다.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세를 잡아야 할 이유가 그것이라는 듯,장식장 서랍에서 테이프 하나를 꺼내 재빨리 비디오에다 밀어 넣었다. "자, 마시면서 보자구. 윤수 넌 안 마신다고 했지 ?" 자신과 인규의 잔에만 술을 따르고 나서 그는 곧바로 소파에다 몸을 묻어 버렸다. 미처 대담을 할 겨를도 없었다. 애초부터 대답을 들을 심사가 아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 비디오 테이프가 시작되기 직전에 문득 생각난 것처럼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윤수를 보았다. "그래, 소설은 쓸 만하냐? 요즘 보니까 소설 써서 떼돈 버는 샤람도 많은 모양이더라. 세상 많이 좋아졌지. 옛날 같으면 다들 밥도 빌어먹지 못한다고 했는데 ....... 이 테이프는 빌려다 놓은 지가 벌써 열흘도 더 됐어. 포커 치러 다니느라고 여태 못 봤으니, 나도 참 한심하지" 애초부터 윤수의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그러고 나서 그는 또다시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 화면을 향했다. 이제 마악, 전라(全裸)의 여인 하나가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한껏 들어올리는 첫 장면이 시작되고 있었다. 포르노...... 포르노였다. 건장한 사내의 남근이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고, 이어 몇 명의 벗은 여자들이 다시 등장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화면이 바뀌면서 이번에는 남자 하나에 여자 다섯이 달라붙어 나뒹구는 기막힌 장면이 나타났다. 신음과 기성이 뒤섞이면서 그런 장면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끝내 주는구만, 끝내 줘 ......" 술을 마시면서 가끔씩 해찬이가 중얼거렸다. 말없이 잔을 비우고 다시 채우고 하면서, 인규는 생각날 때마다 한 대씩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나 윤수는 그들처럼 화면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사랑니의 통증이 기세를 부리는 동안, 본의 아니게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나타나면 그때부터 심리적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미묘한 상태를 윤수는 몇 번인가 경험한 적이 있었다. 신경을 써야 할 다른 일이라는 게 몰아의 지경을 만들어주면 고통을 견뎌나가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그야말로 <고통의 이중주(二重奏)>나 <이중고(二重苦)의 고통>이 되기 심상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 두 가지가 팽팽하게 대립된 채, 소모적인 신경전으로 긴장감만 고조시키는 경우도 더러는 있었다. 어느 쪽일까. 포르노를 보면서 윤수는 그런 저울질을 했다. 포르노가 승하면 통증을 견뎌내는 데 도움이될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고통은 더욱 배가(倍加)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왓, 저 새낀 완전히 물개로구나, 물개야!" 몸놀림이 격렬해지는 사내를 보면서 해찬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단순한 몸짓,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변화를 꾀하려 하는 동작들이 화면에서 끝없이 계속되어지고 있었다. 포르노의 주인공격인 사내가 가정주부를 폭행하고 있었고, 처음의 태도와는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로 그 폭행을 즐거워하는 가정주부의 표정이 화면 가득히 부각되고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내용에 변화를 주기 위해 섹스의 동기 자체를 범죄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섹스의 마성을 악착같이 부각시키기 위해 폭행당하는 가정주부의 얼굴을 빈번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녀 스스로가 폭행 주체에게 능동적인 자세를 취해 주며 미친 듯이 온몸을 뒤틀어 대고 있는 것이었다. 킬 미, 키일 미 ....... 그런 장면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었을까. 드디어 윤수는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탁자 위에 올려진 술병에다 자주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사랑니의 통증이 포르노의 마성을 훨씬 압도하고 있다는 걸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털끝만큼의 기대감도 허용할 수 없는 끔찍스런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견뎌내야 하는 시간, 견디는 일 이외에 다른 아무런 묘수도 있을 수 없는 그런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그런 시간에 그는 자해를 꿈꾸기도 했었다. 자해를 꿈꾸다 못해 자살을 꿈꾸기도 했었다.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그것은 인간이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끔찍스런 고통이 분명했다. 드디어 윤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뒤쪽의 맨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아무도 그의 동작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소파의 등받이 바로 뒤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통증이 걷잡을 수 없이 극심해지는 왼쪽 뺨을 관절 부위에다 갖다 댔다. 그리고 지그시 힘을 주어 뺨을 눌러 보았다.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두 팔로 무릎을 싸안고 이번에는 그 안에다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포르노에서 흘러나오는 신음과 기성들이 귓구멍으로 흘러들어 통증을 더욱 자극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통증에 가세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통중이 영원히 계속될는지도 모른다는 끔찍스런 예감이 푸른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드디어 온몸 전체에서 진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무엇은 견디고 무엇은 견딜 수 없단 말인가. 예상치도 못했던 말들이 퍽, 퍽.불꽃을 일으키며 뇌리에서 튀어 올랐다. 나는 내 영혼의 혀를 잘라버렸어. 손을 달라는 샤람에게 혀를 잘라버렸어. 손을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보였고, 화해하자는 사람에게 침을 뱉았어.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속에서 나를 조정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래도 견뎌야 한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 희미해져가는 의식의 끄트머리에서 낯선 단어들이 눈꽃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레미 마르텡 ...... VSOP...... 소르젠떼 ...... 삐에르 발만......빠꼬 라반...... 휘트니 휴스턴 ......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점차로 혼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는 한 가닥 이성의 실마리를 찾아내기 위해 발악하듯이 온몸을 비틀어 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나서 그는 드디어 보기 시작했다. 봄으로써 자신의 고통이 극점에 다다랐다는 것도 또한 깨우칠 수 있었다. 그러나 육신은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있었고, 온몸은 빈틈없이 땀에 젖어 있었다. 다만 보이는 것이 있을 뿐이었다. 바람부는 벌판이 보이고, 80년 그해 가을에 자살한 지명수배자의 얼굴이 보이고, 영창 대기를 하는 병사가 보이고, 화제로 잿더미가 되어 버린 집이 보이고, 빚쟁이들에게 개처럼 끌려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고, 거리로 나앉은 가족들의 얼굴이 보이고, 인형공장에서 솜을 쑤셔넣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고, 내다봐도 돌아봐도 산뿐인 광산촌의 살풍경이 보이고, 목을 매고 자살한 광부의 얼굴이 보이고, 독서실에 앉아 샤프펜슬로 팔뚝을 찔러대는 자신이 보이고, 옴치고 뛸 수도 없을 만큼 비좁은 단칸 셋방이 보이고...... 드디어는 보이지 않아야 할 것까지 보였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자신에게 끝없이 채찍질을 가해대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까지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지워지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의식이 가물어지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그 가물어져 가는 의식의 끄트머리에 어떤 말 한마디가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처럼 끝없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연탄이 몇 장 안 남았어요, 연탄이 몇 장 안 남았어요....... 5. 한편의 흑백영화에 관하여 그는 말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뻔뻔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나타났는지, 그 구체적인 얘기나 들어보자는 위협에 가까운 나의 강요에 의해, 그는 드디어 거의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무저항적이다 못해 굴종에 가까워 보이는 그의 태도가 그때의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심한 역겨움을 느끼게 했다.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그의 모습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한 몰골 그대로였다고나 해야 할 것인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엉뚱하게도 심한 역겨움을 느꼈다는 건, 요컨대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게 되는 얄팍한 동정심을 내가 의식적으로 거부했거나, 혹은 고의적으로 그것에 반발함으로써 생겨난 엉뚱한 제어작용의 산물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절대로 용서받아서는 아니 될 인간이라는 극심한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를 단죄 받아 마땅한 패륜아 내지 구제받을 수 없는 인간 말종으로 몰고가야 한다는 벗어날 수 없는 강박적 사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목덜미를 휘어잡은 직후에 그의 따귀를 후려지고 결국에는 코피까지 터뜨렸다는 데 대해 나는 털끝만큼도 후회하지 않고 있었고, 후회에 관한 한은 언게까지든 초연할 수 있으리라는 오기 하나로 물어뜯을 듯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나도 또한 그때까지의 내 태도를 조금은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술의 중요성을 감안해서라도, 어쨌거나 나는 인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그의 얘기는 하루 전날밤, 그러니까 그가 여자와 만나기로 한 밤 열시, 약속장소로 지정된 아파트 단지 내의 어린이 놀이터에 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밤, 그가 만나기로 한 여자는 밤 열 시가 지났는데도 약속장소에 나타나질 않았었다고 그는 말했다. 약속장소가 바로 그녀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지정한 약속시간을 스스로 어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는 그 아파트 단지는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변에 위치해 있었는데,그 어린이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있노라니 강변도로를 빠르게 질주해가는 무수한 차량의 행렬은 물론, 강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서 쏟아져내리는 화사한 불빛들이 드넓은 강의 수면 위에서 번들거리는 것까지도 비교적 상세히 보이더라고, 그는 묻지도 않은 당시의 주변 정황을 감정이 이입된 필연적 배경처럼 덧붙여서 설명했다. 그리고 강을 가로질러 세워진 거대한 철교도 보였고, 그 철교를 가끔씩 가로질러 가는 전동열차도 한동안씩은 보였었노라고 그는 말했다. 자신의 기억력이 정확하다면, 그날 밤의 대기는 대단히 눅눅했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으로부터도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아서 몹시 심한 무더위가 느껴졌었다는 것까지도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상기해냈다. 약속시간이 덧없이 허물어지던 당시의 자기 내면 정황에 관해 말하자면, 답답하고 막막해서, 참으로 견딜 수 없이 답답하고 막막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발악하듯이 소리를 내지르거나 미친 듯이 어디로인가로 달려가고 싶었는데, 그것만은 절대로 과장된 게 아니라는 걸 그는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모든 건 분명했지만 다만 한 가지,그녀가 과연 그 늦은 시간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용케도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만은 아무리 기를 써봐도 생겨나질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버려졌거나 혹은 고립된 듯한 극심한 단절감 때문에 자신은 무척이나 불안하고 또한 초조했었다고 그는 말했다. 마땅히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을 느닷없이 혼자 감당하게 됐을 때의 그 이를 데 없는 난감함 - 요컨대 자신은 그런 상태에서 무작정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그는 꽤 오래 전부터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 있던 담배를 비로소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불을 붙이기 전에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덧붙이듯이 입을 열었다. 그 아파트 단지의 어린이 놀이터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그날밤, 자신은 이미 자신의 거처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이었다는 것 - 그걸 분명하게 알아달라는 일종의 부탁을 내게 건네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럼 그 여자가 그곳에 나타난 게 언제였다는 얘기야?" 그가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까지 빨아들였다가 그것을 다시 허공에다 천천히 내뿜는 걸 보면서, 나는 쓸데없는 사족은 제하고 요점만 간결하게 얘기하라는 투로 그를 다그쳤다. 그러나 그는 한모금의 연기를 다시 한번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이번에는 그것을 허공이 아니라 자신의 무릎 부근에다 내뿜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녀가 약속장소에 모습을 나타낸 건 약속 자체가 완전히 무산되었다고 여겨지던 자정 무렵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모금의 담배를 빨아들였다. 강변도로를 따라 맹렬하게 질주해 가던 차량의 행렬이 훨씬 줄어들고, 철교를 건너가는 전동열차도 더이상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암회색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로 열려 있는 비좁은 길을 돌아 자신이 있는 놀이터로 힘없이 걸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순간, 그때까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난감함, 막막함, 불안, 초조 따위의 정서적 불안정은 씻긴 듯 사라지고, 그 짧은 순간 뒤에는 오히려 비할 데 없는 기쁨과 신신한 설레임까지 느껴졌었다고 그는 말했다. 과장되게 들릴는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정신적 고뇌와 현실적 고통을 말끔하게 척제해 줄 절대적 권능을 지닌 대단한 존재처럼 여겨졌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느끼고 있던 단절감과 고립감은 극심했었다는 얘기를 덧붙이면서, 그는 보일락말락하게 자신의 아랫입술을 떨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그것만은 반드시 믿어줘야 한다는 얘기를 덧붙일 때는, 그러나 그는 다시 담담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의 표정과 어조로 미루어보아, 이제 더이상 자신은 숨길 것도 없고 또한 숨기고 싶은 것도 없으니, 적어도 자신이 언급하는 걸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내면적 탄회(坦懷)를 그는 분명하게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걸 느끼고 판단할 재량권은 오로지 나에게 있었으므로, 그런 사소한 심리적 저의에 대해서까지 나는 결코 쾌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있는 그에게 다그치듯이 이렇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손에 들려 있던 담배를 다시 한번 입으로 가져가면서 순간적으로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다음 얘기를 하려는 참이니 제발 다그치지 말아 달라는 뜻을 담은 불만스런 표정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말만은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는 그때까지의 흐름과는 사뭇 다른 얘기를 내게 건넸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신이 얘기를 이끌어나가는 전개방식에 대한 나름대로의 필연성을 내가 이해해 줘야 한다는 일종의 화자 주(註)인 셈이었는데, 그는 말하기를, 불필요한 부분에 대해 자신이 지나치게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혹은 집착하는 듯이 느껴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런 배경이라는 게 사실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자신은 생각하기 때문에, 혹시는 짜증스러울지라도 그걸 이해해달라 一 엉뚱하게도 그런 얘기를 그는 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얘기를 나는 아주 간절하고 절박한 간청쯤으로 치부하면서, 알았으니까 어서 다음 얘기나 계속하라는 뜻으로 그저 건성으로 고개만 두어 번 끄덕거려 주고 말았다. 그네에 앉아 있는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검정색 반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고 얘기함으로써, 그는 아주 잠시나마 빗나갔던 얘기의 맥을 다시금 되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있는 그 전체적인 모습이 처음에는 대단히 섬ㅉ해 보였지만, 그러나 가만히 눈에 익히며 바라보니 결코 그렇지만은 않더라는 것이었다.뭐랄까, 차가운 듯하면서도 이지적인 미감이 되새겨지는 모습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자신은 그 순간 문득 자신이 그녀를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생각을 좀더 은밀하게 즐길 만한 여유도 주질 않은 채,늦게 와서 미안하다 라거나 무슨 연유로 늦었다는 따위의 언어적 형식치레마저도 그녀는 생략하면서 대뜸 가자는 말을 자신에게 건넸다고 했다. 물론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를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어디로 갔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마저도 그 순간의 자신에게서는 전혀 떠오르질 않았었다는 것이었다. 그저 가자니까 간다는 식으로 그는 그녀를 따라 무작정 그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는 얘기인 셈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처음부터 그곳으로 가게 되어 있었던 사람들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강변도로를 가로질러 유원지가 형성된 강변으로 내려갔다고 그는 말했다. 그곳에는 포장이 없는 개방식 포장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좌판마다에는 하나같이 칸델라가 밝혀져 있어서 상당히 화려해 보였었다는 것까지도 그는 당연한 듯이 기억해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자정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죽치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몰라도 저마다 유쾌하고 저마다 흥겨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크게 소리내어 웃거나 몸을 흔들어대며 과장된 제스처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녀와 자신은 웬지 그런 사람들 가까운 곳으로는 결코 가기가 싫어서, 그 맨 끝쪽에 있는 텅 빈 포장마차를 찾아가 소주 한 병과 야채 한 접시를 시켰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서 보자니 포장마차 주인여자의 허리춤 뒤에서 강물이 일렁이고 있었고, 그 일렁임에 따라 맞은편 아파트 단지에서 쏟아져내린 불빛들이 춤을 추듯 너울거리고 있었다는 것까지도 그는 분명하게 묘파해냈다. 그리고 자신만 그 강을 바라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도 또한 그곳에다 시선을 붙박은 채로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고, 문득 생각난 듯이 그는 덧붙였다.그리고 소주를 마시는 동안 자신들은 단 한 마디의 얘기도 주고받지 않았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녀가 약속장소로 나타나서 자신에게 대뜸 가자는 얘기 한 마디 건넨 걸 제하고 나면 결국 자신들이 주고받은 얘기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얘기인 셈이었다. 그런 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한 병의 소주를 나누어 마시는 동안 흐름이 정지된 듯한 검푸른 강을 바라보았을 뿐, 정말이지 자신들은 아무런 얘기도 주고받질 않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즐비하게 늘어선 다른 포장마차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너무나도 요원한 곳, 다시 말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들이 내뱉는 알 수 없는 교신처럼 들려져서 그저 막막하기만 했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녀와 자신에게는 그때 이미 뚜렷한 현실감각 같은 건 남아 있질 않았고, 오로지 의식의 방기를 통해 얻어지는 몽롱한 환상만 남겨져 있어서 더없이 난감했었다는 얘기였다. 새벽 한 시가 가까워져서야 그곳을 빠져나온 자신들은 강변도로를 따라 말없이 걸어내려가 강북 쪽으로 연결된 거대한 인도철교를 건넜다고 했다. 어디로 가자는 권유도, 어디로 갈까라는 질문도 서로에게 건네지 않은 채, 그들은 그저 말없이 소음이 잦아드는 도심을 향해 걸어갔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걷는 일도 힘에 겨워지게 되어서야 자신들은 가로수가 즐비한 횡단보도 좌측 골목의 여관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는데, 그때에도 여전히 서로는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었다고 그는 말했다. 여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 여관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다시 한 병의 소주를 자신이 더 샀던 이유는, 요컨대 여관으로 들어간 뒤에 일어나게 될지도 모를 극심한 감정적 변이에 대한 대비였었다고 말하면서, 남자이니까 그런 감정 이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듯한 묘한 동조의 눈빛을 그는 내게 보냈다. 그러면서 그때껏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고 있던 담배를 그제서야 그는 비로소 재떨이에다 비벼껐다. 얘기가 중단된 것은 물론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을 나는 그가 이제로부터 보다 더 소상히 언급해야 할 힘겨운 부분에 대한 나름대로의 모색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짬이라고 판단해서 가차없이 얘기를 독촉했다. "그래서 여관으로 들어간 뒤에는 어떻게 되었다는 얘기야?" 나의 독촉은 일테면 그들이 여관으로 들어가고 난 뒤의 상황을 그가 짧은 순간의 모색을 통해 적당히 윤색하려 하거나 엉뚱하게 미화하려 할는지도 모른다는 데서 생겨난 일종의 경고인 셈이었다.어찌보면 잔인한 경고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 부분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들이 그렇듯 뻔뻔 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게 된 저간의 배경을 가장 명백하게 판단케 해줄 만한 대화라는 걸 그들 이 나누었었다면, 아마도 그날밤 그 여관에서 분명히 나누었으리라는 게 내가 가지고 있는 뚜렷한 확신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나의 생각을 나름대로 어느 정도는 간파해냈는지,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피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이윽고 입을 열기를, 여관으로 들어가서 자신들은 온돌방 좌우측의 벽면에다 등을 기댄 채 오랫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마주봤다고 했다. 그러다가 가끔씩 시선을 돌려 천장을 쳐다보기도 했고, 또 가끔씩은 텔레비전이라든가 은빛 물주전자, 녹색의 꽃무늬가 그려진 커튼 따위를 바라보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도 여전히 자신들은 아무런 얘기도 하질 않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새벽 세 시쯤이 되어서야 여자는 지칠 대로 지친 듯한 표정으로 옷을 입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고, 그때부터 자신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다시 비축해 두었던 소주를 꺼내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소주를 다 마시고 나서야 간신히 일어나 불을 끄고 자신도 그녀 곁에 몸을 눕혔는데, 육신은 완전히 취한 것 같아도 정신만은 전혀 그렇질 못해서, 술을 마시기 이전보다 훨씬 더 명징한 상태가 되더라는 얘기도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래서 붉은 색등만 밝혀진 막막한 허공을 올려다보며 그때 자신이 했던 생각이란 것에 관해 말하자면, 자신은 분명히 그 여자와의 관계, 그 애초부터의 동기와 발단에 대해 엄청난 회오의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었다고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미묘한 심리상태를 그는 상당히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무더위가 시작되던 초여름의 어느날, 말 그대로 어느날 갑자기인 것처럼 자신에게 밀어닥치기 시작한 그 모든 일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엄청나고 기가막혀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는 참담지경으로 고스란히 휩쓸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부분으로부터 말머리를 돌려, 바야흐로 자신과 그녀가 처음 만나게된 그 초여름의 어느날 상황으로 갑작스럽게 얘기의 흐름을 역류시키기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시작된 회상 부분에 관한 그의 언급은 지나치리만큼 조심스럽고 낮은 목소리의 그것이어서, 듣는 입장인 나로서는 마치 그가 모노드라마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연극배우와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모노드라마는 아닐지라도, 그 순간의 그의 어조와 표정과 몸짓 따위를 총체적으로 일별해 볼 때, 독백이거나 방백이라면 몰라도 그것이 나를 상대로 한 대화는 결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나로 하여금 저절로인 것처럼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시작된 그의 언급에 관해, 그것이 설령은 독백이었거나 혹은 방백이었거나 간에, 어쨌거나 그의 얘기에 나는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름이 시작되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아주 무덥지는 않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7평 반짜리 독신용 아파트에서는 비교적 더운 날씨로 여겨지던 그날, 나는 초대하지도 않았고 또한 찾아오리라고 예상치도 못했던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의 남자에 관해 우선 말하자면, 그는 우리들의 고향인 지방도시에서 같은 국민학교,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은 물론 달라졌지만 그래도 같은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된 이른바 죽마고우였습니다. 그가 바로 외자 이름을 가진 학(鶴), 오학이라는 오래된 나의 친구였습니다. 밝히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어린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그와 나와의 관계에 보이지 않게 내재되어 있는 묘한 대립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묘한 대립의식은 그와는 전혀 무관한, 오직 나만의 그것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오학은 나와 같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인 것입니다.지금에야 제어받지 않는 감정으로 솔직하게 실토하지만, 나는 어린시절부터 그에게 야릇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은 조건을 갖춘 월등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체격 조건도 나보다 좋았을 뿐 아니라, 항상 우등상장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고, 학급에서는 탁월한 리더십과 조리정연한 언변술을 발휘해 실장 자리는 항상 그의 것으로 준비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그는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 시절을 우등생, 학급실장, 학생회장 등등의 경력을 덧붙이면서 화려한 학창 시절을 향유했습니다. 나도 공부를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에 비하면 언제나 상대적으로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던가, 아마도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학기말 시험에서 기필코 그를 따라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밤마다 그의 집으로 가 그의 방에 불이 꺼져 있는가 켜져 있는가를 반드시 확인하고 돌아오곤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갔을 때 그의 방에 불이 꺼져 있으면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와 새벽녘까지 공부하다 잠이 들 수 있었지만, 그의 방에 불이 켜져 있을 때는 그날 밤을 꼬박 새우면서 두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학기말 고사가 실시되던 날,나는 시험지 위에다 붉은 코피를 홀리며 시험을 치렀지만, 그러나 결과는 어이없게도 참담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일등자리를 사수하고 있었고, 나는 그가 사수하는 일등 고지를 끝끝내 탈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듣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단면처럼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당사자인 나로서는 성장기를 온통 지배하고있던 일종의 고통인 셈이었습니다. 결국 서로 다른 대학을 가게 됨으로써 그와 헤어지게 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손상당한 자아를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울에서도 가끔씩 그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양태로그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느새 운동권 학생이 되어있었고, 만날 때마다 하는 얘기가 역사, 양심, 독재, 저함, 정의 따위로 일관되어서, 적어도 그런 방면으로 전혀 눈뜨지 못하고 있던 나를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괴롭혀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괴로웠던 것은, 내가 운동권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데 있었다기보다는, 웬지 이제는 영원히 친구를 추월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래서 가끔씩이나마 그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와도 나는 그를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영원히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었는지도 모릅니다. 추월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인간을 만나야 된다는 게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는 고스란히 정신적인 형벌이거나 고문쯤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를 만나지 않은 지가 어느덧 일년이 가까워지고 있던 그날, 느닷없는 침략처럼 그가 내 아파트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날 나를 찾아온 오학의 뒤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오학의 애인이거나 여자 친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비교적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서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었지만, 그 두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게 꺼칠했고, 그 행색 또한 비할데 없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쉽게 말해 도망자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오학의 손에는 낡은 보스턴백이 들려 있었고, 여자는 그 흔한 핸드백이나 솔더백도 지니고 있질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빨아 입지 않은 듯한 두 사람의 청바지와 구겨진 남방, 단정하게 손질되지 못한 헝클어진 머리와 때꾼하게 가라앉은 두 사람의 눈빛을 보면서, 나는 무슨일인가가 이들에게 분명히 생겨났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즉시는 그런 걸 물어볼 수 없어서 오랜만이다, 식사는 했느냐, 등등의 형식적인 얘기만 주고받다가, 초조한 안색으로 오학이 소주를 마실 수 없겠느냐고 해서 중국집에다 전화를 걸어 식사와 함께 소주를 시켰습니다. 잡채밥과 소주가 날라져오자 그들은 우선 식사부터 허겁지겁 해치웠는데, 그러고 나서는 미처 소주를 나누어 마실 기회도 없이 순식간에 엄습해 오는 식곤증을 못 견디겠는지 잠 좀 자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7평 반짜리 아파트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그들을 내가 사용하는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들이 내 방으로 들어가 잠을 이루는 동안, 나는 밖으로 나와 그들을 위한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을 돌아다녔습니다. 나야 뭐 평상시에는 빵이나 야채, 커피, 우유 따위를 주식으로 상는 형편이었지만,웬지 그들에게는 그런 걸 대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고기를 비롯한 몇 가지 부대 반찬거리를 사가지고 돌아와 그들이 잠을 이루는 동안 나는 저녁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식사 준비가 완료된 뒤에도 그들은 깨어나지 않았습니다.그들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밤 여덟 시가 지나서였습니다. 셋이 함께 저녁을 먹은 뒤에, 그제서야 나는 오학으로부터 저간의 사정얘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막연하게나마 예상하고 있던 대로,그는 지명수배를 받고 도피생활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온 여자는 지명수배는 받지 않았지만 같은 조직의 일원으로서, 그들은 얼마 전부터 조직 내에서도 공개적인 교제를 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는데, 그녀 집안의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자신의 도피생활에 그녀가 함께 동행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날밤 늦도록까지 암울한 시국과 막막한 현실, 빛날 거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곤핍한 청춘에 관해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었습니다. 웬지모를 부끄러움과 야릇한 열등감이 또다시 내 자신을 사로잡아서 참으로 견뎌내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날밤 내가 오학에게 건넨 말이라곤 고작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냐는 물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학은 현제로서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으니 계획이란 것 또한 있을수가 있겠느냐고 막연하게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우리 세 사람은 7평 반의 협소한 공간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오학과 여자가 안방을 차지하고 내가 마루를 차지한 채 상당히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을 우리는 보냈던 것입니다.그렇게 이틀이 지난 뒤, 오학은 내게 엉뚱한 부탁을 하면서 자신의보스턴백을 집어들었습니다. 그의 부탁은 자신이 데려온 여자를 이 아파트에서 당분간 머물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여자에게도 이미 얘기를 한 모양, 오학이 내게 그 말을 건넬 때 여자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부탁이었저만, 어려운 처지에 빠진 친구의 부탁이었으니 나로서는 좋다 싫다 의사를 개진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당분간이 언제까지냐고 묻고 싶었지만, 숨어다니는 그에게 그의 말처럼 일정한 계획이란 게 있을 리 없었으니, 결국은 그런 궁금증마저도 나는 입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학은 떠났고, 그 7평 반짜리 공간에 이제는 오학의 여자와 나만이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와 나와의 동거 - 문자 그대로 한 집에 같이 거주한다는 뜻으로서의 그것 - 는 애초부터 황당무계하거나 터무니없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굴을 눈에 익힌 지 이틀밖에 안 된 여자와 갑작스럽게 동거를 하게 됐다는 것. 그건 여러가지 의미에서 이미 회피할 수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가 그것은 첨예한 신경전이었고, 대립 국면이었고, 그리고 태풍 전야의 숨막히는 정적이었습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여서, 화장실을 갈 때가 아니면 그녀는 방에서 나오질 않았고, 나도 또한 이전까지 자유롭게 활동하던 공간에서 극심한 제약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식사하시죠, 잠깐 나갔다 올께요, 무더운 날씨로군요, 담배 있나요? 머리빗이 어디 있죠? -- 그녀와 내가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란 고작 그런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런 하찮고 건성적인 대화 외에 달리 더 무엇을 주고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함은 더욱 첨예한 상태로 홀러갔습니다. 날씨는 점점 더 무더워져 갔고, 무엇에 대해서인지도 모를 막막한 답답함 때문에 나는 더욱더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금방이라도 숨통이 터져버릴 것처럼 답답해서 밖으로 나와 나는 세 병의 소주를 사가지고 들어와 혼자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마룻바닥에 앉아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 여자가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같이 마셔도 되겠느냐고 내게 물었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해질 무렵이었을 겁니다. 그녀의 요구를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그녀도 나와 하등 다를 바없이 답답하고 막막하고 숨막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게라는 판단을 아주 순간적으로 나는 했던 것이죠. 결국 그녀와 난 마지막 잔광이 서편 창유리 위에서 금빛으로 어른거리던 저물녘부터 마주앉아, 그 세 병의 소주를 모조리 비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취기가 오를 만큼 올랐을 때, 그녀와 나는 이런 종류의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공간에 머문다는 것, 그것은 어차피 첨예한 공방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첨예한 신경전은 일종의 정신적 고문이며 가혹행위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다, 아하 당신도 결국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게 나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될 수 있다...... 뭐 그런 따위의 얘기 말입니다.그런 얘기를 주고받던 어느 순간인가 여자가 비시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 돌아오는 그녀의 손에 다시 두 병의 소주가 들려 있는 걸 나는 보았습니다. 거기서부터 내 기억은 상당히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두 병의 소주를 마시는 동안, 그녀와 내가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뭐가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새벽에 심한 갈증 때문에 눈을 떴을 때...... 여자와 함께 방안에 누워 있는 내 자신을 나는 발견했습니다. 둘 다 옷을 벗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어떤 종류로든 행위에 대한 기억이 내 자신에게는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열정이나 쾌락의 흔적도 남겨져 있질 않았지만...... 그러나 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알 수 없는 심리적 편안함은 그녀와 내가 이제 더이상 첨예한 신경전, 대립 국면, 태풍 전야와 같은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데서 생겨나는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나를 한심스런 인간으로 여길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와 내가 그 지경이 되게된 건 결국...... 결국 그런 숨막히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 그리고 그런 상태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구...... 그것이 설령은 동물적 본능이었다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것 때문에 ...... 결국은 일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의 상황에 관해 말하자면, 솔직히 말씀드려 그 뒤에는 걷잡을 수 없는 파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나게 잦은 순간 술을 마시게 되었고, 취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도대체가 심리적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대립상태가 훨씬 더 나았다는 걸 그제서아 깨달았지만, 그러나 다시 한번 얘기하건대 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틈날 때마다 술을 마시면서, 그 술로 인해 고통이 어느 정도 마비되면...... 그렇게 되면 우리는 허겁지겁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애무하듯이...... 그렇게 매몰되거나 함몰된 시간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게 동물적 본능에서 비롯되는 순간적 쾌락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매몰이었다는 것입니다. 불안감이 엄습해 올 때마다, 서로의 육체를 광적으로 탐했던 건...... 결국 일종의 도피인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나 사이에는 이미 묵계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탐하는 그 시간에도 나의 머리 속에서는 도망다니는 친구의 초췌한 모습이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고, 심지어는 창을 비집고 밀려드는 따가운 땡볕이 내 벗겨진 등판을 찔러대는 것같다는 극에 달한 신경의 민감까지도 나는 느껴야 했습니다. 도피하고자 했지만 끝끝내 도피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절감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힘겨운 형벌의 시간을 그녀와 나는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를 탐하는 그것 자체가 이미 형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엉뚱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편의 흑백영화에 관한 얘기였는데, 나는 처음에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 얘기를 내게 하는지, 그리고 그 얘기를 하면서 그녀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녀가 주절주절 내뱉는 그 얘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죠. 그녀의 얘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오래된 한 편의 흑백영화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영화였죠. 뜨거운 태양과 드넓은 바다, 사랑과 중오, 그리고 배반과 애증으로 얼룩진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 속에는 두 사람의 친구가 등장합니다. 한 친구는 가난했고 또다른 한 친구는 아주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친구는 항상 일확천금을 꿈꾸고 있었지만 그게 실현될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잣집 아들인 친구에게 학창시절부터 심한 열등감을 느껴왔을 뿐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복수심 때문에 내면적으로 몹시 시달리게 됩니다. 부잣집 아들에게는 아름다운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난한 청년을 무시한 나머지, 그 청년이 보는 앞에서 자기 약혼녀와 섹스를 하는가 하면 그 약혼녀 앞에서 가난한 청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기가 예사였습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청년은 무서운 복수심으로 두 눈이 항상 이글거리게 됩니다. 결국, 부잣집 아들의 요트 위에서 가난한 청년은 살인을 하게 됩니다.자기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인 그 청년은 친구의 시신을 우의에 싸고 와이어에 묶어 바다 속에 처넣게 됩니다. 그리고는 육지로 돌아와 죽은 친구의 신분증을 위조하고 그의 사인까지 위조해 수표를 끊고 그의 목소리까지 흉내내면서 그의 행세를 하고 다닙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가난한 청년은 죽은 친구가 쓴 것처럼 필체를 위조한 편지를 써서 죽은 친구의 약혼녀에게 보내게 되죠. 헤어지자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습니다. 친구를 죽였으므로 일방적인 결별선언을 위장할 수밖에 없었던 거겠죠. 결국 약혼녀는 그 위조된 편지를 받고 비탄에 젖게 되는데, 그때 이 가난한 청년이 그녀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슬픔에 젖어있는 그녀에게 접근해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를 설득해 두 사람은 결국 결혼을 약속하게 됩니다. 이제 그는 오랫동안 자기 가슴에 누적되어 온 열등감, 증오심, 복수심 따위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게 되죠. 그래서 요트 수리를 부탁해 놓고는 해변의 태양 아래 앉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일광욕을 즐기게 됩니다. 그런데 수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요트를 끌어올리는 순간, 스크류에 감긴 친구의 시체가 딸려 나옵니다. 와이어에 묶어서 바다 속에 처넣었던 친구의 시신이 스크류에 감긴 채 그동안 계속 따라다녔다는 걸 이 청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거죠. 일이 그렇게 돌아가는 동안에도 이 가난한 청년은 아무것도 모른채 여전히 일광욕을 즐깁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찾는 전화가 왔다는 소리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진화가 온 게 아니라 경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세상 가득한 태양을 행복한 표정으로 음미하면서, 그렇게 자리에서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거죠.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납니다. 아주 오래된 혹백영화였죠.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자꾸 그 영화 생각이 나는지 ...... 그리고 거기 나오는 그 여자...... 약혼자가 죽은 줄도 모르고 그 가난한 청년과 침대에 누워 있던 그 여자의 표정과 눈빛이 왜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 건지 ...... 정말이지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왜 이러는 건지 ....... 그 여자가 말하는 그 오래된 혹백영화라는 게 '태양은 가득히'라는 걸 나는 그녀의 얘기 도중에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영화의 내용을 울면서 내게 들려주는 이유를, 나는 그녀가 어떤 도덕적인 죄책감이나 윤리적인 질책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그녀가 말한 그 영화의 스토리대로 대입을 시켜 보면, 결국 내 자신은 가난한 청년이고 그녀는 열등감에 대한 보복심리로 내가 빼앗은 친구의 약혼녀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미칠 것 같아서 정신없이 소주잔을 거푸거푸 비워냈습니다. 결국 그녀와 난 그런 마지막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었던 겁니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사물에 대한 판단력은 더욱더 극명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지금도 의아해 하고 있는 것은...,..그 당시 그녀와 나 사이에 과연 사랑의 감정이란 게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녀를 진실로 사랑했었다거나 혹은 그녀가 나에 대해 그런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마음이 훨씬 더 편안해질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 기분을, 그런 기분을 혹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그는 한동안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듣는 나로서도 멍청해질 수밖에 없는 얘기였으니, 당사자로서야 오죽하랴 싶어서 그 한동안의 정돈(停頓) 상태를 나는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 마냥 시간을 끌 수만은 없는 처지여서, 이윽고 나는 그에게 원래의 흐름을 되찾아 얘기를 다시 계속해보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니까 바로 어젯밤, 아파트 단지 안의 어린이놀이터에서 만난 그녀와 그가 인도철교를 건너 여관으로 들어간 부분, 다시 말해 여관으로 들어간 뒤에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나 오고간 대화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가능한 한 세밀하게 얘기를 해보라는 주문을 나는 그에게 했던 것이다. 지나간 과거야 어찌되었건,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나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가 내게 들려준 그 부분에 관한 얘기는 상당히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들이 옷을 입은 채로 어둠 속에 누워서 주고받은 얘기란 고작 이런 정도였다는 것이었다. 내일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고 그는 말했다. 가야 한다는 게 의무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하게 될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는 거겠지. 그게 여자에게 건넨 자신의 말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선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겠어요. 그냥...... 아침이 되면 결정하고 싶어요. 그래 ...... 그렇게 해. 아침이 되면 생각이 또 달라져 있을 테니까....... 그날밤 그 여관방에 누워서 주고받은 대화의 전부가 고작 그것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은 그때까지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인가 잠에 빠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아침 아홉 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여관을 빠져나오면서는 이미 어젯밤의 망설임과는 달리 병원으로 가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그녀와 자신은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물론 병원으로 가는 동안의 불안감에 관해 말하자면, 자신은 거의 체념적인 상태가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비겁해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는 걸 그는 알아달라고 했다. 이윽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와 자신은 오학의 가족을 위시하여 그의 운동권 친구가 이미 많이 와 있는 걸 보았고, 그것 때문에 자신들은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른 채 초조하게 서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오학의 친구들 중에는 자신의 7평 반짜리 아파트로 찾아와 자신과 여자가 그 공간에 함께 기거하는 걸 본 사람들도 적잖이 섞여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 더이상은 도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자신은 분명하게 굳히려고 기를 썼고, 그래서 병원 지하에 있는 시체실에서 오학의 주검이 관으로 옮겨지는 장면도 일부러 따라가 보았다고 했다. 시체실의 철제 캐비닛 안에서 밀려나온 오학의 주검을 보는 순간,자신의 뇌리에서 여자가 얘기하던 그 오래된 혹백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되살아난 까닭을 자신은 지금도 모르겠다는 얘기를 덧붙이면서 그는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수리하기 위해 육지로 이끌어올려진 요트의 스크류에 뒤엉킨 채 따라올라온 그 영화 속의 시체와 오학의 주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유를 자신은 지금도 알 수 없다고 반복하면서, 그는 진저리를 치듯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결국 장의차에 동승해서 화장터로 가고, 그 화장터의 칸유리 너머에서 오학의 관이 거대한 기름보일러의 불기둥 속으로 통째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그 불기둥 속에서 사라지는 건 결국 오학의 주검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것 같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는 끝내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학의 칠순 노모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울부짖고, 술에 취한 화부가 길다란 쇠꼬챙이를 손에 든 채 자신에게 다가와, 여긴 뼛가루 채로 날려보내니까 아무 걱정 말고 소주값이나 좀 달라고 노골적으로 얘기할 때, 그때 그녀와 자신은 그곳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고 그는 어금니를 다져문 채로 말을 짓씹어 뱉았다. 그리고 그 머나먼 산길을 그녀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달려나가면서, 그녀와 자신은 여러번 뒤를 돌아다보았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볼 때마다 세상 가득히 쏟아져내리던 눈부신 햇살, 그 가득한 태양의 빛살을 자신들은 보았고, 그것 때문에 더욱더 미친 듯이 도망쳤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윽고 더이상은 뛸 수도 없을 만큼 지쳐서 땅바닥에 주저앉았을때, 그때에도 태양은 여전히 세상 가득히 쏟아져내리고 있었고, 이 세상 어느 곳으로 도피를 할지라도, 죽기 전까지는 그 햇살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 그녀와 자신은 참으로 비참하게 울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 햇살 속에 그의 죽음이, 그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의미가 아로새겨져, 자신들의 두 눈을 언제든 바로 뜨지 못하게 하리라는 극에 달한 절망감 때문에, 그것 때문에 자신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미친 듯이 울었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산굽이를 돌아 장의차가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였고, 아주 잠시 뒤에는 자신들이 주저앉아 있는 곳에까지 이르렀고, 그리고 그 멈추어진 장의차에서 몇 명의 청년들이 내렀고, 그 청년들에 의해 자신은 곧바로 나에게 인계돼 지금껏 단죄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자신이 내게 할 수 있는 얘기의 전부이며, 그것이 혹은 전부가 아닐지라도 이제 더이상은 참으로 할 말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제 더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막막한 표정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참으로 기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나는 그로부터 전해들은 셈이었다. 절친했던 후배가 지명수배를 받고 도피해 다니다가 어느날 갑자기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탐문을 계속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견되어진 이들 -- 이 어처구니없는 남녀의 파륜(破倫)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옳단 말인가. 오학의 죽음과 이들의 관계가 물론 직접적으로 연계된 건 아니라는 걸 나는 확인한 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명백한 확인보다 더욱더 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이 알 수 없는 기류에 대해 나는 참으로 난감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학은 죽는 순간까지도 이들의 관계를 전혀 몰랐을 것이고, 그럼으로 해서 죽는 순간에도 이런 종류의 파륜에서 비롯되는 배반감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은 자야 그렇게 모르고 죽은 게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건 바로 이들 -- 이 산 자들이 살아 있음으로 해서 겪게 될 극에 달한 정신적 고통에 관한 예견 때문에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고통 속에서 그들은 허덕거려야 한단 말인가. 더할 나위 없는 위기의 시대를 살면서, 도대체 나는 그들의 고뇌에 합당하거나 적확한 해석의 말을 찾아낼 수 없어서 더욱더 눈앞이 캄캄해질 뿐이었다. 이 곤욕스런 시대가 만들어낸 무수한 도피생활자들의 이면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비사까지 내재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정말이지 나는 꿈에서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설령은 이런 종류의 얘기가 아닐지라도, 도피하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키 어려운 뼈저린 사연들이, 어느 시대의 하늘 아래에서나 지나간 옛얘기로 그들 스스로에 의해 반추될 수 있을까...... 그의 얘기를 들었다는 게 차라리 한 편의 흑백영화를 본 것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서서히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여전히 처량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가 나의 기분을 상당히 씁쓸하게 했지만, 그러나 그를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만은 끝끝내 들지 않았다. 위로는 커녕, 그 어두운 카페의 구석자리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그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은 차라리 잔인한 비웃음에 가까운 것이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훌륭한 한 편의 혹백영화로구만. 그러나 두 번 다시는 보고싶지 않은 영화라는 것도 아울러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리고 기회가 닿거든 여자에게 전해 주라구. 그녀가 출연하는 어떤 종류의 영화도 이제 더이상 세상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섰을 때 느닷없이 밀려드는 폭양의 하오.그 눈부신 세상의 어느 곳에선가 갑자기'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의 주제가가 들려오는 것 같아서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득 걸음을 멈춘 채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그러나 그런 오래된 혹백영화의 주제가가 흘러나올 만한 곳은 그 주변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작품 중에 인용된 '태양은 가득히 Plein S oleil'라는 영화는 영국의 여류작가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이라는 소설을 르네 클레망 감독이 1959년에 영화화한 것으로, 원래는 흑백영화가 아니라 칼라영화라는 걸 밝혀둔다. 6. 그가 정신분열자라는 기록에 관하여 ㅅ여대 앞에서 <한림서점>을 경영하고 있는 연경목(燕慶睦) 씨에게 뜻하지 않은 예비군 훈련봉지서가 전해진 건 그날 오후 2시가 훨씬 더 지나고 나서였다. 짜장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나서 새로 창간된 시사잡지 한 권을 뒤적이던 참이었는데, 그때 서점 출입문이 열리면서 머리를 짧게 깎은 사복차림의 방위병이 느닷없는 침략처럼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사복차림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방위병일 게라는 판단을 곧바로 연경목 씨가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그 머리 짧은 인물이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서 대뜸 '동대(洞隊)에서 왔는데요'라는 단서를 게시한 때문이었다. "연경목 씨가 누구시죠?"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어 왔는가 싶어 뜸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린 연경목 씨에게 방위병은 대뜸 그렇게 물었다. 그러고는 곧이어 자신의 손에 들린 16절지 반만한 인쇄물을 다시 한번 확인하듯이 빠르게 일별했다. "내가 연경목인데 ?" 사뭇 떨떠름한 표정으로 연경목 씨는 방위 병을 올려다보았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몸에 푸른 제복을 걸쳐본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연경목 씨 또한 이런 종류의 방문에 대해서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심기가 불편해지곤 했던 것이다. "훈련이 나왔습니다" 상당히 무표정하게 말하면서 방위병은 자신의 손에 들린 훈련통지서인 듯한 인쇄물을 절취선에 맞춰 잘라나가기 시작했다. "훈련 ?"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연경목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방위병은 절취된 상단 부분을 무표정하게 테이블 위에다 내려놓았다. "도장 좀 주세요" 통지서 하단 부분의 수령 확인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방위병은 연경목 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금년도 훈련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받았는데 무슨 훈련이 또 나왔단 말야?" 연경목 씨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일그러졌다. "보충교육입니다" 상대방의 감정 따위가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 방위병은 여전히 도장을 달라는 자세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보충교육? 아니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뭘 보충하란 말야?" 자신의 감정을 가까스로 억제하면서 그는 방위병을 노려보았다. "궁금하면 동대로 가서 확인해 보세요. 전 그냥 전달만 할 뿐입니다" 방위병은 사뭇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손을 내민 채 도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이거 도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아니 도대체 뭘 보충하라는 거야, 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담배를 꺼내 물면서 그는 여전히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장 안 주실 거예요?"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방위병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보충교육의 사유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도장을 찍어주나?"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방위병에게 도장을 건네줄 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럼 좋습니다. 이 수령증은 동대에다 그대로 갖다놓을 테니 오늘중으로 가셔서 확인해 보고 도장 찍으세요. 사유도 없는데 훈련통지서가 나왔겠습니까?" 통지서를 전하면서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시달려봤다는듯이 그는 더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이래서 예비군이 아니라 <야비군>이란 얘길 듣지 ...... 그 등판이 마치 그런 얘기를 묵시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위병이 돌아가고 난 한참 뒤, 그러니까 피우던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야 연경목 씨는 비로소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테이블 위에 놓여진 훈련통저서를 집어들었다. 무엇이 어찌되었건 일단은 통지된 훈련의 내용이 무엇이며,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해 볼 요량에서였다.물론 그 통보된 훈련 자체가 정상적이라는 생각을 그는 결코 하지 않았다. 착오가 아니라면 법적으로 정해진 훈련시간 이외의 것을 부당하게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위박(威迫)-- 그리하여 그 부당성이 지적되고 또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일종의 그릇된 행정사항으로 그는 그 통지서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훈련 소집 통지서>라는 인쇄물의 상단에는 연경목 씨의 주소를 위시하여 <제1전투군>이라는 소속, 그리고 계급, 군번, 성명, 생년월일 등이 기재돼 있었고, <향토예비군 설치법 제6조의 2항 및 동 시행령 제13조에 의거 아래와 같이 소집함>이라는 인쇄문구 하단에 문제의 교육내용이 다음과 같이 명시돼 있었다. (7)소집기간 - 1989년 12월 7일부터 12월 13일까지 6일간 (8)집합시간 - 매일 06:30시까지 (9)집합장소 - 동사무소 앞 (10)훈련장 - O O 교장 (11)교육과목- 이월동미보충/시미 그리고 그 통지서의 뒷면에는 훈련복장, 주민등록증, 병역수첩, 중식등을 지참하라는 지시사항과 유의사항 一 예컨대 훈련과 관련된 위법사항이 발생할 경우 <향토예비군 설치법 제15조 10항에 의거 3월 이하의 징역 또는 2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제15조 5항에 의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만원 이하의 벌금형>, <제15조 8항에 의거 6월 이하의 징역 또는 20만원 이하의 벌금형> 등등이 가해지게 된다고 명시된 살벌한 문구들-- 이 인쇄돼 있었다. 훈련기간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6일씩이나 된다는 사실도 기가 막혔지만, 무엇보다도 연경목 씨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항목은 그가 받아야 할 교육과목, 다시 말해 그가 무엇 때문에 보충교육을 받게 되었는가를 명시하고 있는 제11항의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 이월동미보충 / 시미 그게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그로서는 그게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교육 사유에 대한 짧지 않은 내용을 한껏 축약해 놓은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머리를 갸웃거려봐도 그게 쉽사리 해득되질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무슨 신흥종교의 염불소리 같은 <이월동미보충시미>를 여러번 반복해서 되뇌어보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릎을 후려칠 만큼 시원스럽게 어떤 해답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어서 그는 아주 조만간에 이를 데 없이 난감한 기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월동미보충시미>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난구(難句)란 말인가. <나무아미타불>보다 더욱더 난감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얼핏 <국어사전을 한번 찾아볼까?> 하다가 이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깨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국어사전의 어느 구석에 그런 괴이쩍은 말의 뜻이 풀어헤쳐져 있을 것인가! 오래지 않아 그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의 발을 자기 대신 서점에 묶어두고 그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른 때문이었다. 보충교육을 받아야할 사유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것에 편승해서 슬그머니 치밀어오르는 어떤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그는 더이상 서점에 죽치고 앉아 용을 쓰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역생활 3년에 예비군생활 10년까지 아우른다면, 그야말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넉넉치 못한 자들의 민생고는 고스란히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짓눌리고 또 눌릴 터이니, 어찌 이런 느닷없는 침략 앞에서 호방하게 껄껄거릴 수 있으랴. 언젠가 예비군 훈련장에서 어떤 택시기사가 씩씩거리며 내뱉던 얘기를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니미랄,나는 대한민국 정치 돌아가는 꼬락서니하고 예비군 훈련통지서 나올 때마다 정말이지 이민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바쁜 세상에 이건 뭐 하루 빠지면 보충교육 따블이요, 그거 또 빠지면 고발당하고 벌금 물고 또 따따블로 받아야 하니, 차라리 빵간에 들어가서 비똥 흔들고 쓰리 고에 피박 씌우는 꿈이나 꾸는 게 낫지, 안 그래 ?" "아니 어딜 또 가시려구요? 오늘 김장하는 날이란 거 뻔히 아시면서 그러네. 아직 어머님 점심도 못 차려 드렸어요" 잠깐만 나와서 서점을 봐달라는 연경목 씨의 전화를 받은 아내는 사뭇 짜증스런 대꾸를 했다. "잠깐만 나왔다 가. 동사무소에 잠깐 갔다오려고 그래" "동사무소는 왜요?" 의아하다는 듯이 아내는 반문했다. "이유도 없이 예비군 훈련이 나왔단 말야. 그것도 엿새씩이나 !" 연경목 씨는 수하기를 손에 든 채 다시 한 대의 담배를 꺼내 들면서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였다. "정말요? 아니 지난 봄에 훈련 다 받았잖아요? 그리고 구월에도 하루 갔었구. 그때 금년치는 다 끝났다고 하셨었잖아요?" 아내는 더욱더 의아하다는 듯이 말끝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니까 빨리 와. 잔말 말고" 담뱃불을 붙이면서 그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높여 아내의 말문을 막았다. "알았어요. 어머님 식사만 차려드리고 금방 갈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는 문득 잊고 있던 생각 하나를 되살려냈다. 이틀 전에 어머니의 허리에다 맬 벨트 하나를 사다 드리려 했었는데 그걸 그만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허리가 더 아파진다는 노모의 얘기를 듣고 그 생각을 했던 것인데, 그걸 왜 잊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석침이 부착돼서 신경통에 좋다는 허리 벨트와 쑥찜기 하나를 사다 드리겠다고 해놓고선 무심도 하지,노모가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분이 더욱더 말이 아닌 형국으로 참담해져 갔다. 이래저래 오늘은 재수 옴붙은 날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한숨 섞인 담배연기를 한껏길게 내뿜었다. 금년 봄에 그의 형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내건 교환조건이 바로 어머님 부양에 관한 문제였는데, 둘째인 연경목 씨가 어머님 부양을 맡겠다는 조건으로 그의 형은 자신이 살던 재개발지구의 전셋집과 서점을 그 대가로 그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미국에 이민 가서 슈퍼마켓을 꽤 크게 운영하는 처가집을 오래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형으로서야 그 정도면 족하지 않겠냐는 표정을 그에게 지어 보였었는데,사실 연경목 씨로서도 그걸 마다해아 할 형편이 그때는 아니었었다. 별정직 공무원으로 지방에 내려가 5년 정도 생활하다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휴직을 하고 기어이는 사표까지 내던지고 들어앉아 막막한 생활을 이끌어나가던 처지였으니, 가타부타 내색을 할 만한 형편이 그때는 아니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여건으로 보아 모든 것이 거의 적시에 맞아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어머님 부양하는 일을 지독스럽게도 싫어하던 형수가 기어이는 형을 구워삶아서 미국행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을 때, 그가 때마침 대책 없는 실직자가 되어 막막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으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차피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맞아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며느리와의 삶을 어머니는 오히려 더 좋아하는 눈치였고, 연경목 씨 또한 그게 마음에 편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서점이라는 업종에 우선 마음이 끌렸다. 그것으로 장사를 잘해 보겠다는 이재에 밝은 영리적 반색이 아니라, 단지 <책이 있는 곳에서의 생활>이라는 이유 한 가지 때문이었다. 끔찍스러웠던 지난 세월 동안의 공무원 생활을 돌이켜본다면, 책이 있는 곳에서의 삶은 그에게 생활적인 자족감을 맛보게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실 그렇게 되어갔다. 삶에 큰 목표를 세움으로써 허덕거리며 사는 것보다, 잘살지는 못할망정 옳게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구가하는 일이 그에게는 거의 체질적인 것처럼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책을 팔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 생계와 자기생활이 동시에 보장되는 그 일에 대해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다. 나이 서른셋이 된 지금, 그는 지나간 젊은날처럼 말라비틀어져가는 시대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과 무력감 때문에 잔흑스러우리만큼 자신을 학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시대에 대한 전면적인 방관으로 자신을 방기하지도 않는 담담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관망하는 삶을 살고 있었고, 그것이 또한 한 개인이 역사 속에서 숙명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나간 젊은날 그토록 자신을 괴롭혀대던 부질없는 열정 -- 그것의 실체를 그는 이제 요연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의미 있는 주체로서 한 시대에 전면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터무니없는 죄책감과 좌절감 때묻에 그토록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또한 방황했었다는 것 -- 그걸 그는 이제 분명하게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완벽하게 불가능한 열정이라는 것도 그는 또한 깨우치고 있었다. 망가져가는 시대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있는 역동적인 힘의 소유자 -- 혁명가나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 그는 가끔씩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다보면서 씁쓰레한 미소를 짓곤 했다. 6월항쟁이 일어나던 그해 여름에 휴직을 하고, 그 일년 뒤에 기어이는 사표까지 내던지게 만들었던 그 광적인 열정이 스러지면서 그는 어느날 갑자기 서점주인이 되어버렸고, 그리고 그 과란만장했던 80년대는 새롭세 눈을 뜨는 어둠에 의해 총체화된 구태(舊態)의 일종으로 고스란히 자리를 물리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볼 때마다 골 깊은 허무가 손을 흔드는 적막한 산마루, 지금은 핏빛 노을이 지천으로 타오르는 허허로운 송구의 계절일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다녀오셔야 돼요. 아직 김장 반도 못 담갔으니까요.아셨죠?" 서점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서면서 그의 아내는 대뜸 그 말부터 했다. 금방 돌아갈 요량으로, 일을 하던 차림새 그대로 그녀는 나타났고, 나타나서는 보란 듯이 팔을 들어올려 자신의 추레한 행색을 남편의 면전에서 있는 대로 드러내보였다. "오는 길에 어머니 허리에다 맬 자석벨트하고 쑥찜기 사올 거야.그래봤자 한 시간도 안 걸릴 테니까 조바심 치지 말어" 연경목 씨는 벗어두었던 잠바를 다시 찾아 입으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근데 엿새씩이나 나왔다는 그 훈련은 집에서 다니는 거예요, 아니면 봄처럼 내내 집에 못 오는 거예요?" 연경목 씨가 마악 서점 출입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서려는 참에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아내는 물었다. 지난 봄의 동원훈련 때처럼 내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훈련이 아니냐는 우려감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건네는 물음인 것 같았다. "모르겠어. 나와 있기는 출퇴근인 것 같은데, 이런 훈련이 도대체 왜 나왔는지를 모르겠다구"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연경목 씨는 아내를 돌아다보았다. "에이그, 호적은 왜 잘못돼 가지고 뒤늦은 고생이람......" 코를 잔뜩 찡그려 콧살을 만들어 보이며 아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호적 잘못된 만큼 더 오래 살겠지 뭐" 그도 또한 혼잣말인 것처럼 중얼거리며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섰다. 실제 나이 서른셋의 그가 호적 나이 서른으로 되어 있음을 두고 아주 가끔씩 판에 박은 듯이 아내와 주고받는 새로울 게 없는 농지거리의 일종이었다. 그 줄어든 나이 때문에 금년에야 가까스로 동원 예비군을 마감할 수 있었던 그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훈련통지서가 또다시 날아들었으니 그 심기가 불편하다 못해 아예 배배 꼬이고 뒤틀리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그는 학교 정문으로 연결된 포장도로의 반대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80년대가 막을 내리는 ll월 말의 늦은 하오였다. 학교정문 쪽으로 몇 대의 택시들이 빠르게 달려가는 게 보였고, 되돌아나오는 택시를 잡기 위해 길 옆에 서서 손을 흔들어대는 몇몇 여대생들이 또한 눈에 띄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난 뒤라서인지 학교 주변은 대체로 썰렁한 편이었다. 삼거리 부근에서 국도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가,그 길을 다시 버리고 좌측의 주점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그곳도 역시 철지난 바닷가처럼 썰렁하다는 생각을 했다. 순대집, 감자탕집, 분식집, 돼지갈비집, 학사주점 따위들이 성냥갑처럼 오밀조밀하게 밀집돼 있는 그 골목이 썰렁하다면, 이미 대학은 겨울잠을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었다. 그 골목으로 곧게 따라올라가면서 나타나는 재개발지구의 산동네들이 늦은 하오의 잔광을 받으며 해묵은 납작보리 같은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지겨우리만큼 오래된 가난의 자태,정겨움과 역겨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그 산동네가 시작되는 초입에 이 일대의 가난을 송두리째 책임지겠다는 듯한 자태로 동사무소는 서 있었는데, 볼품없기 그지없는 동네에 비해 그 삼층짜리 건물은 지나치게 화려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가난을 책임지겠다는 게 아니라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연상케 하는 풍경을 바로 그 빨간 벽돌건물 하나가 당당하게 조성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동사무소 건물 2층에 있는 예비군 중대본부로 들어서자 양쪽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 앉아 있던 방위병이 한쪽 귀의 이어폰만 빼내면서 터무니없이 커다랗게 소릴 질렀다. 할 일 없이 앉아서 만화책을 보거나 귓구멍을 후비거나 아예 엎드려서 오수를 즐기고 있던 주변의 몇몇 방위병들이 그 커다란 소리에 일제히 고개를 들고 연경목 씨를 쳐다보았다. "훈련 확인 좀 하러 왔는데?" 그제서야 그는 이어폰을 꽂고 있던 방위병의 눈 밑으로 칼이 스쳐간듯한 붉은 상흔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면서 얼핏 눈살을 찌푸릴 때 그 붉은 사선이 지렁이처럼 꿈틀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훈련요?" 한쪽 귀의 이어폰을 마저 뽑아내면서 방위병은 의자를 뒤로 밀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 키가 연경목 씨에 비해 머리 하나만큼은 더크게 보였다. "글쎄, 보충교육이라곤 하는데, 무슨 보충교육인지를 모르겠어. 금년치 훈련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 받았는데......"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훈련통지서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그는 말끝을 흐렸다. "빠진 게 있으니까 나갔겠죠" 바지주머니에다 손을 찌른 채 방위병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 사월에 동원훈련 다 받고 지난 구월에 소집점검까지 받았는데 ?" 연경목 씨는 방위병의 건성적인 태도가 사뭇 불쾌하게 여겨져서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말을 뱉았다. "통지서 가겨왔어요?"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걸 자꾸만 확인시켜 달라는 귀찮은 존재---방위병은 연경목 씨를 그런 사람으로 상대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교육 내용이라고 적어놓은 것도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질 모르겠어" 소집통지서를 방위병에게 건네며 그는 비아냥거리듯이 중얼거렸다. "이월동미로구만" 소집통지서를 보자마자 방위병은 대뜸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는 우선 <이월동미보충시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 뜻이나 좀 알자는 표정으로 방위병을 쳐다보았다. "내 참, 이 아저씨 예비군생활 헛하셨구만? 아니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단 말예요? 자 보세요. 동원훈련을 미필했기 때문에 시간이 미달돼서 이월 보충교육을 시킨다아-- 아시겠어요?" 연경목 씨의 무지를 한껏 비웃고 싶다는 듯이 방위병은 <동미><시미> <이월> <보충>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떠들어댔다. "아니 내가 언제 동원을 빠졌다는 거야?" 연경목 씨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지난 오년 동안 한 번도 빠진 적 없어요?" 질세라 연경목 씨를 노려보는 방위병의 입 언저리가 묘한 형상으로 일그러졌다. "야 이 새꺄, 카드 확인해서 보여주면 되잖아! 뭘 그렇게 시시콜콜하게 떠들고 있어 ?" 연경목 씨와 방위병이 그런 식으로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그 뒤쪽에 앉아서 귓구멍을 후비고 있던 인상이 고약하게 생긴 방위병 하나가 느닷없이 커다랗게 소리를 내질렀다. 보아하니 실내에 앉아 있는 방위병 중 가장 고참인 모양이었다. "알았어요] 연경목 씨와 얘기하던 방위병이 갑자기 풀죽은 목소리로 등을 돌려 사무실 우측 벽면 쪽에 세워놓은 서너 개의 철제 캐비닛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보아하니 병적기록카드를 찾으러 가는 모양이었다. 방위병이 철제 캐비닛을 열고 이것저것 몇 가지의 파일을 들추면서 연명부를 확인한 뒤에, 이윽고 노란 카드 한 장을 뽑아 들고 그 앞면과 뒷면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연경목 씨가 보기에 사뭇 의아스러웠던 것은, 방위병이 그 카드의 뒷면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얼씨구?" 하면서 연경목 씨의 얼굴을 재빨리 쳐다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등을 돌려 조금 전에 카드를 확인시켜 주라고 소리를 지른 고참 방위병에게 그 뒷면을 보여주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어느 특정부분인가를 또다시 손가락으로 짚어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더 이상한 것은, 그 고참 방위병 또한 그 부분을 들여다보다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연경목 씨의 얼굴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내용을 알지 못하는 연경목 씨는 갑작스럽게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카드야말로 입영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던 그날 이후로 십 년 넘게 자신을 따라다닌 끈질긴 꼬리표였고,제복에 관계된 한 개인의 병적사항이 빠짐없이 적혀 있는 우울했던 날들의 기록, 요컨대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황금 같은 청춘기를 무시로 제어당하게 만들던 달갑잖은 옐로우 카드가 아니었던가 ! "동원훈련을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다구요?" 그렇게 말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위병은 마치 연경목 씨가 그런 식으로 항변을 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다가왔다. "보세요, 여기 !" 병적기록카드 뒷면의 한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방위병은 연경목 써의 얼굴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게 87년 훈련 기록란이라구요. 이래두 안 빠졌어요?" 손가락으로 짚은 곳을 미처 확인해 보기도 전에 방위병은 연경목씨의 어리석은 불찰을 질타하듯이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렸다. "......" 방위병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을 들여다보던 연경목 씨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표정만 굳어지기 시작한 게 아니라 온몸 전체가 순식간에 마비돼 버린 듯, 그는 이를 데 없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심신의 평정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87년 교육기록란의 작은 공백들이 느닷없이 커다랗게 확대되면서 그 자신이 그 공백 속으로 고스란히 빨려들어가거나 혹은 갇혀버린 듯한 환각이 그의 내면을 걷잡을 수 없이 휘청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양미간을 한껏 찌푸리면서 시선의 끝을 한가닥으로 모아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오히려 아찔한 현기까지 몰고오는 것 같았다. 몇 가닥의 보랏빛 스탬프 잉크와 아라비아 숫자들이 한데 뒤엉키고 때로는 해체되면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어질머리가 휘몰려왔고, 이윽고는 등줄기와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베어나기 시작했다. 84, 85, 86, 87, 88, 89...... 낭자한 선혈과 처절한 주검과 함성과 격돌과 폭양과 광기의 역사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그의 눈앞을 빠르게 스쳐갔다. 선명한 장면이 아니라 한 데 뒤섞여 총체화된 하나의 색상으로 그는 그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붉은 빛이었다. 피처럼 낭자한 그 빛깔이 바로 그 병적기록부의 87년 교육란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미쳐버린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을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됐습니까, 이제? 이게 바로 <이월동미보충시미>의 사유란 거 아시겠냐구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곧바로 등을 돌려 밖으로 나서는 그에게 방위병은 야비함이 느껴질 정도로 말끝을 배배 꼬면서 제멋대로 비아냥거렸다. 연경목 씨의 완벽한 패배와 자신의 확실한 승리를 그 철딱서니없는 방위병은 그런 식으로 확인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 이상의 얘기를 함부로 내뱉는다 할지라도 반격의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한심스런 무지렁이 -- 방위병은 연경목 씨를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의 연경목 씨에게는 그 어떤 얘기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그 어떤 구체적인 외부의 사물도 정상적으로 보이질 않았다. 낭자한 선혈 같은 붉은 색상 이외에, 그 순간의 그에게 정상적으로 보이거나 느껴지는 게 달리 더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동사무소를 빠져나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며 언덕길을 내려오던 그가, 주점골목의 감자탕집으로 들어가 기갈 들린 사람처럼 한 병의 소주를 순식간에 비워버렸을 때, 시간은 어느덧 하오 다섯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골목의 곳곳에서 어른거리던 몇 줄기의 잔광마저도 초겨울 저녁 무렵의 일몰 속으로 빠르게 잦아들고, 간간이 일렁이는 썰렁한 대기 속에서 이제는 다만 몇 점의 휴지조각들만이 제멋대로 몸을 뒤치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취기가 오르면서 그런 사소한 사물의 움직임이 비로소 연경목 씨의 시선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 듯하던 의식의 혼미가 그제서야 또렷하고 또한 명징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전적으로 술기운에 힘입은 덕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술기운을 빌어서 의식의 안정감을 회복했다는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상태로부터 문제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7년의 교육 기록란이 공백으로 비워져 있었다는 건 사실 아무런 문제도 될 수 없었다. 그 기록란의 공백을 보는 순간 그는 이미 그해의 모든 것 -- 요컨대 그 자신이 동원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받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그해 여름의 모든 주변 상황들 -- 을 한순간에 되살려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아, 그러나 그 공백 옆에 적혀있던 다섯 글자의 붉은 볼펜 글씨를 보는 순간,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때껏 지켜왔던 일체의 자아를 송두리째 망실해 버린 듯한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처음이었고, 그리고 끝이었다. 붉은 볼펜으로 또박또박 기록해둔 그 다섯 글자의 단어 하나야말로 그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추구해 왔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무화시켜 버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대단한 위력으로 그의 사지를 부들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건 제가 선생님께 인간적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역사에 대한 양심이란 게 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처럼 과장된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냥 도저히 이 상태로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할수가 없을 것 같고, 복귀한다고 해봤자 직장생활 자체가 끔찍스런 굴레로 느껴질 것 같아서 이런 결심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절 좀 도와주십시오. 한 일년만 쉬면서 뭔가 제 삶에 대해 제 스스로가 정리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싶습니다" 87년 그해 6월항쟁의 물결이 도처에서 노도처럼 밀려다닐 때, 그는 한 지방도시의 국립의료원 신경정신과 진찰실에 앉아서 젊은 여의사에게 이런 부탁을 하고 있었다. 한 달간의 연수교육을 받던 도중에, 그가 도저히 더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별의별 궁리를 다하던 끝에 찾아낸 묘수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휴직을 해야겠다는 것--- 그것이 설령은 어떤 종류의 불이익을 초래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의사에게 인간적으로 부탁을 한다고 솔직하게 고백을 했던 것인데, 다행스럽게도 의사는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헤아려줄 수 있다는 듯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릇된 역사가 자신의 무관심과 방관에 의해 더욱더 그릇되어지고 있다는 데서 생겨나는 일종의 원죄의식 같은 것인가요?" 젊은 여의사는 안경테를 위로 밀면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건너다보았다.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에 전면적으로 동참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역사가 가능할 수 있게 만든 구성원 중의 하나라는 점을 감안해 보더라도 그런 생각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당신도 이런 시대를 살면서 저렇듯 거대하게 터져오르는 함성을 들으면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 게 아니냐 하는 표정으로 그는 상당히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개인적으로 그럴 만한 어떤 이유가 있는 거 아닌가요? 가령,자신의 삶이 비교적인 차원에서 대단히 부끄럽거나 비겁한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화되게 만드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게 아니냐하는 거죠" 의사의 판단은 확실히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정곡이 여지없이 찔림을 당한 것 같아서 상당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이해를 구하고 부탁을 하는 마당에 그런 얘기를 못할 이유도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곧이어 그는 의사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걸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부정을 못하겠군요. 사실 어떤 방면으로 갈지라도 저의 삶을 당당하지 못하게 만드는 내면의 존재 하나가 저에게는 있습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제 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배가 한 사람 있었는데 ......80년 그해 여름에 지명수배를 받고 쫓겨다니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살하기 바로 전날 만났을 때 그가 내게 했던 그 몇 마디의 얘기가, 사실은 이날 이때까지 나의 삶을 참담하게 시달리게 만든 구체적인 동인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 선배가 했던 얘기가 어떤 것이었죠?" 그가 잠시 얘기를 중단하고 무연한 눈길로 탁자를 내려다보자 의사가 그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그때 그가 했던 얘기는...... 정치에 대한 절망이, 그러니까 80년 그해 봄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그 민주라는 이름의 신기루 뒤에 갑작스럽게 휘몰려온 절망적 상황이, 그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혐오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맛보게 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견딜 수 없는 절망감으로 인해 자신은 거의 모든 힘을 다 상실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살아봤자 구차스런 목숨의 연장 이외에 다른 아무런 의미도 찾아낼 수가 없을 거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끄러운 삶에 대한 예감이 자신을 끝없이 불안하게 만든다는 얘길 하면서 그날 그는 끝내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그날 밤에 목숨을 끊으리라는 생각을 내가 꿈에서도 해볼 수가 없었던 것은, 요컨대 그 무렵의 내가 정치에 대한 한 개인의 절망감이란 게 무엇인지를 전적으로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연경목 씨의 내면에 살면서 자신의 양심과 삶 전체를 끈질기게 괴롭힌다, 그런 얘기죠?" 듣지 않아도 그 다음 상황을 알겠다는 듯이 의사는 그가 흐린 말끝을 대신해서 마무리지었다. "그런 셈이죠" 아주 힘없는 목소리로 그는 수긍을 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도와드리죠. 결국 진단서가 필요하신 거죠?" 그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흔쾌한 표정으로 의사는 결국 그의 부탁이란 걸 받아들였다. 공무원이 휴직을 하는 데 필요한 게 결국 국립병원의 진단서라는 것쯤이야 그녀로서도 모르고 있을 턱이 없었다. 그날 그녀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발급한 진단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상기 환자는 불안, 불면증, 강박적 사고, 심계항진 palpitation, 흉부압박감, 간헐적인 호흡곤란, 신병과념, 변비 또는 설사, 중등도의 우울정서, 의욕상실 등의 임상적 진단 하에, '87년 6월 13일부터 향후 6개월 혹은 그 이상의 신경정신과적 가료를 요할 것으로 사료됨. 의사의 얘기에 의하면 이런 경우의 진단서 발급은 그 최대기간이 6개월까지이므로, 나중에라도 6개월을 더 쉬고 싶으면 다시 찾아와서 진단서를 발급받아 가야 할 거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임상적 판단하에 내린 병명이란 게 그 진단서에는 분명히 <신경증>으로 되어 있었다.그걸 발급 받아서 그는 직장과 예비군 중대에다가 곧바로 제출했고,그리고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억압의 세월을 무너뜨리는 감격적인 장면을 그는 그 여름의 곳곳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분명하게 목도할 수 있었다. 그 엄청난 민중의 물결 속에는 분명한 감동과 확고한 신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80년 그해 여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선배의 부재가 더욱더 절실하게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던 건, 그와 함께 그 대열 속에 서서 그 진한 감동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그래도 참고 견디며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단지 살아만 있었더라면, 이런 눈물겨운 감동을 떨리는 가슴으로 맞이했을 게 아닌가. 그는 선배의 부재를 너무나도 안타까워했지만, 해가 바뀌고 새로운 공화국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어떤 종류의 정치적 감동도 그 감동 자체로 온전하게 보존될 수 없으리라는 판단, 요컨대 그런 항구적인 지속력을 기대한다는 게 어리석은 환상이 아니겠느냐 하는 쪽으로 조금씩 생각이 변질되어 가기 시작했다. 결집되었던 민중의 기쁨은 사분오열의 강변 속에서 빠르게 분열되어 갔고, 항상 그랬다시피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는 또다른 자각으로 그를 흔들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일년 동안의 휴직 뒤에 별다른 대책도 없이 그가 사표를 내던지게 되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데서 오는 우울한 무력감 때문이었다고나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뭔가. 87년 그해 여름에 그 지방도시의 예비군 중대에다가 그가 제출한 진단서가 도대체 어떤 판단 근거를 통해 그렇게 제멋대로 둔갑을 해서 그를 절망하게 한단 말인가. <신경증>이라고 기재돼 있던 병명이 어째서 병적기록부의 훈련기록란으로 옮겨져서는 알 만한 광인들에게나 달라붙는 끔찍스런 병명으로 고스란히 이름을 달리하고 있단 말인가. 모든것이 너무나도 막막하고 답답하고 또한 터무니없게 여겨져서 그는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정 . 신 . 분 . 열 . 자 다시 한 병의 소주를 시켜 마시면서 그는 어금니를 다져물었다.87년 훈련 기록란에 기재돼 있던 그 붉은 볼펜 글씨가, 이제는 그의 심장에 아로새겨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자신을 괴롭힐것 같아서 그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아, 도대체 내가 왜 정신분열자란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기분이 비참해져서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목구멍으로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오르는 끈끈한 비애와 힘겨운 고투를 계속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술도 더이상은 마시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의 취기에서 더이상 지나치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내릴 것 같다는 아슬아슬한 위기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위기감은 곧이어 전혀 다른 종류의 분노로 돌변해 그로 하여금 치를 떨게 만들었다. 미친 새끼들 ! 자신이 어째서 정신분열자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는 곧이어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분노로 갑작스럽게 뿌드득 이빨을 갈아대기 시작했다. 광기의 세월을 눈물겨운 죄책감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정신분열자라면 너희들은 무엇인가, 정말이지 너희들이야말로 미친새끼들이 아니고 달리 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결연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제 남겨진 것은 참으로 미친놈들에게 자신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는 걸 분명하게 밝혀주는 그 일밖에 달리 더는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을 그는 했던 것이다. 술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온 그는 불과 얼마 전에 자신이 정신없이 휘청거리며 내려온 그만큼의 길을 재빠른 걸음걸이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고지탈환에 실패한 병사가 다시 한번 전의를 가다듬고 정상을 향해 돌진을 시도하는 형상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그는 순간적으로 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비굴한 노예근성의 발로인가. 부당과 정당의 기본적인 가치판단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럼으로써 어떤 억압과 압제가 횡행할지라도 결코 저항의 염을 품을 수 없는 가련한 주구(走拘)와 같은 삶으로 스스로를 전락시키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자포(自暴)와 그것은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지금 되돌아가고 있는 행로에 대한 의미를 그런 식으로 한껏 확대시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또?" 연경목 씨가 중대본부 사무실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여전히 귀에다 이어폰을 끼고 앉아 있던 방위병은 사뭇 놀라는 표정으로 두눈을 휘둥그렇게 치떴다. 물론 연경목 씨의 표정에서 상당한 분기(墳氣)가 노출되어서이기도 했겠지만, 빈틈없이 불콰해진 낯빛에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음주의 징후를 그 방위병은 이미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 아까 그 병적기록카드 다시 한번 확인하러 왔는데, 그것 좀 다시 보여줘" 아주 굳은 표정으로 그는 또박또박 말을 끊어서 건넸다. "아까 봤잖아요?" 이어폰을 빼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방위병은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글쎄, 다시 보여달란 말야!" 쐐기를 박듯 연경목 씨는 언성을 높였다. "아니 도대체 뭐예요, 아저씨 ? 지금 남의 사무실에 와서 술주정하는 거요, 뭐요?" 그때 다시 뒤쪽에 았아 있던 인상이 험악한 고참 방위병이 나섰다.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난 그는 앞쪽에 서 있던 방위병을 뒤로 끌어내면서 자신이 상대해 주겠다는 듯이 어슬렁어슬렁 연경목 씨 앞쪽으로 바투 다가왔다. 그 태도가 더할 나위 없이 불량스럽고 거만스러워 보여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울컥 욕지기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술주정 ? 누가 술주정을 해 ? 다시 한번 카드를 확인해 보고 싶다는데, 그게 잘못된 거야? 동대 근무하는 방위병들의 임무가 도대체 뭐야? 그런 거 친절하게 확인시켜 주는 거 아냐?" 그 고참 방위병의 태도에 더욱 불쾌감을 느낀 연경목 씨는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 응어리진 분기를 조금씩 밖으로 토해내기 시작했다.그 순간의 그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자면, 사실 한번 뒤집어엎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친절? 여보쇼, 아까 그렇게 분명하게 보여줬음 됐지, 이제 와서 뭘 다시 보여달란 거요?" 턱을 쳐들고 한껏 시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고사하고, 그 고참방위병은 어느덧 어투까지 달라지고 있었다. 여보쇼? "그래서, 못 보여주겠다 이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만은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연경목 씨도 또한 위협적인 어조로 말을 짓씹어 뱉았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그 거들먹거리던 고참 방위병은 잠시 뜨악한 표정으로 연경목 씨를 노려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뒤쪽에 서있던 네 명의 방위병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카드를 가져오라는 신호였다. "자 보쇼. 뭐가 잘못됐단 거요?" 순식간에 대령되어진 카드를 연경목 씨 앞에다 내려놓으며 고참 방위병은 야릇하게 입 언저리를 일그러뜨렸다. "이봐. 여기 87년 이때 내가 분명히 <신경증>이란 병명으로 국립의료원 진단서를 병사용으로 제출하고 동원훈련이 면제됐는데, 그걸 이년이 지난 지금 와서 다시 보충하라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추궁을 하듯이 연경목 씨는 빠르게 말을 하고 나서 방위병을 노려보았다. "이것 보세요. 그때 이런 병으로 동원을 안 받았다고 해서 영영 안 받게 될 줄 알아요? 예비군 설치법대로 우리는 부족한 시간을 소급해서 훈련시킬 의무가 있단 말입니다. 알겠어요?" 아예 팔짱을 낀 채, 그 고참 방위병은 네놈이 백날 떠들어봤자 눈도 깜짝하지 않을 거라는 듯한 태도로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년 전 걸 지금 받으라 이거야?" 두 눈을 갑작스럽게 부릅뜨면서 연경목 씨는 소릴 질렀다. "그럼요. 87년에 정신분열자로 처리돼서 이렇게 훈련을 미필했으니까, 그걸 지금 다시 받아야 된다아-- 그겁니다. 이번에도 받기 싫으면 정신병원으로 가서 다시 진단서 발부받아 와요. 그럼 빼줄 테니" 노골적으로 사람 약을 올리는 듯한 어투였다. 그 고참 방위병의 뒤쪽에 서 있던 졸병들까지도 저희들끼리 눈을 맞추며 키들거리고 있었으니 연경목 씨의 심기가 더욱 빠르게 격해졌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그럼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 정신분열자라고 써놓은 이건 도대체 뭐야? 그때 제출한 진단서에 분명히 <신경증>이라고 돼 있었는데, 어떤 새끼가 이렇게 제멋대로 써놓은 거야?" 그게 사실은 연경목 씨가 노리고 있던 문제의 핵이었다. 적어도 그 문제만 해결되면 자신이 조용히 돌아갈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마지막 안간힘으로 파괴적 충동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 아저씨 정말 웃기네. 여보쇼, 다른 곳에서 넘겨져 온 걸 고스란히 보관만 할 뿐인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87년에 지방예비군중대에서 기록한 걸 우리보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구요?" 자신이 하는 얘기가 털끝만큼도 이치에 벗어난 게 아니라는 듯한 자세로, 방위병은 자신만만하게 연경목 씨를 노려보았다. "잔말 말고 지워 !" 그렇게 벽력 같은 소리가 연경목 씨의 입에서 터져나온 순간부터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모든 것은 파행의 극을 향해 정신없이 휘몰려가기 시작했다. 몇 마디의 고함이 치열한 교전처럼 오가다가 급기야는 구분되지 않는 동작과 동작들이 다발적으로 뒤섞여버리고, 그리고 끝내는 걷잡을 수 없는 악다구니와 욕설이 그 비좁은 실내의 사면벽으로부터 복도와 계단을 거쳐 아래층의 동사무소 출입문까지 점차로 확대돼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아저씨가 지금 술주정하는 거야, 뭐야!" "지워 이 자식아! 이런 근거 없는 기록으로 사람을 함부로 미친놈 취급해도 괜찮은 거야, 뭐야 !" "이 자식이라니, 내가 당신 자식인 줄 알아? 그리고 이런 기록이 엿장사 맘대로 썼다 지웠다 그러는 건 줄 알아? 어디 와서 행패질이야, 이거 ?" "못 지워 이 새꺄 ! 좋아, 그럼 내가 지우지. 아니 이 기록부를 내가 찢어버리지!" "야, 잡아 !" "안 놔 이거 ? 못 놔!" "내쫓아버려 ! 씨발 또라이가 어디 와서 미친 지랄이야, 이거 ?" "야, 이 새꺄 !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또라이라고 했다, 왜? 내 말 틀렸어?" "너 이 새끼 뒈지구 싶어?" "육갑 떨고 있네. 그래, 뒈져도 너 같은 또라이한테는 안 뒈진다,이 니미야!" "야, 이 개새꺄, 너 이리 나와봐! 이리 나와봐, 너 !......" 그렇게 네 명의 방위병에게 이끌려 동사무소 출입문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진 연경목 씨의 시야로 가장 빠르게 부각되어져 온 것은 화단옆에 세워져 있던 붉은 벽돌 몇 장이었다. 세상이 갑자기 거대한 불덩어리로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고, 그 순간의 자신이야말로 가장 명징한 상태로 각성된 의식의 주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그 붉은 벽돌들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참함에 비할바 아니게, 분노는 너무나도 명징하고 또한 구체적이었다. 세상에는 어느덧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아직 시작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느덧 마무리를 서두르는 초겨울 저녁의 냉기가 더할 나위없이 야속하게 여겨지는 시간이었다. 붉은 벽돌에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점차로 무연해지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이 땅바닥에 퍼질러앉아 있다는 걸 께우칠 수 있었다. 그러나 싸늘하게 식어버린 대지를 손바닥으로 짚고 다시 일어서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대로, 결코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는 거라고. 그가 손바닥을 털면서 다시 동사무소 출입문을 향해 마악 걸음을 옮겨놓으려 할 때였다. 갑작스럽게 출입문이 활짝 젖혀지면서 강도질을 하고 황망스럽게 줄행랑을 놓는 떼강도들처럼 한 무리의 인간들이 그곳에서 줄을 이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아주 짧은 순간 연경목 씨는 그 느닷없는 장면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등을 돌려 그는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무리를 향해 벽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서 !" 가방을 옆구리에다 끼고 국도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는 다섯 명의 방위병들을 향해 연경목 씨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그들이 뛰던 걸음을 멈출 턱이 없었다. 연경목 씨가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또다시 자신들에게 달겨들 것이라는 판단으로 튀듯이 퇴근해야겠다고 작정했을 게 뻔한 그들이, 바로 그 당사자를 목전에서 확인했는데 무슨 연유로 걸음을 늦추겠는가. "쫓아온다, 튀어라 !" 이윽고 연경목 씨가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그렇게 소리를 내지르며 더욱더 미친 듯이 줄행랑을 놓았다. 동사무소로부터 국도까지 곧게 뻗어나간 길을 눈깜짝할 사이에 빠져나간 그들은 어느덧 육교의 계단을 황망스럽게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길 건너편의 계단을 두 칸 세 칸씩 닥치는 대로 성큼성큼 뛰어내리고 있었다. 연경목 씨가 비로소 육교의 계단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이미 버스정류장에 서서 밀려드는 버스를 골라잡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중의 두엇은 연경목 씨에게 보란 듯이 팔뚝질까지 해보이고 있었다.그걸 보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이 그는 계속해서 계단을 뛰어올라가정신없이 육교를 건넜다. 그리고는 반대편의 계단을 그도 또한 두 칸 세 칸씩 성큼성큼 뛰어내리면서 이렇게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 놈만, 제발 한 놈만 잡혀봐라, 제발 한 놈만......" 그러나 그의 바람을 충족시켜 줄 만한 <한 놈>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버스정류장에 당도할 수 있었다.완전하게 허탕이었다. 눈깔 까진 고기 한 마리도 걸려들지 않은 그물을 건져올릴 때, 그때 허망하게 그물코를 빠져나가는 물소리 같은 게 얼핏 귓전을 스쳐가는 것 같았다. 어스름이 점점 드넓게 새상을 뒤덮어가고 있었다. 그 버스정류장 바로 뒤쪽의 생맥주집으로 무작정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그는 아주 기진맥진해 있었다. 창유리 밖으로 눈에 보일 듯이 견고해져 가는 어둠과 불빛, 그리고 거대한 이 세계의 무관심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엄습해 오는 견딜 수 었는 혼돈이 아닐지라도, 그의 심신은 단지 살아 있다는 그 사실 한 가지를 자각하기조차도 힘에 겨울 만큼 깊고 나른한 무감각의 늪으로 걷잡을 수 없이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500,1000,1500,2000,2500,3000......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리고 제대로 생각되어지는 것도 사실은 없었다.87년? 6월항쟁 ? 민주? 양심 ?...... 그런 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주 가끔씩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면서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아파하면서 살았다고? 웃기고 있네. 뭘 아파했다는 거야, 도대체 ! 이 시대,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치정 같은 정치를 아파했더니 결국 뭐가 남았지? 후우, 남긴 뭐가 남아, 정신분열자가 됐을 뿐이지. 아파하는 놈은 미친 놈이고, 미치지 않은 놈은 아파하지 않은 놈인가? 웃기지 말자. 제발, 제발 좀 웃기지 말자고. 차라리, 차라리 진짜 미쳐버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차라리 뱃속 편한 세상이 지금은 아닌가 말이다......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생맥주를 날라다 주던 아가씨가 연경목 씨의 어깨를 세차게 뒤흔들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고개를 떨군 채 정신을 잃고 있던 그가 사뭇 걱정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응?"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 연경목 씨는 두 눈을 치떴다. 사물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을 만큼 시야가 몽롱했다. "집에 가셔야죠. 많이 취하셨나봐요" 연경목 씨 앞에 버티고 선 채로 아가씨는 그가 어서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으흥, 지입 ? 그래, 그럼 가야지. 아암, 가야구말구" 그는 간신히 입을 놀리면서 탁자를 짚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는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중심을 잃어버리면서 탁자와 함께 앞쪽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두 개의 맥주잔이 동시에 떨어져내리면서 날카로운 파열음을 터뜨려 올렸다.끄응, 탁자를 가슴에 안은 채 그는 꿈틀거렸으나, 그러면서도 쉽사리 몸을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이윽고 주인남자가 나타나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연경목 씨의 뒷덜미를 거칠게 나꿔챘다. "집이 어디요?" 연경목 씨를 출입문 근처로 끌고가면서 주인남자가 커다랗게 소릴 질렀다. "집 ? 우리 지입 ? 흐응, 우리집은 정신병원이야" 그제서야 그는 주인남자의 손을 자신의 몸에서 떨쳐내면서 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내놓았다. "술을 마셔도 똑바로 마셔야지. 젊은 사람이 왜 이래?" 귀찮다는 듯이 거스름돈을 연경목 씨의 주머니에다 쑤셔넣으면서 주인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항, 왜 이러냐구? 내가 왜 이러냐구? 흐응, 내가 미쳐서 이래.나 말이지, 내가 정신분열자다아 이거야, 알겠어 ?" 출입문 앞에서 위태롭게 건들거리며 그가 그렇게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자, 도저히 더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주인남자가 그의 등덜미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거칠게 밖으로 밀어냈다. "미치려면 곱게 미쳐 임마! 어디서 돼처먹지 못하게 주정질이야?" 그러고 나서 주인은 재빨리 출입문을 닫아버렸다. "흐응, 미친 놈. 진짜 미친 놈은 너다 임마 ! 알겠냐아, 이 진짜 미친놈아......" 그 생맥주집을 나와 다시 버스정류장 부근의 육교를 향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비틀 위태롭게 걸음을 옮겨놓으며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혀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싸늘한 냉기 속에서, 아주 미미한 의식의 빛줄기가 그로 하여금 아슴푸레한 생각 하나를 떠올리게 했지만, 그게 서점에서 눈빠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허리가 아프다는 모친에 관한 생각이라는 걸 그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스레 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이런 얘기가 자동진술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미쳤어. 나는 정신분열자라구. 내가 미쳤으니까, 흐음 그래,그러니까 미치지 않은 놈은 도대체 누구냐? 내가 미쳤으니까......" 버스정류장에서 육교를 향하지 않고 곧바로 차도로 내려서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녹음장치가 내장된 자동인형처럼 쉬지 않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미쳤어. 나는 정신분열자란 말야, 이 미친 새끼들아. 모두다 미쳐 있을 때 미치지 않은 놈이 누구냐? 그놈이 바로 미친 놈이지. 그럼 그놈은 또 누구냐? 그놈이 바로 미치지 않은 놈이지. 히이,그럼 그놈은 또 누구냐? 그놈이 바로 미친 놈이지 ......" 고개를 푹 떨군 채 가끔씩 팔까지 휘두르면서, 그는 중심을 잡지 못한 걸음걸이로 계속해서 그렇게 차도를 횡단해 가고 있었다. 빠앙,빠방, 빵빵빵!...... 지나가던 차량들이 들으라는 듯이 닥치는 대로 경적을 울렸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차도 한복판에까지 이르러 더욱더 팔을 크게 휘저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따뜻한 온기가 자신들을 기다리는 집을 향하여,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져가는 썰렁한 초겨울 밤이었다. 7. 1989년 겨울, 代役人間 전교조(全敎祖) 교사들을 싸잡아서 <빨갱이 사상을 가진 놈들>이라고 침튀기던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갑자기 죽은 만수(萬洙)에 관한 뒷얘기로 핏대를 올려갈 무렵, 나는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늦가을 밤비가 청승맞게 추적거리는 부둣거리로 나섰다.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부둣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횟집의 불빛들은 여전히 젖은 채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냐. 그렇게만 생각할 게 못 된다구. 너 원양어선 출항 중에 일어나는 감추어진 사고가 얼마나 많은 줄 알기나 하냐? 어쩌면 만수 그놈도 그런 식으로 죽음이 은폐된 건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내 얘기는" 횟집 안에 앉아서 떠들어대는 그들의 높은 언성을 등 뒤로 들으면서 나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 그들이 죽은 만수를 입에 담아서만은 아니었다. 근 일년만에 다시 만난 그들과의 술자리가 시작된 직후부터, 나는 사실 만수에 관한 생각에 끈끈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기회 있어 내려올 때마다 만나게 되는 몇몇 중학교 동창들과의 술자리란 언제나 그랬다시피 그 얘기가 그 얘기였고 그 자리가 그 자리였다. 떠들어봤자 떠든 놈의 목청만 아플 뿐인 시국에 관한 부질없는 강변이 아니면 돈에 관한 저마다의 신앙생활 내지 독실한 믿음,혹은 그도저도 시들해졌을 때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마지막 비상(砒霜)처럼 던져지는 여자 얘기....... 뭐 그런 따위가 그럭저럭 세상 살아가는 삼십대 인생들이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단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조용히 있고 싶은 심정이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에 밀려 결국은 횟집까지 온 셈이었는데, 그것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치자. 그리고 그 내키지 않는 술자리에서 그들이 선생인 나를 앞에 앉혀두고 전교조 교사들을 싸잡아서 <빨갱이 사상을 가진 놈들>이라고 침튀겼던 것까지도 괜찮았다 치자.그러나...... 내가 끝끝내 원하고 바랐던 것은 제발 만수에 관한 얘기만은 입에 담지 말아 달라는 그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나의 그 은밀하기 이를 데 없는 마지막 바람을 한순간에 짓밟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더이상 그 술자리에 앉아서 죽을 쑤는 인상으로 애꿎은 소주만 퍼제껴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전교조 교사들을 싸잡아서 매도해대는 그들의 일방통행식 강변의 이면에는 어느덧 자신들도 학부형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은근한 자긍심과 함깨, 첨예하게 돌아가는 시국에 대해 자신들도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적어도 내 앞에서만은 분명하게 나타내고 싶어하는 전도된 과시욕이 은밀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슴 밑바닥에 감추고 있는 나에 대한 그런 식의 쓸데없는 열등감을 내가 간파한 것은 이미 대학을 다니던 시절부터였었다. 그리고 나의 태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들이 제멋대로 굳혀나가는 그런 식의 심리적 자세에 적절하게 상응하는 방법을 내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도 바로 그 무렵부터였었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그들의 의견에 쐐기를 박지 말 것. 가능하면 수긍하는 태도를 보일 것. 불필요한 말을 가급적 배제할 것. 그리고 겸손할 것. 중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진 그들과 내가, 그래도 지나간 오랜 세월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만나 술잔을 나눌 수 있었다는 건 확실히 유년의 추억이 뿌리 깊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반증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나이 서른을 훌쩍 넘겨버린 채 저마다의 삶이 지니게 되는 내밀한 고뇌로 시들어가면서도, 그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나와 술자리를 같이 해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귀소본능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나는 때때로 가져보곤 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과의 만남에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건 이미 얘기한 것처럼 그들이 표한 심리적 복합체가되어 나를 당황하게 할 때가 심심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영세한 어촌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놈이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그곳에서 공립학교 접장(接長) 노릇을 한다는 것에 대해 그들은 때때로 상당히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내게 나타내곤 했던 것이다. 내가 그들을 만날 때마다 가급적 말을 삼가는 버릇이 생긴 것도 다 그런 전조에 의한 것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술들이 좀 거나해지면 내비치게 되는 <훈장 나으리>, <너는 그래도배운 놈이니까>, 또는 <서울에서 사시는 분이 어떻게 우리 같은 시골 무지렁이들 하고야> 운운하면서 내뱉는 얘기가, 사실은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의 아픔과 고뇌를 그들이 제멋대로 비웃고 동경하고 때로는 기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아예 말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생이라는 직업이 대한민국에서 택할 수 있는 직업의 일종으로서 과연 괜찮은 것이고, 배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우월한 가치로 인식될 수 있는 시대이며, 또한 서울에서 산다는 것이 과연 <특별>한 시민으로서의 대접을 융숭하게 받는 것인지를 돌이켜보면, 언제나 넘치게 따라져서 출렁거리는 소주잔만 시야로 갑작스럽게 밀려들 뿐이었다. 잠시 문 밖에 서서 바다쪽을 내다보며 망설이던 내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부두를 따라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한 건, 횟집에 앉아서 침튀기는 그들에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의 기수를 만수 쪽으로 아예 굳혀버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화장실에 갔으리라고 믿고 있는 친구들에 대해 아쉽다거나 미안하다는 따위의 감정을 되도록이면 갖지 않기 위해 나는 의도적으로 태연하게 걸음을 옮겨놓았다. 내가 내일 아침에 이곳을 떠나 다시 서울로 가리라는 걸 알고 있는 그들은,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영영 술자리를 이탈했다는 걸 알고는 지금껏 부질없이 곤두세웠던 핏대를 일제히 취합하여 나를 맹렬하게 비난할 게 분명했다. 건방진 새끼, 지가 선생이면 선생이었지, 어이구 씨부럴 놈, 배운 새끼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조꺼튼 새끼, 술맛 확 조졌네, 니미랄.......그들이 전교조 교사들을 싸잡아서 <빨갱이 사상을 가진 놈들>이라고 되는 대로 내 앞에서 짓씹어 뱉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들의 친구인 내가 그런 <불순세력>에는 절대로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어서였을 것이었다. 그들의 그런 확신이 어쩌면지금 내가 관통해 나가고 있는 뼈저린 혼돈에 비하면 그 배경이나 근거가 보다 명쾌하고 확실한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몹시도 우울하게 만들었다. 오늘 그들과의 술자리에서 내가 만일 입을 열어 그들에게 <내가 바로 너희들이 얘기하는 빨갱이 사상을 가진 놈들중의 하나다 !>라고 핏대를 올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그 빨갱이 사상을 가진 놈들의 집단에 가담한 대가로 교단에서 쫓겨났다>고 얘기했으면 또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쫓겨난 뒤에도 계속해서 쫓겨난 학교의 교문 앞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빨갱이 구호를 외쳐댔으니 어쩔래?>라고 악다구니를 내뱉았으면 끝내는 어떻게 됐을까...... 초저녁부터 끄무러지기 시작하던 하늘에서 제법 촉촉한 가랑비가 내려 부둣거리는 어느덧 질펀하게 젖어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항구 바깥쪽에서는 미미한 안개가 일어서고 있는 것 같았지만, 유년의 기억속에서 때때로 울어대던 깊은 밤의 음울한 무적(霧笛)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 만큼 그것이 농후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횟집들이 밀집대형으로 늘어서 있는 부둣거리의 불빛들은 여전히 한낮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집집마다 경쟁을 하듯이 커다랗게 설치한 아크릴 간판과 수족관에서 밀려나오는 밝은 형광불빛들이 묘하게 뒤섞여 이 시대의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향락과 퇴폐의 밀집지대를 연상케 했다. 어판장에 나가 물오징어 배를 따주고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던 영세한 어민들이 모여 살던 판잣집 동네가 깡그리 밀려나가고, 그 터전에 이제는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한 불빛들이 저렇듯 가득 들어찬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고향>이란 어휘에 대해 지극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씩이나마 고향이라고 내려와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느끼게 되는 그런 유(類)의 절망감이 어쩌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집착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휑뎅그렁한 내면의 상실감만은 도저히 어떤 식으로도 위무를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제 이곳 생활 모두 정리하시고 서울로 가셔서 저희와 함께 사시죠" 어젯밤에 나는 늙은 노모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런 어이없는 얘기를 내뱉았었다. 웬지 육순 넘어 홀로 살아가시는 당신의 모습이 덧없이 측은하게 여겨져서 나도 모르게 불쑥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것이야말로 한 정신나간 작자의 희떠운 헛소리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장 직장에서 쫓겨났다는 얘기도 입 밖으로 꺼내질 못하면서, 어머니까지 모셔가서 도대체 어떤 식으로 봉양을 하겠다는 것인지. 부지불식간에 불쑥 말을 내뱉은 나의 심정을 나로서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나마 이곳에서 건어물 장사라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이 나이에 이제 내가 서울 가면 무슨 낙이 있겠냐. 짐승도 죽을 때는 제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는데. 그래도 피붙이 있는 이곳이 내 맘엔 그저 편하다. 내 걱정일랑 아예 하지 말고 너희나 아이 잘 키우면서 탈없이 살거라"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고 또한 어려운 일인가 하는 걸 뼈저리게 깨우쳐야 하는 나날이었다. 옳다고 믿는 일에 소신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또한 눈물겹게 절감해야 하는 나날이었다. 그리고 양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이 놀라운 다수의 동시대인들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체념으로 인해 더욱더 불면의 켜가 두터워져 가야만 하는 나날이었다. 나는 아내에게도 아무런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세 살된 아들을 품에 안고 아침마다 대문 밖까지 따라나와 해맑게 웃어보이던 아내. 새상이 얼마만큼이나 비관적인 형국으로 뒤틀려가는지도 모르면서, 단지 내가 출근을 못하게 됐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터무니없이 겁먹은 얼굴로 내 눈치만 살펴대는 그녀의 심중을 내가 모를 턱이 없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입은 그녀를 위한 어떤 종류의 설명이나 위무의 염도 품어보질 못한 채 냉동된 육류처럼 고스란히 굳어갔을 뿐이었다. 그런 답답한 상황에서 내가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날이 갈수록 잎새가 무성해져 가는 황당무계한 불면의 숙성과, 끝을 모른 채 튼실하게 뿌리를 생장시켜 나가는 거대한 강박관념의 심화일 뿐이었다. "시골 어머님에게 며칠 다녀오겠소.그리고 다녀와서 가부간 어떤 방도를 찾아봅시다" 그렇게 말을 하고 이곳으로 훌쩍 내려왔지만,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내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달리 아무것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내에게마저도 설명을 베풀지 못하는 처지에, 연로하신 어머님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 일의 시말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세상 사는 일에 관해서라면 저마다 완전무결하게 무장되어 있다고 자부하는 저 횟집에 두고 온 술 취한 친구들에 대해, 내가 베풀 수 있을 만한 설명이라는 게 또한 무엇일 것인가.횟집들이 즐비하게 밀집되어 있는 지대를 벗어나자 거대한 어둠이 갑작스럽게 앞을 가로막았다. 띄엄띄엄 불 밝히고 있던 횟집들이 아예 꼬리를 감추어버리는 그곳으로부터 반원형으로 구비를 이루며 조성된 항구의 이쪽과 저쪽 방파제 사이에서 나는 비로소 온전하게 자태를 드러내는 거대한 어움과 마주쳤던 것이다. 건너편의 방파제 끝에 세워진 오래된 등대 광실(米室)에서 규칙적으로 깜빡거리는 적.녹색의 등빛과, 가끔씩 항구 전체를 빠르게 핥고 지나가는 탐조등의 섬ㅉ한빛줄기가 비로소 늦은 가을밤의 항구 분위기를 실감나게 재현해 주는것 같았다. 부두는 썰렁했지만 협소한 항구에 정박한 동력선들은 상당한 척수를 이루고 있었다. 서로 옆구리를 맞부딪치며 느리게 굼실거리는 그 정박선들의 선상에서는 서너 장씩 매달린 적.청.백색의 깃발들이 바다 쪽에서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느긋하게 깃면을 펴보였다가 어느덧 힘없이 늘어지곤 했다. 부두 뒤쪽으로는 몇 대의 타이탄 트럭과 리어카가 제멋대로 세워져 있었고, 그 앞쪽으로는 손질을 하기 위해서인지 한껏 펼쳐놓은 어망(漁網)들이 고스란히 비에 젖고 있었다. 그리고 기름을 담았던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빈 드럼통들이 부두의 이곳저곳에 제멋대로 나자빠져 있거나 혹은 세워져 있었다. 그 모든 희뿌윰한 풍경들이 덧없이 을씨년스럽고 삭막하게만 보이는 게 아무래도 늦가을에 내리는 밤비 때문이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눈에 익은 풍경들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내 마음을 사뭇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눈에 익혀온 풍경이었던가. 또한 얼마나 여러번 왕래한 길이었던가. 저 까마득한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이 길을 나는 지금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가고 있었다. 어떤 힘과 어떤 필연이 나로 하여금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가, 하는 데 대한 때때로의 숙고(熟考)-- 그것이 바로 죽은 만수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의미 정립을 위한 각심한 고뇌였다는 걸 나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이 곧 그의 죽음과 내 삶이 고리지어지게 된 그 알 수 없는 함수관계를 밝혀주는 지극히 간단명료한 방정식까지를 내게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마치 해법(解法)이 없는 함수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나는 단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이 어쩌면 영원한 미궁으로 남겨질는지도 모른다는 데 대해 나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수가 죽은 지도 어느덧 5년이 지났건만,만수가 죽기 전과 하등 다를 바 없이, 내가 여전히 이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바로 그런 막막한 미궁을 판단케 해주는 분명한 반증일 수 있었다. 그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그 어두운 내면의 통로가 지금 내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 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현실속의 고뇌로 그대로 재현되어 나로 하여금 그 전철을 또다시 밟게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여전히 이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때때로 그런 생각이 무연하게 뇌리를 스쳐가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 뒤에 휘몰려오는 현실에 대한 어두운 자각이 웬지 모르게 그것을 차갑게 비웃곤 하는 걸 나는 내 속에 있는 또다른 나를 통해 섬ㅉ하게 깨우치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내 내면에서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의 또다른 자아 하나가 무섭게 두 눈을 부릅 뜨고 있었던 것이다. 만수가 죽은 뒤에도 나는 고향을 찾을 때마다 예외없이 이 길을 걸었었다. 걷지 않을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십이월의 혹독하고 매몰찬 밤바람을 맞으며, 때로는 신새벽의 함박눈을 수북하게 맞으며, 또 때로는 만취한 상태로 알 수 없는 인력에 이끌려가듯이 나는 이 길을 비틀거리며 가곤 했던 것이다. 한 죽음이 남겨놓고 간 터무니없는 한(恨)의 농창(膿瘡)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처절한 괴열(壞裂)을 분명하게 목도하기 위해서였다. 단지 그것을 위해 나는 이 어두운 부둣거리를 걸어 어둠의 핵지(核地)로 때마다 빨려들어가곤 했던 것이다. "너도 만수의 실종을 자살이라고 생각하냐?" 내가 만약 횟집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지금껏 그대로 앉아 있었다면, 그들은 분명히 내게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질문에 대해 나는 어떤 종류의 시원스런 대답도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명쾌한 설명은 더욱더 베풀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모한 힘의 추종자들이 결국은 그를 죽인 셈이야>라거나, <시대의 어둠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거지> 따위의 대답을 혹시 내가 했다면, 그들은 과연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사지 멀쩡하던 놈이 군대에서 제대하고 원양어선 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선상에서 갑작스럽게 행방불명돼 버려 시체마저도 찾을 수 없게 된 상황-- 그것에 대해 내가 그런 식의 대답을 했다면, 보나마나 그들은 눈꼬리를 치켜올리거나 입 언저리를 씰룩거리며 <배운 놈 티낸다>는 식으로 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그들 중의 하나는 그래도 만수의 죽음이 자살일 것이며, 그 이유가 80년 5월의 광주항쟁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나름대로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그해 5월에 광주로 투입된 공수부대원의 일원이었던 만수가, 그곳에서 저질렀던 만행 때문에 가지게 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을 거라는 선상(線上)에서 더이상은 진전되질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확대해석되지 못한 어설픈 결론이 끝내는 동참한 다른 친구들로 하여금 또다른 항변과 구구한 억측을 유발시키는 엉뚱한 불씨로 전락되고 마는 걸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을 만나오면서 누누이 목도해 왔었다. "군인이야 어차피 명령에 죽고 사는 건데 골쳤다고 그런 걸로 목숨을 끊어 ? 그게 아니고 원양어선이라는 게 원래 바다 위의 감옥이라서 드러나지 않는 사고가 많은 법이라구. 생각해 봐. 선장과 선원들이 선상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입을 맞추고 합의만 한다면 사람 하나 살리고 죽이는 건 문제도 아니라구" "하기는 뭐 만수가 광주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광주와 연관되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건 아닐 게다. 만수가 원래 좀 껄렁껄렁하긴 했지만 본바탕은 아주 착한 놈이었잖아?" "야, 실종이라고 공식적으로 통보가 왔으면 그걸 믿어야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왈가왈부 떠들어대냐? 백날 떠들어봤자 타임머신 타고 그 현장으로 돌아가보기 전에는 분명한 사실을 알아내기가 불가능한 거야. 안 그러냐?"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저마다의 의견으로 좌중이 분분해지다가 드디어는 경쟁을 하듯이 치열하게, 그들은 그해 5월의 광주에 대해 저마다 목청을 돋우고 침을 튀기기가 예사였다. 그해 5월 이후, 나는 곳곳에서 광주에 관해 그런 식으로 떠들어대는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귀에 담을 수 있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광주 얘기만 나오면 그들은 지고 싶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군에서 제대한 직후에 내가 만난 만수는 이미 예전의 그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태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극심한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잠시도 감정적 평온을 유지하지 못한 채 그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다리를 흔들어대면서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보기가 하도 딱해서 술을 마시자고 하면 술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소주를 대접이나 글라스에다 가득 부어 단번에 그것을 들이켜버리기 일쑤였다. 그가 대강 어떤 종류의 내면적 고뇌로 인해 그렇듯 극심하게 괴로워하는지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짐작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어서 나는 꽤 여러번 그의 입을 통해 어떤 종류로든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마저도 그 자신이 광주에 투입되어 보고 행한 일에 대해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었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끝없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다가,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면 "너 사람 죽일 때 기분이 어떤지 알아?" 라거나, "사람을 선 자리에서 때려죽이는 걸 옆에서 볼 때의 기분이 어떤지 알아?" 라는 식으로 농을 치듯이 입을 씰룩거리거나 실소를 흘리기 예사였고, 그러다가 아주 만취하게 되면 "그때는 몰랐었어. 정말이지 그때는 그런 일이 얼마나 끔찍스런 일인지를 내가 몰랐었다구" 하면서 얼굴을 처박고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쥐어짜기 일쑤였다. "이 나라를떠나고 싶다"면서 오열을 터뜨리던 어느날, 그는 끝내 소주병을 깨 그것으로 자신의 팔뚝을 긁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그 팔뚝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보면서 그는 내게 말했었다.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이런 붉은 피가 끝없이 눈앞을 가로막는 이 땅에서 나는 못 살아. 얼마나 살게 될는지는 몰라도, 그 피는 이 세상 끝까지 나를 따라다닐 거야......" 시멘트로 골격만 세워놓은 어판장 끝쪽에 포장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전면(前面) 포장이 없는 그곳에서 검게 물들인 군용 야전상의를입은 두 명의 사내가 등을 보인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포장 안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칸델라 불빛을 가로막고 선 그들의 등판이 흡사 사격용 표적처럼 보였다. "......그러니 니미랄. 나라가 이런 식으로 돌아갈 때는 그냥 싸그리" 운운하던 얘기가 갑작스럽게 중단되는 동안, 나는 다소 걸음을 빨리 하면서 그곳을 지나치려 했다. 나로 인해 그들이 대화를 중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고래고기예요. 한잔 하고 가세요, 아저씨" 내가 포장마차 정면을 마악 지나칠 무렵, 안쪽에 서 있던 주인여자가 나를 향해 나직하게 권유했는데, 그와 동시에 대화를 멈춘 두 사내의 얼굴이 내쪽으로 갑작스럽게 돌려졌다. 칸델라 불빛이 역광이 되어서인지 얼핏 보기에 그 두 사람의 얼굴은 중단된 그들의 대화처럼 <나라가 이런 식으로 돌아갈 때는 그냥 싸그리> 어쩌지 못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사람들의 그것처럼 대단히 극악스럽게 보였다. 살이 붙은 낯가죽만 보고도 해골의 윤곽을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얼굴은 뚜렷한 명암으로 대비되고 있었다. 각삭(刻削)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한잔 하고 가세요" 주인여자가 다시 한번 권유했지만 나는 못 들은 채 그곳을 그대로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조꺼튼 새끼 깜짝 놀랬네 ......" 내가 몇 걸음 옮겨 놓지도 않아 사내 중의 하나가 은밀하게 내뱉는 말이 공교롭게도 나의 귓전에까지 들렸다. <싸그리>의 주인공이었다.자신이 개진해 나가던 말 때문에 놀라게 되었다는 것인지, 단지 사람의 인기척 때문에 놀라게 되었다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었지만,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더이상 <싸그리> 이후에 어쩌겠다는 얘기만은 계속해 나갈 것 같지 않았다. 어판장을 벗어나자 출입구에 보안등을 밝혀놓은 커다란 삼층 건물이 진행방향 좌측으로 나타났다. 그 건물의 출입구 왼편에는 <덕진수산업협동조합>이라는 커다란 현판이 나붙어 있었고, 그 우측에는 다시 <덕진항운노동조합>이라는 목판이 노트 크기만하게 나붙어 있었다.그리고 그 바로 위에 갓을 씌운 백열전구가 붙박여 있었다. 그 건물 옆쪽으로는 <간첩을 신고하여 3000만원 상금 타자>, <생각 없이 버린 오물 황금 어장 썩어간다> 따위의 철제푯말들이 든든하게 뿌리를 박고 서 있었다. 그곳을 벗어나면서부터 어둠은 더욱 견고한 자태로 드넓어지기 시작했다. 그 어둠 속에 거대한 자태로 키를 세우고 있는 원통형 정유 탱크만 간신히 식별될 정도로 어둠은 드넓고 깊어보였다. 그러나 그 정유 탱크를 중심으로 여러 곳으로 갈라져 나가는 길에 관해서라면 나는 눈을 감고도 걸음을 옮겨놓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시가지로 이어지는 좌측의 소방도로와 방파제로 이어지는 정면의 부둣길, 그리고 정유 탱크 뒤쪽으로 실핏줄처럼 퍼져나간 크고 작은 골목길까지도 나는 확연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길들이 다 두 눈을 감고도 어설프지 않게 갈 수 있는 길들이었다. 그러나 늦가을 밤비가 추적거리는 자정 무렵의 그 모든 길들은 한결같이 길이 아닌 듯, 다만 깊고 드넓은 어둠 속에 파묻힌 채 완강한 자태로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정유 탱크 뒤쪽으로 이어진 어둡고 비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거기가 바로 이곳 사람들이 흔히들 <똥골>이라고 부르는 이 읍거리의 가장 오래된 유곽(遊廓)이었다. 사람들이 이 일대를 이제 와서<똥골>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비단 <똥치골목>이라는 준말로서의 격심한 격하로서뿐만이 아니라, 이 읍거리 전체가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를 피부로 실감케 해주는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었다. 한때 이 읍거리에서 술 꽤나 마신다는 사람치고 이곳에 와서 호기 한번 부려보지 못하면 아예 술꾼 취급을 받을 수 없었을 만큼 이 일대의 술집들은 대단한 명성을 휘날렸었다. 바다를 상대로 하는 뱃사람들의 술버릇이 대개 호기로움과 허세로 과장되기 일쑤여서, <한방> 차지하고 들어앉아 <한상> 받고 <한판> 벌이고 놀지 않으면 <한잔> 했다는 생각을 아예 갖지 않을 정도로 허황되기 이를 데 없는 습속에 길들여져 있었고, 그것 때묻에 항상 싱싱한 아가씨들이 대기돼 있는 이 <매미골>을 그들은 즐겨 찾곤 했던 것이다. 그때는 사람들이 이곳을 <매미골>이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소득원이라곤 바다밖에 없는 이 작은 읍거리에도 <생맥주 시음장>이 등장하고, <맥주홀>,<요정>, <캬바레> 따위들이 우후죽순처럼 중심지를 점령해 가면서,당연한 듯이 <매미골>은 <똥치골목> 혹은 <똥골>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곳에 밀집돼 있던 많은 술집들이 문을 닫게 되었고, 이제는 그야말로 주머니가 실하지 못한 뱃사람과 부두 노무자들이 들락거리는 허름한 선술집들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그 많던 아가씨도 차츰 종적을 감추게 되었고, 이제는 그나마 장사를 하는 집에서도 아가씨 한둘 데리고도 허다한 시간을 파리 날리는 일로 소일해야 하는 문자 그대로의 소외지대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한때 이 일대에서 가장 명성을 날린 술집이 바로 만수 엄마가 경영하던 <해변정>과 만수 누나의 <장미옥>이었다. 만수 누나는 아직도 술집을 경영하고 있지만, 그것이 한때의 흥성에 비해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 주점으로의 전락인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그나마 칠순이 다 된 노파는 만수가 죽은 뒤로 해가 갈수록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고 여겨져서 아예 폐점을 해버린 지 오래였고, 그 누나 또한 한때 긁어모았던 돈을 남편이 깡그리 챙겨서 데리고 있던 아가씨와 야반도주해 버리는 바람에, 꽤나 넓어 보이던 술집을 팔고 노모가 있는 막바지 골목 어귀로 자리를 옮겨, 이름만 여전히 <장미옥>이라고 내건 채 두어 명의 아가씨를 데리고 옹색하기 그지없는 술장사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 같아서 병원으로 데려갔더니 거기서는 또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거야" 작년 겨울방학 때 내려와 이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인사차 만난 만수누나는 늙은 노모를 대단히 짜증스러워하고 있는 듯 꼬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었다. 새벽 두 시건 세 시건 닥치는 대로 방파제로 나가 만수를 찾는가 하면, 만수가 쓰던 방 벽에다 생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도배하듯이 모조리 붙여놓고 그것들을 쓰다듬으며 웃다가 울다가 아예 며칠씩 몸져 누워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만수 누나가 조금만 섭섭하게 대한다 싶으면 그럴 수가 없으리만큼 또렷한 정신으로 극렬한 욕설을 퍼부어댄다는 것이었다. "네가 오면 그나마 정신이 온전해지는 것 같애. 네가 어릴 때부터 만수랑 친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당신도 한많은 여생이지 뭐. 젊은 나이에 남편 바다에다 뺏기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만수놈마저 하루아침에 수장이 되고 말았으니 그 정신이 온전하대도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냐만...... 그래도 너라도 이렇게 잊지 않고 올 때마다 찾아와 주는 게 더없이 고맙구나......" 그날밤 끝내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대던 만수 누나의 말 중에, 노파가 나를 만날 때만은 정신이 아주 온전해진다는 말을 나는 내심으로 완강하게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일테면 노파의 증상을 그녀가 분명하게 간파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단순한 외형적 판단 때문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노파를 만날 때마다 치르곤 하는 그 끔찍스런 밤의 의식(儀式)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 분명할 것이었다. 10여 미터도 채 되지 않을 비좁은 골목의 초입에 <장미옥>은 여전히 있었다. 그러나 <장미옥>을 위시해서 그 골목의 어느 곳에도 불이 밝혀진 집은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늦가을 비가 추직거리는 탓에 일찌감치 장사를 마감한 모양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장미옥>을 지나쳐 골목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더듬어 나가며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일 년 사이에 생겼을지도 모를 어떤 변화에 대한 우려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간 때문이었다. 노파가 세상을 떠났다거나 정신병원으로 갔다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배제할 수만은 없는 가능성의 일종으로 빠르게 머리속을 스쳐갔던 것이다.그러나 그 모든 생각이 한갓 쓸데없는 기우였다는 걸 나는 골목 끝에 있는 노파의 집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우칠 수 있었다. 낡은 미닫이 출입문 유리를 통해 안쪽을 들여다보니 노파의 방에서 아주 희미하게나마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에 왔을 때와 하등 다를 바 없이 그것은 촛불빛이 분명해 보였다. 노파가 전깃불이 싫다고 해서 양초를 몇 통이나 사다줬다는 귀띔을 나는 작년에 만수 누나로부터 받았었던 것이다.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노파가 있는 안방으로부터 희미하게 밀려나온 불빛이 휑뎅그렁한 실내를 간신히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십여 평이 될까말까 한 실내의 시멘트 바닥 위에는 대여섯개의 탁자가 여전히 놓여 있었고 노파의 방과 연해 있는 만수의 미닫이 방문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휑하니 열려 있었다. 밖에 나가 놀다가 밤이 야심해서야 집으로 들어오곤 하는 만수가 <살금살금 제 방으로 들어가라고> 그렇게 방문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그런 대로 정신이 온전해 보이던 서너 해 전에 노파는 내게 얘기했었다. 그러나 그 서너 해 동안 만수가 방문을 닫으면서 살금살금 제 방으로 들어간 적은 단한번도 없었다. 유일하게 그 방문이 닫히는 건 내가 노파를 찾아오는 날 밤뿐이었다. 손수건을 꺼내 젖은 머리와 얼굴을 닦으며 나는 노파의 방문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들겼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이 없어서 나는 허리를 굽혀 미닫이 방문 아래쪽의 간유리를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형체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노파는 방문 바로 앞쪽에 누워 있는 것 같았는데, 여전히 움직임은 없어 보였다. 다시 한번 방문을 두드릴까 하다가 나는 그대로 방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의 손잡이를 잡고 그것을 왼쪽으로 밀었다. 문이 열리면서 방문 바로 앞쪽에 누워 있던 노파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내가 방문을 반쯤 열었을 때, 그때 갑자기 노파의 머리가 내 쪽으로 돌려지면서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예기치 않게 치켜떠진 그 눈빛을 내려다보면서 나의 온몸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갈망과 원망과 집착과 끈기가 빈틈없이 뒤섞인 포한의 그것처럼, 이를 데 없이 팽팽하게 긴장된 그 눈빛은 문자 그대로 나를 전율케 했다. 이제 아주 정신이 나간 것일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갔다. "만......" 눈빛은 그대로인 채 노파의 입이 아주 조금 벌어졌다. "니 ...... 마안수?" 이윽고 노파의 입이 한껏 해벌어지면서 퍼떡 상체가 일으켜 세워졌다. 그제서야 나는 노파의 이마에 동여매인 붉은 끈을 보았다. "저 영호예요, 어머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방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나는 허리를 굽혔다. 내 얼굴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앙...... 니 ...... 니가?" 그제서야 팽팽하게 긴장돼 있던 노파의 눈빛이 가라앉으면서 갑작스럽게 얼굴이 풀죽은 기색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나를 만수로 착각했던 게 분명한 것 같았다. 작년과 다를 바 없이 노파는 여전히 말을 제대로 못했다. "그동안 잘 계셨어요?" 내가 조금 웃어보이자 그제서야 노파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나를 따라 합죽하니 웃으며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쥐었다.손을 만지작거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여대는 그 왜소한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안쓰럽게 여겨져서 나는 갑작스럽게 부르르 몸서리를 쳐댔다. 이윽고 내가 방문 앞에 놓인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노파는 방안에서 새로운 양초 하나를 꺼내 성냥과 함께 내게 주고는 온전치도 못한 걸음을 옮기며 문을 열고 여전히 비가 추적거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언제나처럼 술을 가지러 골목 어귀에 있는 <장미옥>으로 가는 게 분명할 터였다.노파가 나가고 난 뒤 탁자 위에다 촛불을 밝혀놓은 다음, 나는 재빨리 담배 한대를 피워물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힘들여 빨아대면서 미닫이문이 활짝 열려 있는 만수의 방을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그 방 벽면 곳곳에 나붙은 만수의 사진들이 시야로 밀려들었다.어린 시절부터 만수와 여러번 잠을 같이 잔 방이었다. 머리가 굵어진 뒤에는 만수로부터 여자에 관한 얘기를 숱하게 전해 듣던 방이었다.고등학교 시절부터 타지로 나가 유학 생활을 해야 했던 내가 방학때 돌아오면 어김없이 몇날 몇밤을 자고 가던 풋풋한 냄새가 배어있는 방이었다. 내가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어른 행세를 톡톡히 해대던 그와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며 막막한 앞날과 피끓는 청춘에 관해 무수히 많은 얘기를 주고받던 방이기도 했다. 바로 그 방에서 만수는 자신을 좋아하는 <매미들>에 관한 얘기를 숱하게 내게 들려줬었다. 키가 l미터 80센티가 훨씬 넘고 골격이 건장할 뿐 아니라 거무스름한 피부에 시원시원하게 틀을 잡은 이목구비로 인해, 적어도 이 <매미집> 일대의 술집 아가씨들 중에 만수에게 의미 있는 미소 한 번씩 던져보지 않은 아가씨가 드물 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었다. 그리고 주변 환경에 의해 그런 방면으로 일찌감치부터 눈을 뜬 그가 개중에 맘에 드는 아가씨들을 엄마 몰래 집으로 불러들여 은밀하게 하룻밤 풋사랑을 즐기곤 했다는 방이 바로 저 방이기도 했다. 그런 얘기를 신나게 내게 들려줄 때의 그 철딱서니 없던 모습이 워낙에 강했기 때문에, 군에서 제대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그 고뇌어린 모습이 내게는 전혀 다른 사람의 그것처럼 너무"요새 괜찮은 여자얘가 하나 생겨서 가끔씩 이 방으로 불러들여 엄마 몰래 못된 짓을 하거든. 그런데 그게 스릴은 아주 만점인데 말씀이지, 은근히 켕기는 게 있다구. 너도 알다시피 우리 엄마가 눈치 하나는 끝내주잖냐? 그래서 말인데, 우리 엄마가 아무래도 나의 비리를 다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방이 요렇게 짝 달라붙어 있으니까 아무래도 귀밝은 엄마가 모를 리 없거든. 내가 못된 짓 하는 소리를 다 듣는 것 같아서 엄마 얼굴 대할 때마다 아주 마음이 찜찜하다구.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냐? 나도 엄마처럼 계속 모른체 시치미를 떼는 게 상술까?" 노파가 막걸리 한 주전자와 마른 안주를 들고와 내 앞에 마주앉은 것은 내가 피우던 담배를 열려 있는 출입문 밖으로 튕겨버리고 난 잠시 뒤였다. 노파는 내 옆에 선 채로 막걸리 한잔을 따라주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연신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리 앉으세요" 내가 노파의 잔에다 한잔을 따라 맞은편에다 놓자 그제서야 노파는 내 앞쪽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마른 안주가 담긴 접시를 내 앞쪽으로 바투 밀어놓았다. "헌제 ...... 한나?" 내가 고개를 돌려 한잔을 그대로 들이키고 나자 그때껏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보던 노파가 입을 오물거리며 간신히 말을 뱉았다. 그게 <언제 왔느냐?>는 물음이었다. "그저께 왔는데 내일 또 가야 해요" 내가 주전자를 들고 내 잔에다 다시 한잔을 따르며 대답하자 노파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그러고 나서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입에다 대다 말 듯이 짧게 한모금 삼키고는 이내 잔을 내려놓았다.여러 번으로 나누어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작년에 왔을 때는 한잔을 다 마셨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내가 순간적으로 했던 건, 잔을 들었던 그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드디어는 한잔도 비울 수 없는 시기가 아주 임박해진 것 같았다. 한때는 술 꽤나 마시던 여장부 같던 기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주량도 이제는 해를 거듭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쇠진해지는 육신처럼 바닥을 향해 가는 모양이었다. 만수가 죽고 난 직후만 하더라도 대여섯 잔은 거뜬히 비웠었는데, 지난 몇년 사이에 그 심신이 형편없이 메말라 붙어서 이제는 반잔의 술도 제대로 못 마실 것 같다는 생각이 보는 나를 더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사 철었던 시절에 아래지방에서 이 강원도까지 시집와 살다가,갸 아버지 죽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는 억장이 무너지질 않았었는데...... 그눔 자슥 죽고 난 뒤로는 내 맘이 내 맘이 아닌 기라. 하늘도 무심허지, 어찌 그리 애지중지 기둥뿌리처럼 믿고 살아온 자식을 하루아침에 데리가는가 말다" 만수가 죽던 5년 전 겨울에 왔을 때, 노파는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고 내 앞에서 이를 데 없이 비탄스런 넋두리를 토해냈었다. "저 미친년이 이제나 저제나 나 죽는 날만 기다리는 기다. 딸 자식년들 백이면 뭐하누. 아들새끼 하나면 그보다 나은 걸......" 그 다음해 겨울에 왔을 때, 노파는 이상스런 악의에 가득 차서 만수 누나에 대한 욕설을 내 앞에서 무차별하게 쏟아냈었다. 노파의 눈빛이 상서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던 게 아마 그해 겨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 여름에 왔을 때 노파는 내게 처음으로 광주에 관한 얘기를 꺼냈었다. 주변의 누구로부터인가 그해 5월에 만수가 투입됐던 광주에서 일어난 일과 제대 후에 만수가 보였던 행동을 연관시켜서 노파에게 얘기를 해준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랬을는지도 모르죠> 라는 식으로 내가 노파를 수긍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광주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자 노파는 판이하게 다른 표정이 되어 내게 이런 얘기를 했었다. "설령 그렇다 쳐도 갸들이 무신 죄가 있누? 그기 다 윗놈들 시키서 한 짓이제 어데 그눔아들 뜻이었것나? 군대 가서 말 잘 들은 갸들이 무신 죄가 있다고......" 그리고 6월항쟁이 열화와 같던 그 다음해 겨울에 찾아왔을 때 비로소 노파는 만수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 이전까지만 해도 노파는 만수의 죽음을 자살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당치도 않은 소리>로 일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선상에서의 실종>이라는 그 죽음 자체를 아예 현실로 수긍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오죽하니 대서소로 찾아가 실종된 아들을 찾아달라는 진정서까지 써서 청와대로 보냈었겠는가. 어쨌거나 그해 겨울에 내가 노파로부터 전해들은 한 토막의 얘기는 나로 하여금 참으로 생각케 하는 것이 많았다. "첨에야 내가 그런 줄을 꿈에서나 알았것나. 그기,그기 뭘 안다고...... 그 철없는 기 사람 때리쥑이는 일에 불리갔다가 그 꼬라지가 됐는지 내사 어찌 알았것냐 말이다.집에 온 뒤에도 정신이 멀쩡한 줄로만 알았제, 그기 그런 짓 하고 와서 지 혼자 속이 썩어가는 줄 내사 어찌 알았것냐 말이다...... 그런 줄 알았으면 원양어선이고 나발이고 다 때리치고 과부에 대등뼈를 내서라도 좋은 병원으로 데리갔을 끼구마...... 가끔씩 갸가 저 문밖에 와서 내를 부르는 것 같아서 정신없이 나가 볼 때가 한두 번이 아이다...... 어무이요 내 왔소 문 좀 열어주소...... 그럴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어무이 용돈 쫌 주소, 용돈 쫌주소...... 그렇게...... 그렇게 그기 찾아온 것 같아서......" 노파는 결국 만수가 광주로 인해 저 홀로 속으로 썩어 문드러져 가야 했던 내면의 고통을 지난 몇 년을 통해 깨우치게 된 것이었다.그리고 그런 내면적인 고통이 결국은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휘몰고 갈 수 있다는 것도 뒤늦게나마 수긍하게 된 것이었다. 친구놈들마저도 제대로 수긍하려 들지 않는 끔찍스런 내면의 고통을 이 무지한 노파가 비로소 감지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노파의 정신은 조금씩 분열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광주 청문회가 텔레비전을 통해 나올 때 독을 쓰고 앉아서 연일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얘기를 작년 겨울에 만수의 누나를 통해 들으면서 나는 생각하기를, 이 노파의 분열증세가 절대로 극으로까지는 치달리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절대로 미치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미칠래야 미칠 수도 없으리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노파에게 남겨진 끈질긴 한(恨)일 게라는 섬ㅉ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니 아...... 흐나?" 더이상 술잔에다가는 입을 대지 않고 계속해서 내 얼굴만 들여다보던 노파가 다시 입을 열어 바람 빠져나가는 소리로 말을 건넸는데, 그게 <애기 잘 크냐?>는 것이었다. "예, 잘 큽니다" 내가 대답을 짧게 줄인 것은 노파의 눈빛이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어떤 우려감을 자아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눈빛은 마치 만수가 결혼했을 때를 가상하고, 나를 통해 그 가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실감해보고 싶어하는 기색이 완연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노파의 눈빛이 그렇듯 허무맹랑한 쪽으로 휑하니 비워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단계적인 조짐의 일종이라는 걸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가면 안 된다이. 오늘밤은 예서 꼭 자고 가야 한다이" 노파의 눈빛이 사뭇 달라지던 이태 전부터 그런 일은 시작되었다.자고 가는 일. 그리고 그 부탁을 거부하지 못하는 일. 그런 것이 한때는 내 마음을 상당히 불편하게 했지만, 나는 끝내 그 부탁을 냉정하게 거부하는 쪽이나 아예 발을 끊는다는 식의 차가운 결론 쪽으로 나를 몰고가지는 못했다. 그것이 설령은 착란증세를 스스로 즐기기 위한 온전치 못한 정신 소유자의 부탁이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자고 가는 그 일이 결국은 노파로 하여금 살아있는 만수를 만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내가 어쩔 수 없이 깨달은 때문이었다. 추적거리던 가랑비가 점점 더 굵어지는 모양이었다. 비좁고 어두운 골목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반사되듯이 그대로 밀려드는 그 빗소리가 휑뎅그렁한 실내의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희미한 촛불빛이 일렁거리는 불안정한 실내의 어둡고 음습한 구석마다에서 그 빗소리는 태(態)가 불분명한 오래된 옛추억처럼 빠르게 잦아들고 또다시 살아오르곤 했다. 그런 시간이 아주 오래인 것처럼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윽고 노파의 눈빛이 만수의 방 쪽으로 돌려지는 순간 나는 손목을 들어 재빨리 시간을 읽었다. 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오로지 노파에 의해 주관되어지는 숨막히는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드디어 노파가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의자로부터 몸을 이끌어내면서 노파는 잠시 몸을 휘청거렸다. 내가 재빨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노파를 부축하려 하자 노파는 괜찮다는 시늉을 하면서 내 손을 잡고 나를 다시 자리에다 앉혔다. 그러고는 상당히 간장된 눈빛으로 나를 올곧게 들여다보았다. 얼굴 곳곳으로 쥐어짠 듯이 퍼져나간 주름살들이 촛불로 인해 무수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 전체적인 형상이 더욱더 형편없이 일그러지다가 드디어는 떨쳐낼 수없는 끈끈한 집착과 집요한 결기 같은 것만 남아서 있는 그대로가 온통 푸르스름한 포한의 발광체처럼 두드러져 보일 때 -- 그때가 바로 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할 때였다.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노파가 합죽 웃으며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이끌어 미닫이문이 열려진 만수의 방 앞으로 인도해갔다. 내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노파는 안방에서 이불을 들고와 불도 밝히지 않은 방에다 서둘러 깔았다. 그러면서도 노파는 물끄러미 서 있는 나를 희미한 어둠 속에서 연신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렇게 이부자리를 마련해 놓고 나서야 노파는 다시 방을 나가 등이 굽은 걸음걸이로 출입문을 열고 빗발이 굵어진 골목으로 황망스럽게 빠져나갔다. "오, 하느님 맙소사!" 이 기막힌 정황 속에서 또다시 허물어져가는 내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게 여겨져서 나는 탄식하듯이 소리를 내지르며 그대로 이부자리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휘몰려오는 덧없는 허무와 너무나도 먼 곳에 있는 것 같은 막막한 나의 현실이 노도처럼 한순간에 밀려와 내 등줄기를 차갑게 휩쓸고 갔다. 이제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자식과 아내, 그리고 참담하게 무너져버린 나의 교단과 막막하기 이를 데없는 나의 현실이 고스란히 뒤범벅이 되어서 머리 속을 덧없이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이렇듯 견딜 수 없는 혼란을 야기시킨 가증스런 힘의 주체에 대한 맹렬한 분노가 갑작스럽게 치밀어올라서 나는 한순간에 자리에서 돌아누워 버렸다. 적어도 만수와 같은 죽음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희생이라는 단정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걸어나간 어두운 고통의 통로가 지금 내가 처한 현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결론에도 나는 이미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간 길을 내가 지금 동일하게 가고 있다는 단정에서만은 나는 분명하게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끝끝내 벗어날 수 없는 단정이 있었다. 직어도 만수와 같은 터무니없는 희생이 두번 다시 자행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결국은 이 힘겨운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마지막 단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양심에서 비롯되는 극렬한 시달림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과 나의 삶은 과연 어떤 상관관계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어디에서 끝을 맺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러서아 나는 비로소 내가 아무런 단정도 결국은 내릴 수 없는 극심한 혼돈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냉혹한 현실과 이마를 맞부딪칠 수 있었다. 노파와 만수는 바로 그런 혼돈 앞에 끈질기게 버티고 서서 내가 가야 할 노정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참담한 시대의 이정표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역사의 변방에서서 소박하고 온전한 삶을 꿈꾸는 자들에게마저도 고춧가루 탄 물을 무시로 들이키게 만드는 이런 기막힌 시대에, 과연 그런 불운한 희생의 연결고리에 고리지어지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는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때껏 치뜨고 있던 두 눈을 힘없이 감아버렸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노파는 다시 돌아왔다. 예상했던 대로 노파는 아가씨 하나를 데리고 왔다. 보나마나 만수 누나네 <장미옥>으로 가서 자는 여자를 두들겨 깨워온 것일 터였다. 시간이 지체됐던 이유는 아무래도 노파의 요구를 한 정신나간 짓거리로 판단한 만수 누나와의 실랑이가 아니면 따라온 아가씨와의 그것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죽은 듯이 누운 채로 더이상은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들어가도 돼요?" 불도 밝히지 않은 방안에 누워 있는 나를 들여다보며 방문 앞에서 여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내 대답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여자는 이미 노파의 손에 떠밀려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자가 방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노파는 방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탁자 위에 밝혀져 있던 촛불이 꺼지고, 안방에서 밀려나오는 희뿌윰한 불빛만이 한층 두터워진 어둠의 등판 위에서 위태롭게 어른거렸다. "내 참 드러워서 ......" 노파에 대해 그러는 게 분명한 듯한 불만을 터뜨리며 문앞에 서 있던 여자가 비로소 내 머리맡 쪽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술집에 있는 몸이라지만 잠자고 있는 사람을 끌고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내와 함께 잠을 자라니, 여자가 불만을 털어놓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아저씨 누구에요?" 얼굴도 보이지 않는 여자가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내게로 전도된 감정의 화살을 돌릴 때, 그나마 안방에서 밀려나오던 희미한 불빛마저 아주 꺼져버리고 말았다. "아저씨 누구냐니까요?"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여자는 다시 한번 앙칼진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잔말 말고 누워, 이 집 아들이야!" 나는 여자를 나꿔채 재빨리 이불 위로 쓰러뜨려버렸다. 그리고 더이상은 아무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뭐라구요? 이 아저씨가 미쳤나?" 옷을 헤집으며 파고드는 내 밑에서 여자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지 말끝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나를 거부하지는 않았다.그리하여 나는 그때부터 내가 행해야 할 대역(代役)으로서의 내 몫을 충실하게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켜를 헤아릴 수 없이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그녀와 나의 숨소리는 점차로 드높아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밑에서 용을 쓰면서 열심히 제 길을 가고 있는 여자와는 달리, 나는 전혀 다른 절정을 향해 기를 쓰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숨죽이고 서서 방안에서 밀려나오는 은밀한 숨소리를 들으며 살아 돌아온 아들을 만나기 위해 가슴 설레이고 있을 노파를 연상하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절정을 분명하게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방이 요렇게 짝 달라붙어 있으니까 아무래도 귀밝은 엄마가 모를 리 없거든. 내가 못된 짓 하는 소리를 다 듣는 것 같아서 엄마 얼굴 마주 대할 때마다 아주 마음이 찜찜하다구.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냐? 나도 엄마처럼 계속 모른 체 시치미를 떼는 게 상술까?...... 드디어 여자가 몸을 비틀며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다 싶었지만 나로서도 황망히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용을 써대는 여자의 목소리가 더한층 높아지면서 거의 발작에 가까운 괴성이 그녀의 입으로부터 터져나왔다. 허겁지겁 서둘러대는 내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조금만 더 참아주기를 바랐던 노파가 드디어는 만수를 되살려냈음인지 미친 듯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터져오른 포효와 같은 울부짖음--나는 그것이 말도 제대로 하질 못하던 노파의 입에서 밀려나온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꿈에서도 상상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수야아 !---" 거센 완력이 마지막 사력을 다하는 내 어깻죽지를 거칠게 웅켜잡고 뒤로 나동그라지는 순간...... 아아, 드디어 나는 온몸으로 진저리를 쳐대며 완벽하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혹은 무화(無化)되기 시작했다.노파와 내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진저리를 쳐대기 시작했던 것이다.견딜 수 없이 뜨거운 물줄기가 갑작스럽게 두 눈에서 밀려나와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비로소 방파제를 후려치는 파도소리가 희미하제 귓전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만수야아......" 8. 스러지지 않는 빛 내가 내무반으로 내려가기 위해 창고를 나섰을 때 비는 멎어 있었다. 대신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눅눅한 바람이 주도로변의 어둠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손목을 들어 전자 시계의 램프버튼을 눌러보았다. 노오란 조명 속으로 떠오른 자판의 숫자가 l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었다. 단지 취침만을 위해 내무반으로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무반으로 내려가는 시간만은 날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었다. 보안등이 전멸(全滅)된 주도로변의 어둠은 눅눅하고도 괴괴했다.가끔씩 미진한 바람에도 몸을 크게 뒤척이는 플라타너스 잎새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오기도 했으나, 깊어가는 구월 밤의 정적을 깨뜨리기에 그것은 너무나도 조심스럽고 절제된 미음(微音)에 불과했다. 그런 탓인지 사막을 향해 건너온 늙은 낙타처럼 어슬렁어슬렁 막사를 향해 걷는 내 발자국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렸고 또한 그것은 모든 방향에서 연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끈을 풀어헤친 전투화의 뒷굽이 포도의 지면에 맞닿아 일으키는 마찰음 때문이리라.그러나 그 신경 거슬리는 불협화음도 건성으로 들어넘기며 나는 대취한 사람의 지자(之字) 보행처럼 이리저리 발 닿는 대로 계속 전투화를 질질 끌며 걸었다. 가끔씩 일렁이는 대기에는 습기가 잔뜩 배어 있었지만 선선하게 얼굴에 와 닿는 감촉만은 부드러웠다. 어쩌면 밤사이에 낮과 같은 폭우가 또 한차례 지나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풍을 동반한 가을 장마, 연일 비 계속,기압골의 영향,전국적으로 비,동해 남서풍, 파고는 육 미터 ...... 아침에 내무반을 나서며 얼핏 들었던 그 일기예보의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오늘 오후에 쏟아졌던 폭우와 그 뒤에 잇따라 일어났던 그 어처구니없던 기상 변화는 태풍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 분명했다. 이 지역이 이미 태풍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었다.ㄷ. ㄸ, ㄷ ...... 지극히 낮은 음계의 건반음처럼 처음에는 뚜렷한 음색도 없이 그것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과 이삼 분도 지나지 않아 그것은 듣기에도 괴로운 전위 음악처럼 음색조차 분간키 어려울 정도의 폭우로 돌변해버렸다. 하오 두 시경이었다. 그때 나는 전투화와 전투복 상의를 벗어던진 채 창고 구석에 놓인 철제 의자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빠끔거리며 맞은편 벽 쪽에 설치된 대형 캔버스만 뜻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붓을 손에 들지 못한 지 벌써 며칠째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었었고 머리 속은 온통 맥락도 없는 망념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불안과 초조가 병이 된 인간처럼 담배만 빠직빠직 태우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바로 그럴 즈음에 그 음색조차 분간키 어려운 전위 음악은 들려왔다. 그때 들려온 그 뒤죽박죽의 분절음들은 차라리 빗소리가 아니었다. 빗소리가 아니라 몽롱해진 내 의식으로 무수하게 날아와 박히는 쐐기와 같은 것으로 나에게는 감지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아, 비 !"라고 나도 모르게 벙그렇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피우던 담배를 손에 든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작은 보자기만한 창유리 앞으로 가 보았다. 이제 마악 쏟아져내리기 시작한 장대비 저 뒤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산마루에는 미처 꼬리를 감추지 못한 잔광이 젖어들지 않은 습자지의 한쪽 귀퉁이처럼 뽀얀 빛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었다. 병풍처럼 부대를 에워싸고 있던 높고 낮은 산경(山景)이 일제히 지워져버린 것은 더욱더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난 일이었다. 맞은편 산중턱께에서 산운(山雲)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것을 얼핏 보았는가 했는데 그것이 봉우리로부터 산허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뿌우연 우연(雨煙)에 의해 순식간에 지워져버렸던 것이다. 가공할 만한 빗줄기였다. 기총소사처럼 퍼부어대는 빗줄기를 견뎌내지 못한 채 벌집이 되어버린 연병장에서는 어느새 고인 물줄기가 지면의 균열을 넓히며 나뭇가지 형상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판쵸를 착용하지 않은 두 명의 사병이 상체를 잔뜩 구부린 채 연병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사병 식당 쪽으로 미친듯 뛰어가고 있었다. 폭우는 삼십 분쯤 내린 뒤 거짓말처럼 멎었다. 더욱 거짓말 같은 사실은 비가 멎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하늘이 씻긴 듯 맑게 게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뭉개구름까지 태연하게 피어오르는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온 저녁 무렵의 잔광이 이른 아침의 돋을볕보다도 더욱 부신 빛으로 멀고 가까운 산색과 녹음을 조명했으니 그게 어찌 거짓말 같은 사실이 아닐 수 있었겠는가. 그러던 날씨가 또다시 끄물끄물 끄무러지다가 끝내는 질 고운 잠사(蠶絲)와 같은 세우(細雨)를 흩날리기 시작한 건 산그늘이 연병장 모퉁이까지 한껏 뻗어내리고도 한참이 더 지난 뒤였으니까, 어둘녘이었다. 산간 분지에 위치한 탓인지 부대의 어둠은 그 어느 곳보다도 빨리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어둠은 산발치로부터 밀려나와 부대의 옆구리를 끼고 흘러내리는 드넓은 강을 미끄러지듯 도하해 왔다. 그리고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려는 상륙군처럼 그 포위망을 좁혀왔다. 내가 또다시 그 끔찍한 불안과 공포감으로 인해 치를 떨며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도 사실은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한수리 (韓秀利)....... 내가 무엇 때묻에 또다시 그에 관한 악몽을 떠올리고 그로 인해 발작을 강요당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의 심장은 이미 정상적인 박동을 상실한 채 지층을 뒤흔드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처럼 쿵쿵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언제나처럼 압박감이 뒤따랐고 압박감은 곧이어 통증을 수반했다. 숨이 가쁘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증세였다.두달 전부터 생겨난 바로 그것이었다. 수리 ....... 갈팡질팡 창고 안을 마구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랴. 곧바로 그것을 전투화로 짓이겨버리고는 발작적으로 심호흡을 하다가 몸을 뒤로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이번에는 튀듯이 일어나 만세를 부를 때처럼 양팔을 치켜들고 마구 흔들어보기까지 했는 걸. 하아-- 드디어는 입이 해벌어지고 "아아악 !" 고함까지 터져나왔으니 때는 이미 늦은 때. 걷잡을 수 없는 파상적 증형(症形)이 끝내는 머리통을 쥐어뜯는 나에게 주리로 뒤틀려왔을 때. 아아, 수리 ....... 나는 기어이, 기어이는 극에 달한 발광을 견뎌내지 못한 채 창고 문을 박차고 한걸음에 뛰쳐나가, 저기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늪에다 몸올 던지고 말았다.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을 나는 그렇게 깊어가는 구월 밤의 어둠속에서 미쳐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무엇인가가 나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게 되고 그게 비라는 생각을 해낸 다음에야 나는 비로소 나의 발작이 어디에서 기인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비. 그것 때문이었다. 한낮에 쏟아졌던 폭우와 그 후의 불온했던 기상변화가 그 모든 것을 몰고 온 것이었다. 아직도 여름은 끝나지 않았구나....... 맥진해진 육신을 이끌고 다시 창고로 들어와 앉았을 때 나의 육신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정말이지 아직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가 사라져버린 지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났건만 그는 여전히 내 속에 살아서 나의 심장을 물어뜯고 있는 것이었다.어쩌면 모든 것은 지금부터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다시 시작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혹한처럼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서웠다. 그는 영원히 내 속에 살아남게 될 거라는 공포에 가까운 예감이 푸른 불꽃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내 속에 살면서 내가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나를 물어뜯게 될 거라는 참혹한 상상은 끝내 악다문 내 어금니로부터 짓이겨진 오열을 이끌어내고야 말았다. 아무도 그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기억에 대해서는 더이상 반추하지 않는데, 나는 왜 그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죽어가는 것일까.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짓이겨진 오열을 씹어 삼키며 나는 전투복 상의에서 어쩔수 없이 또다시 그 작은 약갑을 꺼내들었다. "일단 이걸 복용해 보세요. 심리적 압박감이나 불안 증세가 생겨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대뇌의 신경 계통에 이상이 생겨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또 한 가지는 심장 질환일 경우가 있습니다. 이걸 복용해 보시고, 효과가 없으연 정신 병원으로 가셔서 전문의에게 진찰을 받아 보세요" 약을 건데주던 약사는 대단히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그에게 털어놓은 증상이란 게 그에게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한심스런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반증이 분명했다. "불안해서 미치겠어요.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지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때도 있어요. 어떤 때는 심장이 금방 터져버릴 것 같다구요!" 증세를 듣고 난 약사는 그럴 만한 어떤 일, 가령 충격을 심하게 받았다거나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 같은 게 없느냐고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그럴 만한 일은 없노라 잘라 말했다.뜨거운 피가 쏜살같이 얼굴로 치솟아오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도리 없는 노릇이었다.초면의 약사에게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으며 설령 설명해 준다손 치더라도 그런 얘기가 그의 조제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었겠는가. 그저 나는 모든 증세가 까닭도 없이 나도 모르게 생겨났다는 얘기만 여러번 되풀이해 주었을 뿐이다. 약을 먹었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맞은편 벽 쪽에 세워진 대형 캔버스와 그 주변에 널브러진 물감이며 붓 따위들이 비로소 하나하나 제 모습으로 떠올라왔다. 머리통만 그려진 황소의 멀뚱멀뚱한 눈알이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황소의 순종하는 몸뚱어리와 고삐를 손에 쥐고 황소를 압제하는 듯한 냉혹한 인간상을 나는 끝끝내 그려내지 못하게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또다시 머리속을 스쳐갔다. 텅 빈 캔버스 위로 황락(荒落)하게 떠오른 저 무지한 황소의 두상이 현실의 내 처지와 너무나도 흡사하게 여겨지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순종을 하면서도 그 순종 때문에 고뇌하고 갈등해야만 하는 저 육신없는 황소의 멍청한 두상이, 아무런 거부의 동작도 었이 현실에 맹종하는 내 의식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벌써 며칠째 나는 붓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감찰참모가 보내주는 담배만 무시로 태워버려 고스란히 재를 만들어낼 뿐이었다. 창고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났건만, 톱니처럼 빈틈없이 맞물린 조직적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초기의 그 비할 데 없던 희열과 야릇한 쾌감은 간 곳이 없고, 지금은 오히려 그런 생활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거부할 줄 모른 채 맹목적으로 현실에 맹종해 온 대가로 육신의 안락을 얻었지만, 예술 행위의 기본적인 발판이 되는 양심을 버린 탓으로 내면이 썩어가고 의식에 구데기떼가 들끓는 사이비로서의 고통에서 이제 두번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시간은 넉넉하니까. 그저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고 있다가 때가 되면 다시 그리는 거야. 예술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썩어가는 내 속을 알 까닭이 없는 인간--- 나흘 전에 찾아온 감찰참모가 흘려놓고 간 말이었다. 그는 이내 사라져갔으나 그가 흘려놓고간 말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창고의 사면벽을 부딪쳐다니며 나의 육신을 두들기고 난자했던가. 망치처럼 후려치고 칼처럼 찔러대던 말의 파편들은 사홉들이 소주를 들이키고 곯아떨어졌던 그날 밤의 꿈속에까지 나타나서 나를 난타하고 또한 난도질했었다. 예술? 예술이 ! 그런 거니? 까! 예술이? 그! 런! 거 ! 니? 까아! 까!....... 손목을 들어 전자 시계의 램프 버튼을 눌렀다. 12시 20분. 새로운 날의 시작이 아니라 그 질긴 맥락에 단절이 있을 수 없는 고통이 일자(日字)의 구분도 없이 계속되어짐을 뜻하는 시간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수세미처럼 구겨진 전투복 상의를 걸치고 끈이 풀어헤쳐진 전투화를 신었다. 그리고는 철제 의자의 방석 밑에서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그 질긴 맥락에 단절이 있을 수 없는 고통을 일자별로나마 정리를 해 둠으로써 내 생존의 변화를 식별하고, 그것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자 하는, 그것은 일테면 내 존재의 마지막 인식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취침을 위해 내무반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나는 늘 그날치의 고통을 일기장의 텅 빈 여백에다가 토해내곤 했다. 오늘도 예외없는 토악질-- 예기치 못했던 폭우와 그 뒤에 잇따라 일어났던 그 불온했던 일기(日氣)의 일기(日記). 너는 개다! 너는 개다! 귓전으로 날아와 박히는 무수한 환청의 독화살. 오늘도 나는 지축을 뒤흔들며 어둠을 뚫고 달리는 한수리의 발자국소리를 들었다.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대해 왔던 지금까지의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던가? 아직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끝나지 않으리라는 자각이 죽음에 대한 음습한 예감처럼 오후 내내 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차라리 죽음만 못한 삶이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끝끝내 지워지지 않는 그 선명한 환영이 날이면 날마다 창고의 허공 중에서 내 목을 기다리는 교수대의 동아줄처럼 근뎅거리고 있다. 끝끝내 지워지지 않을 모습을 단 몇 시간 동안이나마 약에 의존해서라도 지워보고자 하는 이 참혹한 현존이여. 나는 그를 극복할 수 없다. 어느 누가 그를 극복할 수 있으랴. 살아서 욕되지 않을 수 없는 족속들 앞에, 그는 이제 하나의 깃발 같은 존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의 발길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고원에 우뚝 꽂혀 펄럭이는 존재의 표상. 이제는 그가 끝끝내 스러지지 않을 한 줄기 빛이라는 사실을 내 자신에게조차도 속이질 못하겠다. 수면(睡眠)의 깊은 늪으로 잦아드는 순간에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너,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빛이여. 우리 모두가 너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어느 한 순간인들 우리들의 삶이 욕되지 않을 수 있으리 ....... 1. 공병대에서 근무하던 사병 하나가 본부중대로 전임 오게 될 거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건 작년 늦가을, 3개조로 나누어 일 주일씩 실시된 유격훈련이 모두 끝난 직후부터였었다. 상병으로 진급하고도 몇 달이 더 지난 뒤였으므로 나의 군대생활은 바야흐로 터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체념이 빠르면 빠를수록 군생활의 재미를 그만큼 빨리 터득하게 된다는 속설이 아니더라도, 나의 군경력은 그런 재미를자연스럽게 터득해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넉넉한 밥그릇 수를 확보하고 있을 때였다. 태어나던 날부터 입대하기 전까지, 25년이라는 장황한 시간 동안을 사회 생활의 온갖 속습에 젖을 대로 젖은 몸으로 입대를 했으니 입대 후에 맞이해야 했던 생활적.정신적 혼돈과 고통에 대해서야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내 경험을 통해 보면 입대란 일종의 실종이었다. 상실이었으며 또한 재생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식차원을 넘어선 본질적 전환은 대단히 파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내가 놀랐던 것은 그 모든 일들이 재론의 여지없이 가능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25년 동안 사회에서 길들여졌던 후천적 관습 인자가 완전히 거세되고, 그러고도 다시금 재생될 수 있다는 신비 !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신비가 군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는 말을 즐겨 했는데, 사실 군대가 아니라면 그런 본질적 파괴 행위와 재생의 효력은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십상일 것이었다. 그런 놀라운 변신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않는 한 군생활이 오로지 불안과 초조로 범벅된 고통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본능적 깨달음은 이미 제복을 몸에 걸친지 며칠 되지도 않아 우리들의 중추신경을 완전히 점령해 버렸고, 그때로부터 우리들의 변신은 불가불 적극성을 띄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런 모든 과정---실종과 상실, 그리고 재생---을 거치면서 모든 군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비로소 하나의 <군인>이 되어 갔던 것이고,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닌 <일개 군인>으로서의 획일적 일원으로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울한 변신이 아닐 수 없었다. 공병대에서 근무하던 사병이 본부중대로 전입해 오리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이번에는 그가 우리 내무반으로 배속되게 되리라는 얘기가 떠돌았다. 우리 내무반의 내무반장이었던 김태영(金泰榮) 병장이 제대를 했으므로, 그에 따른 인원 충당으로 그렇게 하라는 지시를 중대장이 이미 내렸다는 것이었다. 전입해 올 사병의 계급이 상병이라는 얘기를 듣고 난 다음부터 나는 마음 한구석이 은연중에도 불편해짐을 느껴야만 했다. 그가 상병 몇 호봉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까딱 잘못하다간 족보에도 없는 윗고참 하나를 더 받아들이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찜찜한 우려감 때문이었다.그렇지 않아도 평화주의자로 소문났던 전 내무반장이 제대하고 난 뒤부터 내무반 분위기가 영 살벌해져서 행동이 사뭇 조심스러워지기만 하던 판국이었는데, 뜻하지 않게도 윗고참까지 하나 더 받아들이게 된다면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내게는 득될 게 털끝만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김태영 병장의 단호한 평화주의적 태도 때문에 차기 내무반장입네 떠들고 다니면서도 기실 내무반 내에서는 활갯짓을 못해 몸살을 않던 허병천(許丙干) 상병이, 상병 8호봉으로 기어이는 내무반장이 되고 말았으니 그 살기등등한 기세야 이루 말할수 없는 지경을 이루고 있었다. 타고난 천성 자체가 다혈질인데다가 어려서부터 여러 군데의 인쇄소를 전전해 다니며 제멋대로 자라난 탓에, 거칠 대로 거칠어진 과격성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만한 것이 되어 있었다. 일병 시절에 이미 고참 구타 건으로 입창 경력을 지니게 되었다면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까? 업무 시간 중에도 늘 술에 취해 있을 정도로 그는 정신 질서 체계가 이미 파괴된 인물이었다.중대장실에 보관되어 있는 그의 신상기록카드 소견란에는 적색 볼펜으로 <문제 보호 사병>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그에게 분대장 임명장을 수여하던 날, 중대장은 농조이긴 했으나 사뭇 뼈가 담긴 우려감을 임명장과 함께 그에게 수여했다. "내무반장도 되고 했으니, 이젠 술 좀 고만 마시고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해라" 중대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고참들의 행동이 군생활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고참들의 생각과 행동이 곧 졸병들의 군생활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인 만큼, 고참들은 늘 자기 한 몸 편해질 생각말고 졸병들의 신상과 애로사항을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오랫동안 중대장 생활을 해오면서 느낀 바이지만, 사병들에게서 느껴지는 가장 나쁜 점은 자신들도 분명히 고달픈 졸병 시절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고참이 되고 나면 자신들은 마치 졸병 시절 없이 곧바로 고참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이다. 그 모든 게 다 군대이기 때문에 그런 양 얘기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군대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는 사회가 분명하다. 그러니만큼 각 내무반장들은 졸병들을 잘 보살피고 내무반 운영에 각별히 신경을 써서 화기애애하고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모든 사병들의 군생활이 재미있고 활기차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써 주기 바란다" 허상병에게 분대장 임명장을 수여한 뒤 전 중대원들에게 중대장이 강력한 어조로 당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날밤 점호 시간에 신임 내무반장이 대무반원들에게 내뱉은 얘기는 중대장의 그것과는 상극을 이루는 것이었다. "화기애애하고 가족적인 분위기 ? 웃기지 마라. 그렇게 좋은 분위기속에서 살고 싶은 새끼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집구석으로 돌아가라. 내 신조는 화기애매하고 가축적인 분위기니까 !" 내무반 생활은 말 그대로 살얼음을 밟고 가듯 아슬아슬하게 진행되었다. 폭군은 언제나 내무반용 철제 의자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그 가늘게 찢어진 실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내무반원들의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혀만 날름거린다면 먹이를 앞에 둔 뱀의 형상 그대로였을 것이다. 내무반원들의 언행은 순식간에 위축되어 뱀 앞에 선 개구리만도 못한 꼴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거개의 폭정이 당위성과는 무관하고 또한 맹목적이거나 단순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듯, 폭군의 발작은 우리들의 조심스런 행동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수시로 터져나왔다. 일종의 성격 파탄이었다. 군대생활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트집 안 될 게 어디 있겠는가.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걸면 귀걸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폭군의 변화무쌍한 발작은 시도때도없이 우리들의 작디작은 머리통들이 무슨 폭격기나 된다고 <원산폭격>을 감행케 했고, 열 개의 손가락을 맞물려 만들어낸 손깍지 하나로 이 거대한 지구를 통째 밀고 당기게 했다. 어디 그뿐이었으랴.전군이 장을 이루는 취침 시간에 팬티 바람으로 알철모를 바닥에 깔고 엎드려 <팬텀기>를 타면서 토악질을 해대게 하는가 하면 출입문 문틀에 대롱대롱 매달려 <오징어 말리기>를 하게 했으며, 육신이 무슨 철근이라고 끝내는 <한강철교>까지 만들게 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합의 종류가 무려 이백칠십 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무슨 무용담을 늘어놓듯 공공연하게 발설하곤 했다. 어떤 날 밤은 우리들의 몸에서 비오듯 흘러내린 땀이 내무반 바닥을 빈틈없이 적실 때까지 그가 지닌 그 무수한 레퍼터리의 제물이 되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구령이 없어 몸을 일으켜 침상을 올려다보니 그는 술병을 손에 든 채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져 있었다. 문득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불 같은 충동이 엄청난 악력이 되어 손아귀로 몰려들었다. "중대장한테 보고할까요?" 감찰실 근무 사병인 박일병이 내게 말했다. 오열이 뒤섞인 어조였으나 그는 용케도 이빨을 맞물고 잘 견뎌내고 있었다. "소용없는 짓이다" 나는 내 자신이 더없이 비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체념적인 말 이외에 달리 더 해줄 수 있는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군대생 258 활에 익숙해졌다는 얘기는 곧 군대의 속성에 그만큼 깊이 젖어들었다는 얘기와 하등 다를 게 없었으므로. "이렇게 당하기만 할 겁니까! 정 안 되면 내일 사무실에 올라가 참모한테라도 얘길 하겠습니다" 견딜 만큼 견뎌오지 않았느냐, 더이상 어떻게 견뎌내겠느냐, 이제 더는 견뎌낼 재간이 없다는 뜻으로 그의 얘기는 나에게 들렸다. "소용없는 짓이라니까 !" 동어반복이었으나 나의 목소리는 좀전보다 훨씬 커지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적어도 허상병이 내무반장이라면 나는 명색이나마 차기 내무반장이었는데, 거기에 상응하는 대접은커녕 즐비한 졸병들과 하등 다를바 없는 대접을 받고 있었으니 졸병들의 울분에 응하기보다 내 자신의참담한 처지로 인해 더욱 깊고 쓰라린 비애를 맛보고 있었던 탓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날밤 우리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은 문자 그대로 고스란히 <우리끼리 놀아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내무반장이 잠들었다고 섣불리 단정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가 잠들었다는 단정을 내렸던 것일까. 그는 깨어 있었다. 그날밤 우리들 사이에서 분분하게 튀어 올랐던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발생했던 일에 대한 후유증은 한 달이 넘게 계속됐다. 그 답답하고 막막하고 미칠 것만 같던 매순간마다의 감정적 소용돌이를 무슨 수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그래도, 그저, 그냥, 그렇게, 그러면서도...... 살아나갔다. 늘 너무 똑똑한 체를 해서 병신취급을 받는 인간들처럼. 그 무렵부터 내무반원들--물론 나도 포함된다-- 의 태도가 전반적으로 달라져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요컨대 그 이전까지 내무반장에게 나타내보이던 내무반원들의 적개심이 이상야릇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젊은 놈들이 젊은 시절에 가장 비굴하게 생각하고 또한 혐오할 수밖에 없는 것들 중의 하나인 그것의 이름은 <아부>였다. 폭군이 용인된 권력을 합리적인 일에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우리 모두는 마치 선험적 주관(先驗的主觀)처럼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모색해 봐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어 보이자 결국에는 변질된 삶의 요령들을 체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폭군으로부터 표현되는 어떤 종류의 언행 앞에서도 진지한 자세를 나타내보였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 간이 뒤집힌 사람처럼 미친 듯 웃어댔고, 그가 조금만 시무룩해지면 모두 초상집에 찾아온 사람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몸을 파는 창녀일망정 그렇게깊은 자괴감만은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혀를 깨물고 칵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눈물겹고 욕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태도가 더욱더 그런 쪽으로 기울어져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무렵부터 폭군의 태도에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양질의 변화 때문이었다.변화에 대한 좋은 물증처럼 폭군이 가끔씩 내무반원들에게 농을 걸어왔다. 그러면 농에 걸린 사람은 적극적으로 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그런 날은 탈이 없었다. 결국 폭군이 기다리고 노린 것은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 모두를 비굴하게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권위를 확고하게 다지겠다는 놀라운 간계. 결국, 잘못은 못배운 그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배우고도 배운 만큼의 용기도 삶의 태도도 지켜나가지 못한 우리 모두에게 있었던 것이다. 공병대에서 근무하던 한수리 상병이 본부중대 우리 내무반으로 전입 및 배속되게 된 것은 그 무렵의 어느날이었다. 만추의 농익은 노을빛이 황홀할 지경으로 서편 하늘을 물들여나가던 저녁 무렵에 그는 더블백 하나를 달랑 메고 중대 서무계와 함께 우리 내무반으로 들어섰는데,그 외관이 몹시도 메말라 보였다. l미터 75씬티 쯤으로 보이는 신장은 흡사 잎이 다 떨어진 싸리나무처럼 허전하게 보였다. 살이 없어 보이는 뺨과 퀭한 두 눈, 굳게 다문 입술이 한 데 어울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강직성을 감지케 하는 얼굴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내무반 창유리로 밀려든 노을빛이 불콰한 술기운처럼 그의 안면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전입온 한상병입니다" 중대 서무계인 고일병이 내무반장 앞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간지를 보고 있던 내무반장은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어 서무계 뒷쪽에 더블백을 내려놓은 채 무표정하게 서 있는 한상병에게로 시선을 보냈으나 이내 본체만체 다시 주간지로 시선을 떨어뜨렸다.머쓱해진 서무계가 등을 돌려 이번에는 나를 향했다. "상병 2호봉이니까 정상병님 다음 관물함을 사용하면 될 겁니다" 서무계가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침상에서 총기 소제를 하고 있던 졸병 하나를 불러내 한상병의 관물 정리를 도와주게 했다. 그가 나보다 고참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동안의 찜찜했던 내 기분을 말끔히 척제해주는 것 같았다. 대강의 관물 정리가 끝나자 그는 손가락으로 모자 챙을 밀어올리며 침상에다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는 전투화의 끈을 풀어헤쳤다. 전투화를 벗어던지고 전투복 상의까지 벗은 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관물함을 열고 세면백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무반을 한바퀴 휘이 둘러본 다음 슬리퍼를 질질 끌며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남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조심성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행동이었다.인간은 풍토와 체험의 총화라더니, 아직 이곳 실정을 잘 몰라서 저러는 것이려니 생각하면서 나는 그에게 가능한 한 빨리 제반 교육을 시켜야 하리라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가 세면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도 내무반장은 계속 주간지에다 시선을 파묻고 있었다. 세면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투복 상의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고 침상에 걸터 앉았는데, 바로 그때였다.그가 성냥을 그어 마악 담뱃불을 붙이려던 찰나. "일어나 ......"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불분명한 말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내무반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무반장 쪽을 향했다. 거기 말고 그런 말이 흘러나올 만한 곳이 달리 더는 있을 수 없으리라는 순간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누구를 향해 던져진 말인지는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일어나, 새꺄 !"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손에 들려 있던 주간지가 내무반장으로부터 한상병 쪽으로 날아간 건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 주간지는 용케도 한상병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뒤쪽으로 날아갔으나, 한상병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없이 도대체 이게 웬 뚱딴지 같은 짓이냐 하는 엉뚱한 표정으로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만 입에 문 채 멀뚱멀뚱 내무반장을 쳐다보았다. "엇쭈, 이것 봐라?" 한상병을 노려보며 내무반장은 대단히 느린 동작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중대에서, 그것도 자신이 엄존하는 내무반으로 전입을 왔으니 그냥 넘어갈 턱이 없었다. 아예 초장부터 기를 죽여 놔야만 자신의 권위가 만에 하나라도 손상 당하지 않으리라는 속된 인간의 저열한 속셈이 분명했다. "......" 그러나 뱉아야 할 담배는 뱉지 않고 한상병은 자기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내무반장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이 새끼 봐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골병대 골통을 죽이려 들어 이게 ? 안 일어나 !" 내무반장이 그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타악,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 담배가 날아가자 한상병의 몸이 천천히 일으켜 세워졌다. 내무반장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며 꿋꿋하게 마주 선 한상병의 코앞으로 붙을 것처럼 들이밀어졌다. 키는 한상병이 훨씬 커 보였으나 몸집은 내무반장의 다부진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러나, 내무반장을 쏘아보는 한상병의 눈빛만은 잘 벼린 칼날처럼 차고 날카로웠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알고나면 기겁을 하게 되리라는 야릇한 기대감이 내무반장의 표정에는 잔뜩 번져 있었다. "...... 모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내무반장이 누군지도 모르고 이 내무반으로 굴러왔단 말이지 ?"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러닝셔츠 바람으로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웃통을 홀랑 벗고 앉아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모셔 주길 바라는 그런 위인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가 본부중대라는 사실뿐이다"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을 내무반원들은 숨죽인 채 관전하고 있었다. 경이로움이 가득 담긴 눈빛들이었다. 모두가 한상병의 겁없는 행동거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웬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자릿자릿해져 옴을 느끼고 있으리라. "집합 !" 잠시 눈알을 굴리고 있던 내무반장은 무슨 간교한 계략을 생각해냈음인지 이번에는 내무반원들에게 집합을 명했다. 넋을 잃고 앉아 있던 내무반원들은 끓는 물을 뒤집어쓴 개떼처럼 황망히 일어나 서열순으로 도열했다. "자, 잘 들어라" 도열해 선 반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무반장은 한상병을 노려보았다. "얘는 내 바로 밑에 있는 정상병, 얘는 오상병, 얘는......" 자신의 내부에 은밀하게 숨겨진 간계에 대한 든든한 자신감 같은 게 소개 아닌 소개를 해나가는 내무반장의 얼굴에서는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무반원 소개를 끝낸 그는 한상병 쪽으로 몸을 돌린 다음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자신의 소개를 끝으로 간계를 행사하기 위한 약식절차의 막을 내렸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겠냐?" "......" 한상병은 대답 대신 내무반장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무반장의 간계를 이미 눈치챘음인지, 그의 양미간은 긴장된 형상으로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자, 알았으면 이제 박아 보시지" 내무반장은 가늘게 뜬 실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터질 듯 터질 듯하면서도 지금껏 그가 일말의 이성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내부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간계를 기필코 실현시키고야 말겠다는 놀라운 집착력 때문이었다. 먹이를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그것을 기필코 해치우고야 마는 야수성 끈기 말이다. 내무반장의 입가에 흐르는 야비한 웃음기가 정박아들의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끈끈한 타액을 연상케 했다. 더 이상의 승강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했음인지 한상병은 몸을 45도 우측으로 틀어 시멘트 바닥에다 곧바로 머리를 박았다. 예기치 못했던 순종-- 그것이 우리들의 눈에는 이런 일을 여러번 겪어본 사람만이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담백한 체념처럼 보여졌다. "원위치 !" <원산폭격> 정도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내무반장은 금세 변덕을 부렸다. "......" 머리를 들고 일어나 그는 다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깍지 껴" "......" 시키는 대로 한상병은 열 손가락을 맞물리게 하여 깍지를 꼈다. "엎쳐 !" "......" 시종일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동작을 취해 주고는 있었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승복인지, 시위인지, 혹은 내무반장 뜻대로 본격적인 거세 과정인지도. "지금부터 우렁찬 목소리로 풋샵 오백 개를 실시한다. 알겠나?실시 ! " 내무반장은 도열해 선 내무반원들에게 <너희들은 침상으로 올라가 대열을 갖추고 앉아 있으라>는 시늉을 말 한마디 없이 엄지손가락 하나로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내무반장의 명령을 복창한 다음, 그는 그 단조로우면서도 힘들고, 힘들어서 괴롭기 그지없는 괄굽혀펴기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 과연 손깍지를 끼고 팔굽혀펴기 오백 개를 해낼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것인지. 두고두고 얘기가 된 한수리의 <풋샵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무울 일고옵, 스무울 여더어얼......" "일흐은 두우울, 일흐으은 세에에엘......" "배에에엑 아흐으으...... 으은......" "이배에에 ...... 서르으은...... 두우, 두우...... 우우우울......" 그게 끝이었다. 나뒹굴면 일어서고, 일어서면 또 나뒹굴면서도 그 허비(虛備)한 골육은 놀랍게도 이백서른두 개의 팔굽혀펴기를 끝내고 나서야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털퍼덕, 그의 몸뚱어리가 썩은 나무토막처럼 옆으로 나뒹굴었던 것이다. 이백서른두 개를 실시하는 동안 입은 헤벌어지고 눈빛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부유했지만, 넘어지면 일어서고, 넘어지면 또 일어서면서도 그는 결코 굴복하는 자세를 보이진 않았다. 죽어가는 짐승처럼 꿈틀거리면서도 끝끝내 일어서고자 했던 건 그의 육신이 아니라 그의 정신이 분명했다. 부당한 처사에 대한 무서운 정신적 시위. 정신이 육체를 떠나지 않는 한 그것은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이백서른두 개의 팔굽혀펴기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정신은 그의 육체를 떠났으니까 말이다. 그의 육신을 내려다보며 우리 모두는 뼈를 짓빻고 살을 태우는 듯한 안타까움과 아픔을 느꼈지만, 그보다도 더욱더 예리하게 우리들의 양심을 찔러대며 치솟아올랐던 것은 다름아닌 <부끄러움>이라는 어휘였다. 그러나 그의 늘어진 육신을 내려다보는 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눈물겨운 자각에 시달리면서도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한심스런 한숨밖에 없었다. "세면장으로 데려가 !" 내무반장의 얼굴에는 그를 거세시켰다는 데 대한 성취욕보다, 숨기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역력하기 때문에 드러나보일 수밖에 없는 깊은 수심이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2. 수리가 전입해 온 뒤로 내무반 분위기는 가일층 악화 일로를 걸었다. 전입온 첫날 그가 내무반장에게 보였던 태도가 순간적 감정 대응이 아니라 그의 체질 자체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내무반원들이 가지는 우려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게다가 내무반장의 태도가 상대적으로 조폭스러워져 갔으므로, 뭐가 터져도 조만간에 크게 터지리라는 깊은 불안감이 모든 내무반원들의 얼굴에서 전운처럼 감도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그쯤 되고 보니 내무반 생활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나의 역할이란 게 그 어느때보다도 중차대한 것으로 부각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빠른 시일 내에 그에게 현재 우리 내무반 내의 특수 상황을 이해시키고 직응해 줄 것을 당부하리라, 나는 틈날 때마다 기회를 엿보아야만 했다. 전입해 오던 첫날 발생했던 수리와 내무반장과의 극한 대립은 단 며칠 사이에 전 중대원들에게 파급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부터 수리에 관한 새로운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돌기 시작했다. 소문의 내용은 다양했다. 공병대 있을 때부터 끝내주는 <골통>이었다는 것. 공병대 병장을 때려서 영창을 갔다온 뒤 공병대장과의 면담을 통해 본부중대로 오게 됐다는 것. 성격이 워낙 날카롭고 오기와 독기가 강해서 그 별명이 <독수리>가 됐다는 것.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졸업했다는것. 입대 전에 이미 국전 입상 경력을 얻었다는 것 등등-- 어디서들 주워들은 것인지 그 소문의 내용은 한 인간이 실질적으로 지닐 수 있는 개인적 경력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신상에 관해 좀더 신빙성 있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건 중대원들 중에서도 가장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 정평이나 있는 중대본부 서무계 고일병을 통해서였다. 그의 전언에 의하면 수리는 미대 출신으로 조각을 전공했는데, 졸업하던 해에 국전에 입선했다는 소문은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대학 재학시절 4년 동안을 줄곧 학교 작업실에서 먹고 자다시피 하면서 작품제작에만 몰두해 왔을 정도로 그의 조각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공병대에서 상병이 될 때까지 저지른 사건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그게 대부분 <부당>이라든가 <불합리> 따위의 어휘를 사용하면서 고참들에게 항변하다가 생겨난 일이라는 것 등이었다. 따지고 보면 군대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자하면 불합리하지 않은 게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니, 한수리 그는 결국 자기 스스로가 군생활에 적응하지 않기 위해 그런 짓을 고의적으로 일삼고 있는 건지도 모르리라는 나름대로의 판단까지 중대 서무계는 덧붙여서 내게 전했다. 그리고는 야릇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도 미대 출신이니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게 아니냐? -- 그런 눈빛이었다. 그럼 그가 본부중대로 오게 된 동기가 뭐냐고 내가 묻자 서무계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 한상병이 오랫동안 틈틈이 시간을 내서 깎아온 목각을 내무반장이 슬쩍해서 중대장에게 갖다바쳤고 중대장은 그걸 공병대장에게 상납했는데, 공병대장이 그걸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거예요" 나는 물었다. "무슨 목각이었는데 ?" "여자 나상(裸像)이었다고 들었는데 정확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암튼 목각이 없어진 뒤 한상병은 미친 듯 그걸 찾았는데, 막판에 이르러 전후 사정을 다 알게 되자 내무반장을 개처럼 물어뜯었다지 뭡니까?그것 때문에 영창을 갔다왔다는 소문이 난것 같은데, 영창을 가지는 않고 영창 대기만 하다가 그가 바로 목각을 깎은 주인공임을 알게된 공병대장의 특별 배려로 입창 대기에서 해제됐다고 합니다. 그 직후 공병대장과 면담을 했는데 한상병이 미대 출신이고 국전 입상 경력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장이 그에게 자기 당번병으로 있지 않겠느냐고 했답니다. 그런데도 한상병은 그걸 단호히 거절했다지 뭡니까? 그리고 자신을 다른 중대로 보내 달라는 얘기만 거듭했다는 거예요. 결국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졌고, 그를 위해 공병대장과 공병대 중대장이 우리 중대장에게 전화를 여러번 했었어요. 특이한 놈이니까 신경 좀 써 달라고요" 서무계의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정상병님도 미대 출신이니까 신경 좀 써 주세요" "신경 써 줄 게 뭐 있어? 군대생활 하루이틀 한 것도 아닌데" 한수리에게 얽힌 전후 사정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마악 행정반을 나서려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출입문께에서 나는 다시 한번 걸음을 멈추었다. "보직 결정은 됐나?" "아뇨. 아직 안 됐습니다. 다음주쯤 결정되겠죠 뭐" 대답없이 고깨를 끄덕이며 나는 행정반을 나섰다. 현재 우리 내무반 내의 실정으로 보아 한수리의 전력(前歷)이 결코 달가운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해진 셈이었다. 그는 결국 자기 스스로가 군생활에 적응하지 않기 위해 그런 짓을 고의적으로 일삼고 있는것이 아니겠느냐....... 서무계가 했던 말 중에서도 <적응>이라는 어휘가 높은 조도를 지닌 탐조등처럼 내 의식의 암층에 파묻혀 있던 어떤 부식된 기억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다. 적응하는 것만이 최상의 미덕이 될 수밖에 없는 제복의 성상(星霜). 그 중에서도 적응의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대두되는 저 암우(暗愚)했던 졸병 시절의 자아상실 장면을 비추어보라. 미대를 졸업하고도 6개월을 더 놀던 끝에 입대를 해야만 했던 나의 졸병 시절은 오로지 고통 그 자체로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왔으니 대부분의 고참들이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점은 둘째치더라도 25년 동안 지녀온 사고 체계 그 자체를 뜯어고쳐야만 한다는 게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큰 고통이었다. 심지어 나는 내가 미대를 다녔다는 사실을 저주했던 적도 있었다. 예술이 구속 없는 자유 그 자체를 본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할 수 있었던것도 바로 그런 데서 생겨난 체득적 인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었다.고교 시절부터 그림을 그린답시고 생각과 행동을 일상적인 것에서 이탈시켜 나갔으니 생각해 보라. 그런 심신으로 조직력과 그것을 지탱시켜 주는 부수적인 제약들---가령 명령이라든가 복종, 혹은 군기따위들-- 에 얽매여 살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고통으로 떠오를 것인가를. 속설대로 어차피 치뤄야 할 것이라면 군대란 확실히 빨리 다녀올 수록 좋은 곳이었다. 무엇을 좀 아는 나이에 군인이 된다는 건 육체적으로 오는 고통과 괴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 <무엇을 좀 안다>고 하는 어줍잖은 의식 때문에 만사가 다 곤욕스런 것으로 여겨지게 되니까 말이다. 요컨대 군대란 그 <무엇을 좀 안다>는 것이 철저히 배격돼야만 유지될 수 있는 사회, 획일화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철저한 조직체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곳에서 구속 없는 자유, 그 자체를 본질로 하는 예술적 기질을 지니고 살려 한다는 게 어찌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일병이 될 때까지, 근 반년 동안 나의 의식은 저 깊고 어두운 무감각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한 채, 꿈틀거릴수록 더욱 깊이 파묻혀가게 되는 끔찍한 곤욕을 치러내야만 했었다. 정상적인 대뇌 활동이 정지된 채 머리가 굳어지는 듯한 안타까운 자각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괴로운고문관 신세를 오랫동안 면치 못했다. 꿈꾸듯 몽롱한 눈빛으로 날이 갈수록 멍청해져 가는 나를 고참들은 이렇게 놀려대곤 했었다. <내가 왜 이럴까? 사회에서는 이러지 않았었는데 내가 왜 이럴까? 짬밥먹고 또라이가 됐나봐, 내가 왜 이럴까......> 그러던 내가 변신을 시작한 건 일병 2호봉 무렵부터였다. 변신이가능해진 이유는 간단했다. 군대에서 자신을 지켜나간다는 게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나는 도달한 것이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거대한 무형의 벽을 인간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는 씁쓸한 자각으로부터 나의 변신은 시작된 셈이었다. 거기서부터 내 자신 -- 물론 본질적인 부분까지 포함된다-- 의 새로운 면목(面目)을 드러내보이기 위한 과감한 탈바꿈은 시작된 것이었다. 일단 변신이 시작된 뒤부터 정신적 고통은 씻은 듯 사라졌고, 변신은 또다른 변신을 끝없이 잉태해 나갔다. 일병 8호봉 때 내가 각 중대에서 분기별로 한 명씩 선정하는 모범 사병이 되어 표창장을 수여받고 포상 휴가까지 다녀왔던 일은 내가 추구해 나간 변신의 종류가 어떠한것이었는지에 대한 훌륭한 물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쯤되면 변신에 관한 한 더이상의 언급은 사족이 되고 말리라. 나의 경험을 토대로 보자면 수리는 아직도 변신 이전의 단계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했다. 변신을 시도하고자 했던 나의 적극적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변신하지 않기 위한 적극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야기시킨 모든 사고라는 게 결국은 그런 자아상실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모면해 나가기 위한 방편의 일종일 거라는 짐작은 확신보다 더 강렬하게 나의 머리 속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우리 내무반과 같은 특수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자신을 지켜나갈 수있을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미지수라는 결론밖에 내려지는 게 없었다. 그 부분에 관한 의구심은 뜨겁고 강렬하게 치솟았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아무것도 예견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수리와 내무반장, 그 어느 쪽에서 한치나마 여유 있는 양보의 기색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인가. 완전한 암중 모색이었다. 수요일, 내무반 대항 축구 시합으로 대신된 전투체력이 끝나고 났을때 나는 드디어 수리를 교육시킬 수 있는 호기가 왔다는 생각으로 강변에서 그를 불렀다. 중대원 전원이 땀에 젖은 몸을 씻기 위해 부대 옆구리를 끼고 흘러내리는 강변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중대원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강변에 좀 남아 있으라고 내가 그에게 말했을 때 그는 대답없이 그저 내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며 가볍게 한 번 고개만끄덕였다. 그보다 앞서 강변에 남아서 수리를 교육시키고 가겠노라는 귀띔을 나는 내무반장에게 했었는데, 그때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러닝셔츠를 어깨 위에 걸친 채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이 나를 지나쳐 갔다.그것이 곧 그의 긍정이자 부정이었다. 결과가 나쁘면 부정이 되고 결과가 좋으면 긍정이 되는, 그것이 곧 그의 대답법이었던 것이다. "저 위로 올라가자" 중대원들이 모두 강변을 떠나고 났을 때 나는 강 상류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내가 먼저 앞장을 섰다. 가을 하오의 은은한 햇살이 수면위에서 은빛 고기떼의 눈부신 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지난 여름 장마철의 그 엄청나던 몸부림과 울부짖음은 어디로 가고, 강은 이제 혼자 사는 중년 여자처럼 은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병풍처럼 즐비하게 펼쳐진 강 건너편의 산세가 그 뿌리를 강심에 박고 강류와 함께 힘차게 뻗어나간 수려한 경관 지대였으나, 군사 통제 지역이었으므로 이 일대 어디에서건 군인을 제외한 민간인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류쪽으로 십 분쯤 더 올라가면 산세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기암 괴석으로 장관을 이루기 시작하는데, 여름철에는 그곳에 임시 방갈로 시설이 갖춰져 <별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장군 전용 하계휴양소가 되기도 했다. "여기 앉자" 넓적한 마당석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앉자는 나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넘기며 그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비경을 처음 발견해낸 사람처럼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처음 와 보나?" "예" 그는 비로소 제정신을 차린 듯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어때 ?" 나는 담배를 꺼내 그에게 권했다. "훌륭하군요" 그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들었다. "왜 여길 한 번도 못 와 봤지?" 성냥불이 내게 들이밀어졌다. "공병대 생활이 그렇지요 뭐. 작년 여름에 저 윗쪽 어디다 휴양소를 설치한다고 여러 명이 나가는 걸 봤었는데" 그는 말을 중단하고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때도 못 나갔었어요" "공병대 생활이 괴로웠던 모양이지 ?" "공병대였기 때문이 아니라 제복이 괴로운 거겠죠" 수면에서 반짝이는 햇살이 눈에 부셨다. "어차피 해야 할 거라면 적응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글쎄요......" "어려울 것도 없어. 마음 먹기 달린 거니까" "...... 그런 마음이 먹어지질 않는군요" "그럼 ?" 강을 향했던 나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돌려졌다. "그저 ...... 있는 그대로 살겠다는 것뿐입니다" "군대는 단체가 아냐?" "미명입니다" "미명 ?" "그렇죠. 단체의 구성원이 모두 로보트처럼 똑같아져야만 한다는 규정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꽁초를 앞쪽으로 힘껏 튕겨 버렸다. "틀림이 없는 얘긴데, 군대란 속성이 규정보다 강한 사회야. 네 생각을 그대로 실천해 나가다 보면 그런 속성 때문에 다수의 희생이 뒤따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기지 않겠냐?" "속성은 속성에 젖은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겁니다. 다수의 희생을 우려한다는 건 결국 속성의 우월성을 인정한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인정하는 게 오히려 유리할 경우도 있어. 특히 현재 우리 내무반 내의 상황은 더욱 그렇다. 네가 오기 전까지의 극심했던 파란이 한동안잠잠해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런 것을 내무반원 모두가 인정해주기 시작한 데서 생겨난 효과인 셈이었다구. 너의 행동 여하에 따라 앞으로의 전체적 분위기가 좌우되리라는 건 모든 내무반원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러니 웬만하다면 너도 우리와 행동의 보조를 같이 해줬으면 하는 게 나만이 아닌 내무반원 모두의 바램이다" "......" 나의 진지한 협조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예술에 관한 너의 고유 세계가 침식되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 모양인데,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미대 출신이다" 나는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물론 동류(同類)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한 뒤에 그를 설득해 보겠다는 얄팍한 속셈으로 뱉어낸 말이었다. "그래서요?"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던 동작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그의 눈빛을 마주 대하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아, 실패로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실패로구나!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얄팍하게나마 동류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나의 속셈을 그가 너무나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낯뜨거움이었다. 동류가 아니었구나 ! 낯뜨거운 순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이번에는 그 모든 것들이 뒤엉켜 뜨거운 불덩어리처럼 가슴 속에서 치밀어올랐다. "그럼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고함이 강 건너편의 산기슭에 부딪쳐 너울거리는 잔해만 되돌아왔다. 그럼, 뭘, 어찌, 거냐, 거냐, 거냐....... "이건 말이죠." 그는 만지작거리던 돌멩이를 든 채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집단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순간, 뒤로 젖혀졌던 그의 상체가 접히듯 앞으로 굽혀지며 손에 들려 있던 돌멩이가 쏜살같이 강 쪽으로 날아갔다. "내 자신과의 싸움일 뿐입니다" 퐁 ! 날아간 돌이 떨어지며 수면을 깨는 소리가 명쾌하게 들려왔다. 잔잔하던 수면의 한가운데서 일어난 잔물결이 점차로 멀리, 그리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번져나가는 게 앉은 자리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파문이었다. 늦은 하오의 태양이 거세당한 짐승의 눈빛처럼 몽롱한 기색이 되어 산봉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3. 수리에 관한 공병대장의 배려가 반영됐음인지 그는 끝발 좋고 편하기로 소문난 중대본부 행정반의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공병대장의 배려가 아니라면 수리의 전력을 알게 된 중대장 나름대로의 우려감-- 일테면 공병대에서처럼 늘 골머리를 썩이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때문에 자신의 손이 늘 미칠 수 있는 곳에다 그를 두고자 했음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의 보직 결정은 그가 이미 <골치 아픈 존재>로서 명실상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분명했다. 중대 행정병의 업무란 뻔한 거였다. 중대 병력 현황 파악, 병력 지원 부처(部處)간의 업무 연락, 보급품 수령 및 내무반 분배,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 외출조 상신, 한 달에 두 번씩 휴가 상신, 때가 되면 전역 상신, 그리고 중대장, 인사계의 잔심부름이나 잔일치레 따위들.일과 시간 중의 주업무라는 게 대강 그런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업무가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것들이고 손끝에서 시작돼서 손끝에서 끝나는 것들이기 때문에 뭉기적거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다는 이유 외에도, 중대장과 가장 가까운 측근이라는 점, 외출 휴가 등 이른바 <끝발>을 손에 잡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색은 않더라도 중대원들의 심리 속에는 중대본부 행정병에 대한 동경과 질시가 얄팍한 조심성과 함께 미묘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터전에 수리가 중대 행정반의 터줏대감인 고일병의 선참자로 그 보직을 받게 되었으니 그게 잘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이 그것밖엔 없다는 뜻인지 중대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얘기가 떠돌았다. <똥 밟은 놈은 한 놈뿐이지 뭐. 고일병 그 새끼만 똥독에 빠진 거라구......> 수리의 보직이 결정된 이후 내무반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내무반장의 향후 태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로 쏠렸다. 그것이 곧 내무반 생활의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될 열쇠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수리의 태도여하가 내무반장에게 상대적으로 작용될 게 분명했으므로 그에 관해서도 우리들은 주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한 우리들의 탐색은 그러나 너무나도 짧은 시간 내에 기대 자체가 어리석었던 것으로 판명되고 말았다. 행여나 행여나 하며 속으로만 아슬아슬하게 쌓아렸던 돌탑 같은 희망은 그 한순간에 그만 와그르르, 일말의 흔들림이나 주저도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수리가 중대본부 행정병으로 보직 결정을 받은 지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날 지원 처부의 업무를 끝낸 내무반원들이 내무반으로 돌아왔을 때 일은 이미 시작되고도 한참이 더 지나 있었다. 내무반장이 내무반으로 돌아왔는데도 침상에 벌렁 누운 채 낮잠을 자고 있던 수리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화근이 된 것이었다. "고참이 하루종일 뺑이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왔는데도 까질러져서 꼼짝도 안 하는 버릇은 도대체 어디서 배워 처먹었어, 이 새꺄!" 상기된 얼굴, 충혈된 눈빛, 그리고 이성을 상실한 언동. 그동안 어떤 종류의 기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수리의 얼굴빛은 이미 대취한 사람의 그것처럼 불콰해져 있었다. "군장 꾸려 !" 소리는 질러대고 있었지만 기실 내무반장의 눈빛은 수리의 그것을 당해내지 못한 채 머물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너 같은 새끼는 내가 정식 보고를 통해서라도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을 테니 어디 한번 당해 봐라" 꾸려진 배낭을 메고 철모, 탄대, 방독면 착용에 총까지 집어들었을 때 내무반장은 그야말로 두고보란 듯 내무반을 뛰쳐나갔다. 일과가 끝난 뒤였으므로 중대장이 있을 리 없었고, 아무래도 일직 사령실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왜 그래 ?" 내무반장이 나가고 났을 때 내가 그에게 물었다. "......"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나와 !" 내무반장이 활갯짓을 쳐대며 다시 내무반으로 돌아온 건 오 분도 채 지나질 않아서였다. 일직 사령실로 내려가 뭐라고 얘길 했는지는 몰라도 교육 허락을 정식으로 득한 모양, 내무반을 나서는 그 기세가 너무나도 등등해 보였다. 두 사람이 내무반 밖으로 나가고 나자 내무반원들은 모두 창유리 앞으로 몰려갔다. 거기서는 연병장이 손바닥처럼 훤하게 내려다보였다. 채 스러지지 않은 초겨울 저녁 무렵의 검붉은 노을이 볼썽사나운 얼룩처럼 서편 하늘 곳곳에 물들어 있었으나, 어둠은 이미 전초 기지를 마련한 진주군(進駐軍)처럼 확연하게 몰려들고 있었다. 가끔씩 낮게 깔려 불어오는 싸늘한 저녁바람이 연병장 주변에 흩어진 낙엽과 휴지조각들을 이리저리 내키는 대로 휘몰고 다녔다. 십일월 초였지만 겨울의 기색은 이미 완연했다. 이윽고 막사를 벗어난 두 사람이 연병장 한쪽 귀퉁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 바퀴나 돌릴 참이지 ?" 창유리에 얼굴을 갖다대고 밖을 내다보던 내무반원 중 하나가 혼잣말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연병장으로 내려앉는 어둠보다도 더 깊은 침묵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내무반을 어떤 알 수 없는 세계, 까마득한 미궁 속으로 짓이기듯 자꾸만 밀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다시 내무반으로 돌아온 것은 시침과 분침이 연록색 야광으로 l자를 이루던 시각, 정확하게 자정을 가리키고 있을 때였다. 내무반장이 먼저 들어서고 한참이 더 지나고 나서야 수리는 해면체처럼 흐물거리는 걸음걸이로 내무반으로 들어섰다. 내무반원 중의 어느 누구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지만, 깨어 있는 기색을 보이는 샤람은 아무도 없었다. 십촉짜리 보안등만 밝혀진 실내, 죽은 듯 누워 있는 육신들, 그리고 괴괴한 정적 ....... 그 순간의 내무반은 그 모든 것들이 묘하게 한 데 어우러져 이상야릇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시체실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피워" 수리가 내무반 한쪽 구석에다 군장을 풀어놓고 났을 때, 뜻밖에도 내무반장은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담배를 마주 문 두 사람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한순간에 떠올랐다.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내무반장은 자신의 담배에 먼저 불을 붙인 다음 그것을 수리에제 들이밀었다. 땀에 절은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찌푸릴 대로 찌푸린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댕기는 그 얼굴이 비할 데 없이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심리적 승(勝)과 패(敗)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날 일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날밤 내무반으로 돌아온 뒤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담배를 주고받았던 장면이 내무반원들에게는 어떤 판가름 뒤에 오는 시사적 행동, 다시 말해 두 사람의 대립적 관계가 비로소 어떤 정립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데 대한 하나의 상징처럼 보여진 모양이었다. 수리가 드디어 내무반장에게 굴복을 한 것이고 내무반장은 승자로서 그에게 담배를 권하고 불까지 건네주는 상상 못할 아량을 베풀었으리라는 게 그 뒷날 내무반원들 사이에 형성된 지배적 여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여론이라는 게 실리적 주관을 축으로 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듯, 내무반원들의 생각은 평화를 희구하는 간절한 개별적 갈망의 집적(集積)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다음날 일과가 끝날 무렵에 그 모든 건 여실히 증명되고 말았다. 도대체가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이길래 똑같은 일로 기합을 받은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 짓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일까. 침상 한가운데 큰 대(大)자로 늘어져 세상 모르고 코를 골 수 있는 그 태연자약한 배짱 앞에서야말로 우리 모두는 망연자실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밤 담뱃불을 나누던 장면 하나로 모든 것을 편할 대로 속단해버린 자신들에 대한 묘한 배반감과 어이없는 자탄의 기색이 오래잖아 모든 내무반원들의 얼굴 위로 역력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구제불능의 괴물을 내려다보듯 내남없이 모두들 난감한 표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기막힌 사태 앞에서 한동안 멀건이처럼 멀뚱멀뚱 침상만 내려다보던 내무반장은, 뜻밖에도 천천히 몸을 돌려 내무반용 철제의자에다 털퍼덕 몸을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턱이 가슴에 닿을 만큼 고개를 깊숙이 떨어뜨렸다. 그의 한쪽 손에 들린 전투모가 들려 있는 게 아니라 걸려 있는 것처럼 근뎅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한계를 반영하는 모습이었다면, 그가 내무반장이 된 이후 우리는 치음으로 그것을 목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날밤 내무반장은 4홉들이 소주 한 병을 순식간에 들이켜고 나서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라는생각을 하면서도 일편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방법이 그릇되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그의 그런 통치 수단앞에 감히 한수리처럼 겁없이 일어설 자 있음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었겠는가. 그저 모든 인간들이 우리들처럼 겁 주면 겁 준 만큼 오그라들 줄 알았으리니 내무반장, 그가 겪고 있는 이 최초의 깊은 갈등이 양으로 보든 질로 보든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로부터 이틀 뒤, 나는 중대 서무계인 고일병으로부터 내무반장이 중대장에게 호출을 당했었다는 귀띔을 받았다. 수리의 전력을 알고있는 중대장으로서는 어떤 종류로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하리라는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서라도 내무반장인 허병천을 호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대장이 내무반장에게 했다는 얘기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한상병이 내무반 내에서 일으키는 어떤 종류의 잘못이든 그걸 네 임의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문제되는 사항이 있을 시는 필히 내게 보고를 한 다음 지시를 받아 조치하도록 해야 한다. 알겠나 !" 중대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적절한 조치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로서는 과연 그 지시가 어떤 형태로 이행될 것인지 그게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내무반장이 중대장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게만 된다면 지금까지의 적극적 대립은 앞으로 그 양상을 상당히 달리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과연 내무반장이 중대장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두고 볼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막연한 결론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 주 토요일, 고참들이 흔히 그러듯 내무반장은 정기 외출조가 아니면서도 외출자 편성표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달라는 압력을 서무계인 고일병에게 했던 모양인데 그게 완전히 무산되어 버린 일이 발생했다. 외출조 신고가 있기 직전에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내무반장의 외출증이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파리가 썰매를 탈 수 있을 정도로 전투화에 광을 내고 외출복을 칼날처럼 빳빳하게 다려입은 채 오로지 신고만 기다리고 있던 내무반장은 그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청천 날벼락 같은 사건을 접하는 바로 그 순간 곧바로 발작적인 상태에 이르러 서 무계인 고일병을 내무반으로 불러들였다. "너 고참 희롱하는 거야?"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그는 으르렁거렸다. "......" 사태를 짐작한 듯 고일병은 고개를 떨군 채 대답을 못했다. "말해 !" "사실은......" 체념한 듯 고일병은 조심스럽게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사실은 뭐야 !" "제가 외출자 명단에 허상병님 이름을 넣었는데 한수리 상병이 정기외출조 아닌 사람들 이름을 모두 삭재해 버렸습니다" "뭐라구?" 순간 내무반장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개새끼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작은 꽃잎처럼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무엇을 생각해 냈는지 그 살기등등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내무반 침상에다 갑작스럽게 엉덩이를 붙이며 <아으으!>, 짐승같은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머리통을 감싸쥔 채 한동안 그의 몸부림은 계속됐다. 무엇일까, 황실히 예전과는 다른 어떤 깊은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중대장에게 보고 없이는 어떤 종류의 제재도 가하질 못하게 했으니 활극을 펼칠 노릇도 아니요, 중대장 얘기에 따르자니 보고할 만한 건덕지도 못되는 처지. 정기 외출조는 아니지만 외출 좀 나가려 했더니 한수리가 삭제시키더라고 보고를 하면 중대장이 뭐라고 할까? 요컨대 중대장의 지시를 노골적으로 거역하고 나설 심산이 아니라면 도저히 더이상은 어째 볼 도리가 없는 처지에 그는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왠지 모르게 대세가 수리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막연하긴 했지만 강한 신빙성 같은 게 그 생각 속에는 담겨있었다. 그리하여 어쩌면 오늘밤에는 수리가 내무반장에게 담배를 권하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나만 아니라 내무반원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무반장이 토해내는 그 짐승 같은 소리에 주눅이 들려 몸둘 바를 모른 채 대무반원들은 눈치만 남은 고양이새끼들처럼 마땅히 하릴도 없으면서 이곳저곳을 자꾸만 서성거릴 뿐이었다. "아으! 아으으......" 4. 십일월 말경 첫눈이 왔다. 십이월로 접어든 뒤에도 눈은 몇 번을 더 내렸다. 십이월 말경에는 폭설까지 쏟아졌다. 부대 주변의 병풍같던 산경이 온통 설경으로 뒤바뀌었다. 부대 옆구리를 끼고 흘러내리던 강류도 결빙으로 인해 그 흐름을 완전히 멈추어 버렸고, 끝없이 이어진 빙판 위로 내리고 또 내린 눈은 고스란히 쌓여 인적을 담지 않은 태고적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십이월은 괴로운 달이었다. 십이월처럼 자신들의 현실적 처지가 확실하게 자각되고 그 자각 때문에 괴로워질 수밖에 없는 달도 드물 것이었다. 사회로부터 너무나도 먼 곳으로 떠나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과 사회에서 가졌던 잊혀지지 않는 몇 조각의 단편적 기억 따위들....... 따뜻한 커피 한 잔, 어느 뒷골목에선가 얼핏 보았던 녹색 네온 사인, 바람에 흩날리던 여자의 긴 생머리 몇 가닥, 자욱한 담배연기, 빈 소주병 몇 개, 함박눈, 포장마차, 귀에 익은 슈벨트의 소나타, 카페의 어두운 구석자리, 여자의 입술, 그리고 사랑.인생 따위의 벽낙서들....... 그런 조각난 기억들이 신체의 어느 구석에 쳐박혀 있다가 십이월만 되면 그렇게도 선명하게 떠올라오는 것인지 거기에 관해서는 아무도 명쾌한 해석을 내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아, 나는 군인이로구나>하는 안타까운 자각이 마지막 대답처럼 어느 한순간 이마를 후려치면 문득 잊었던 것을 비로소 떠올린 사람들처럼 저마다 황급히 크리스마스 카드를 준비하기에 바빠지고, 그쯤되면 기분이 조금은 회복되어 <나도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지막 증거를 확보하듯 잊고 지내던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리기에 분주해지는-- 일테면 그런 달이었다. 제복의 십이월이란. 겨울로 접어든 뒤에도 내무반장과 수리의 팽팽한 대립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고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중대장은 시간 날 때마다 내무반장을 호출했고 그때마다 보고 없이는 어떤 종류의 기합과 체벌도 수리에게 가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했는데, 사실 내무반장은 중대장의 당부를 외형상으로는 제대로 이행한 거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기합이나 체벌 따위를 가하는 대신 부당한 지시나 인격적 모욕 따위로써 수리를 교묘하게 괴롭혔으니까 말이다. 사실 육체적인 고통이야 정신적인 고뇌에 비한다면 순간적인 것이고 순간적이기 때문에때로는 정신적인 고뇌를 아주 잠시나마 망각케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손바닥 들여다보듯 이치가 뻔한 일인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부당한 지시를 한다거나 노골적으로 치욕감을 맛보게 하는 행위는 중대장이 금기 사항으로 당부한 기합이나 체벌보다 고통의 진폭이 훨씬 크고 깊은 것이었다. 내무반 내에 수리보다 계급 낮은 졸병들이 멀뚱멀뚱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리에게 내무반 바닥 청소를 시키고, 내무검사를 대비해 청소 분담을 시킬 때에도 수리에게는 침상 밑에서 쥐잡기를 하게 하거나 변소 청소를 하게 했고, 휴일마다 사사롭게 생겨나는사역병 차출 시에도 우리 내무반에서는 으레 수리를 내보내게 했다.뿐만 아니라 점호 시간에는 시도때도없이 수리에게만 암기 사항을 물어 보았고, 혹 틀리기라도 하면 <병신 같은 새끼>라느니 <그런 썩어빠진 호박으로 어떻게 대학을 다녔냐?>느니 <호박이 나쁘면 수족이 평생 고생한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써, 결코 그래서는 안 될 깊은 치욕감을 졸병들 앞에서 맛보게 했다. 해도 너무한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수리가 내무반장의 얄팍한 속셈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요컨대 내무반장은 그렇게 수리의 오장육부를 교활하게 긁어대면서,어느 날인가 그런 수모를 견디다 못한 수리가 자신에게 정면으로 달겨들게 되기를 학수 고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수리를 완벽하게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게 되리라 -- 내무반장은 그렇게 생각하고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저열한 간계를 내무반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 수리라고 해서 그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내무반장의 교활한 속셈을 눈치채지 못했을 까닭이 없었다. 심지어 내무반장은 자신의 동기들은 물론 다른 내무반의 내무반장들까지 동원해서 수리에게 인간적인 모욕감을 맛보여 주려 했다.그러나 수리는 용케도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나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견뎌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일 때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도때도없이 날아드는 내무반장의 집적거림에 시달리는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내면에다 그런 종류의 수모와 부당한 대우를 여과시키는 신체적 장치를 지닌 인간처럼 태연하게 그 모든걸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날 괴롭힐 테면 얼마든지 괴롭혀봐라. 이따위 고통으로는 내가 미동도 않을 것이며, 내 본질이 조금도 손상 당하지 않을 터이니, 실컷 궁리해서 얼마든지 괴롭혀 봐라>하는 식인 것 같았다. 내무반장의 간계를 속으로 비웃고 있음이 분명했다.다시 말해 자신의 관심사는 결코 이런 따위의 하찮은 신경전이 아니므로 이런 종류의 고통은 눈썹하나 까딱 않고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태도를 그 묵묵한 표정에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졸병들 보는 앞에서 막대걸레로 내무반 바닥을 닦을 때, 낡은 치솔에다 염산을 묻혀 똥때 오른 변기를 닦아낼 때, 30센티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쥐잡기를 할 때, 사역병으로 차출돼 곡괭이나 삽자루를 들고 작업 현장으로 나갈 때, <군인 정신>이니 <국군의 이념>, <근무자 일반수칙> 따위의 암기 사항을 외울 때--그 표정을 보면 얼핏 고통으로 경직된 것 같아 보이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어떤 중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깊고 은밀한 쾌감 같은 것이 어른거리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내무반장이 시키는 어떤 종류의 일도 군말 한마디 없이 해냈고, 내무반장이 뱉아내는 어떤 종류의 욕설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무엇보다중요한 것은 단지 시키는 대로만 할 뿐 그 이외의 어떤 국면에서도 그는 결코 내무반장에게 타협이나 화해의 제스처를 꾸며 보이려 하질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우리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바로 그런 점에서였다. 우리처럼 자발적으로 내무반장의 비위를 맞춰 주려 한다거나, 그에게 잘 보임으로써 좀더 편인한 군대생활, 좀더 안락한 정신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태도가 수리에게서는 끝끝내 보여지질 않았던 것이다.그런 점을 놓고 내무반원들은 구구하게 저마다의 견해를 피력했는데, 결국에 이르러 내려진 결론은 <굳이 수리처럼 그러면서까지 군대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까짓놈의 군대 생활 평생할 것도 아닌데,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화해하면 될 일을 가지고 그렇듯 무수한 고통을 감수해 나갈 필요가 뭐 있겠느냐?>는 것이 집약된 중론이었던 것이다. 수리가 고수해 나가는 태도가 원칙직인 면으로 볼 때는 정상적인 것이겠지만, 이미 정상이 비정상 취급을 받는 현실에 있어서는 내 의견도 역시 중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수리가 내무반장에게 수시로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내심으로는 내무반장을 욕하고수리를 동정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수리도 좀 지나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적당한 타협과 화해야말로 삶을 얼마나 윤기있고 활기롭게 만들어주는 것인가. 그러나 그런 면에서 수리는 결코 변신을 꿈꾸지 않았고, 그랬으므로 그가 내무반장으로부터 당하게 되는 고통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내무반원들은 그를 동정했고 그가 받는 고통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것을 겉으로 표현해낼 수는 없었다. 표현은커녕, 우리들은 오히려 내무반장 주변을 서성거리며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다른 생각에 골몰할 겨를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수리에 관한 우리들의 관심과 걱정을 내무반장이 눈치라도 채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돌아오게 될 불이익을 생각하면 더욱더 수리에 관한 관심과 걱정은 엄두도못낼 일로 간주되어야만 했다. 내 경우에는 특히나 더했다. 내무반장이 기회있을 때마다 한수리 교육 제대로 못 시킨다는 명목으로 날 윽박지르곤 하였으므로, 걱정은 커녕 맘에도 없는 욕지거리를 때때로 내무반장 보는 앞에서 수리에게 내지르곤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듯 주체적이지 못한 시간은 무시로 흘러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중대 분위기는 다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연중행사처럼 벌어지는 일이었지만 그놈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 위해 너나없이 없는 시간들을 쪼개 법석을 떨어댔기 때문이었다. 졸병들이야 어떻게든 자신들의 성의를 나타내서 보내면 그만이라는 듯 침상 이곳지곳에 쪼그려 앉거나 엎드려서 없는 그림 솜씨를 한껏 발휘했지만 고참들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한 장의 카드에다가도 자신들의 군경력에 대한 권위를 나타내보이고 싶어했고 그걸 위해 예의 또그 <환쟁이 사냥>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굳이 개인 신상 명세서를 뒤져 보지 않더라도 미대 출신이 전입을 오게 되면 그 출신을 용케도 기억해 뒀다가 때가 되면 다시 기억해낸다는 게 그들의 사냥 비결이었다. 나로 말하면 일찍이 이등병 시절부터 <환쟁이 사냥>의 더없이 좋은 표적이 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닌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나도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고참 대열>에 진입한 몸이었으므로 <환쟁이 사냥>은 않더라도 최소한 <사냥의 표적>만은 되지 않을 수 있는 위치가 되어 있었다. 말하나마나 수리가 중대 전 고참들의 <사냥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 중대원들을 통틀어 미대 출신이 그와 나 단 둘뿐이었던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주문은 쇄도했다. 물론 주문 방법은 각양각색이었다.주문 방법이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나는 수리가 나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거부하는 몸짓이 어떤것인지를 모르는, 나처럼 손쉬운 인간이 그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저희 내무반장님이 이걸로 카드 한장만 만들어 달랍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못 그려" "한 장만 만들어 달랍니다" 돌아갔던 졸병이 되돌아왔다. "돌아가"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내무반장님이 좀 오시랍니다" 졸병은 다시 되돌아왔다. "이유가 뭐야?" "안 오면 각오하라는데요" "돌아가라니까 !" 그쯤되어 졸병이 되돌아가면 이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쫓아와 개새끼, 소새끼, 건방지네 어쩌네, 정신없이 떠들어대다가 제풀에 지쳐 "어디 두고 보자!" 운운하며 되돌아가는 고참이 있었고, 아예 찾아오는 순간부터 "어이 한상병, 사실은 말이야, 내가 직접 오려고 했는데 졸병을 보낸 이유는......" 운운하며 인간적으로 호소하는 고참도 있었다.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유형이 찾아오든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 꺼나 한 장 그려 보시지 ?" 그때껏 돌아가는 양상만 관망하고 있던 내무반장이 아니나다를까 싶게 수리를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 "한 장 그려 봐, 임마. 미대 졸업했다는 놈이 카드 한 장도 못 그린대서야 말이나 되냐? 튕기지 말고 선심 좀 쓰지 그래?" "못 그립니다" 내무반장을 올려다보며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못 그려 ?" 우습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내무반장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못 그립니다" "못 그린다아?" 그 야릇하게 일그러지는 표정. 입가에 괴괴하게 흘러내리는 정박아의 침 같은 비소(誹笑). "......" 수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정 못 그리겠다면 할 수 없지. 어이. 정상병 !" 예기치 않게도 내무반장은 날 불렀다. "예" 내무반 창유리를 등지고 서 있던 나는 내무반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잘 들어, 정상병. 넌 네 자신이 고참이라고 생각하냐, 아니라고 생각하냐?" 대답하기 거북스런 질문을 그는 내게 했다. "글쎄요......" 무슨 절대적 기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적당한 어느날부터인가 묘하게 무거워지는 자신의 행동과 상대적인 인식들이 적당하게 뒤엉켜서 만들어지는 게 이른바 <고참>이란 것이었으니 그 순간에 내가 딱이 <그렇다>, <아니다> 라고 잘라 말한다는 것도 사실은 터무니없고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글쎄는 뭐가 글쎄야. 상병 7호봉이면 엄연히 고참이지. 안 그래?" 내무반장은 굳이 다짐을 받으려는 듯 다그쳐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좋아. 그런데 말이지. 군에서 고참이란 게 사실은 졸병 시절에 대한 일종의 보상 기간이기 때문에 졸병 시절에 했던 궂은 일은 손에 안잡는 게 원칙인데 말이야. 정상병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 중대에 카드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곤 딱 두 사람 뿐이잖아.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제 고참이 되었으니까 그런 일을 손에 잡는 건 아무래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겠지 ? 그래서 나머지 한 사람에게 시키려는 참인데 이걸 어째, 죽어도 못 그리겠다는 걸. 정상병은 이럴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 천연덕스럽게 내무반장은 어깻짓까지 해가며 능청을 떨었다. 결국 수리 앞에다 나를 정면으로 끌어들여 수리로 하여금 안 그릴 수 없게 만들겠다는 속셈인 것 같았다. 카드를 그릴 수 있는 두 사람, 요컨대 카드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명제 앞에서, 인간이기 이전에 고참과 졸병이라는 군인 관계로서 양자 택일을 하게 만들 요량이 분명했다. 바야흐로 카드에 관한 문제가 수리와 내무반장과의 관계를 떠나,이제는 수리와 나와의 관계로 그 흐름을 달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둘이 잘 해 봐" 흥정을 붙여놓고 발을 빼는 바람잡이처럼 내무반장은 침상 끝 쪽에다 매트리스를 깔고 몸을 눕혔다. 볼 만한 구경거리를 편안한 자세로 관전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듯한 태도였다. 아주 잠시 동안이나마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물은 엎질러진 물. 내무반장의 간교한 계략에 휘말려 들었으니 이제 남겨진 일은 수리와 내가 이 위기를 어떻제 현명하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내무반원 모두가 우리 둘의 어려운 상황을 숨죽이고 주시하는 판국이었으니, 나는 나대로 고참으로서의 위신을 지켜야 할 꼴같잖은 당위성을 생각해야만 했고, 그는 그대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기 위해 완강하게 버틸 게 분명한 마당이었던 것이다. 과연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누가 구제를 받아야 하고 누가 자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만약 여기서 내가 내 자신의 당위성을 과감하게 저버리게 된다면 문제는 보통 이상으로 확대되고 심각해질 게 분명했다. 내가 내무반장으로부터 고참 대우를 못받게 되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내무반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내 통솔력에 문제가 있다는 구실 좋은 명분을 내세워 줄줄이 늘어선 졸병들을 괴롭힐 것이고 나아가서는 내 동기들까지도 병신 취급을 하려들 것이었다. 만약 문제가 그런 국면으로까지 전개된다면 내 동기들은 물론 수리에게까지도 우회된 공격을 감행하려 들 게 분명했다.그러므로 현실적으로 현명한 판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리가 자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의 결론은 그랬다.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내 당위성을 정당한 것으로 존립시키고자 하는 이기적 발상이라고 누가 지적한대도 도리없는 노릇이었다. 내 처지가 전반적이고 연계적인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 수리는 자기 자신만 포기하면 문제가 간단해질 수 있는 홀가분한 처지였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할래 ?" 대단히 조심스럽고 은밀한 목소리로 나는 그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가 내 처지를 조금만 이해할 수 있다면 자신의 아집을 선선히 포기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가슴 가득 부풀어올랐다. "뭘 말입니까?" 그는 한동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카드 말이야. 웬만하면 그리지 그래?" 나의 권유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 지독한 조심스러움과 부드러움이 그릇된 것이었을까. "미안합니다" 그는 침상 끝에 걸쳤던 엉덩이를 일말의 주저도 없이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거절치고는 참으로 어이없는 거절이었다. 너무나도 기가 막혀서 나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위잉하니 커다란 기계 소음 같은 게 머리 속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각 내무반 전달 !" 어느새 밖으로 나갔는지, 내무반장은 나에 대한 보복 행위를 시작하고 있었다. "각 내무반에서 카드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졸병 고참 구분 없이 지금 즉시 2내무반으로 가져오기 바란다. 2내무반 정상병이 그려준다는 사실도 아울러 전달하라. 이상, 전달 끝 !" 어쩌면 내무반장은 처음부터 나를 겨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필코 카드를 만들겠다는 꿍꿍이속으로 수리와 나를 저울질하였을 때,어느 쪽 저울판이 올라가고 어느 쪽 저울판이 내려가리라 하는 것을 그는 이미 단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되새겼을 것이다. 내가 졸병이었을 때, 취침을 포기하는 성의까지 보이며 고참들의 주문에 배수(拜手)했었던 사실을. 그리고 나라면 다시 한번 부탁을 해도 고참이 되었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탁을 끝끝내 거절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그려진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나를 더 그려 달라고 하면 그것이 마치 나의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라도 되는 양 몸둘 바를 모른채, 혹시 이런 실수를 고참들이 나의 군생활에 반영하면 어쩌랴 싶어 불안감에 떨던 그 한심하기 짝이 없던 시절에 그는 이미 나의 이 비루한 성품을 넉넉하게 파악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결국 수리에게 거절당한 모든 주문은 고스란히 내게로 되돌아왔다. 당연한 결과였다. 처음부터 수리가 그런 주문에 응하리라는 기대를 했었다면 어리석은 놈은 나밖에 없게 되는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쌓여진 주문을 내려다보는 나의 심중으로는 그 모든 게 다 너무나도 어이없고 기막히게만 여겨질 뿐이었다.도리없이 나는 내무반용 목제 테이블 앞으로 가서 철제 의자에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카드를 그리는 데 필요한 제반도구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자제력을 짓밟고 솟구쳐오르기 시작한 울화통이 속을 부글거리게 하는 까닭에 붓을 손에 들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생겨나질 않았다. 어쩔 것인가....... 힘겹게 팔을 뻗어 붓을 손에 들었다. 그러나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생겨나질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연병장을 가로질러 강변을 향해 걷는 수리의 뒷모습이 강아지만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잡자 ! 나는 순간적으로 손에 들었던 붓을 테이블 위에다 팽개쳐 버렸다.테이블을 박차고 힘차게 튀어오른 붓이 내무반 바닥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내무반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너도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내가 전투모를 찾아들고 마악 내무반을 나서려 할 때, 우측 침상 끝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있던 내무반장이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야릇한 여운을 남기는 말이었다. 뭐랄까, 그것은 마치 일선에서 은퇴한 사람이 동질의 일에 발을 들여놓은 경험 부족의 후배에게 들려주는 뼈 있는 얘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연병장을 가로질러 미친듯 달리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뼈 있는 선배의 얘기를 속으로 무수하게 외쳐댔다. 이해한다! 이해한다! 내무반장, 너의 심정을 백 번, 천 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지금의 내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한수리 !" 백설로 뒤덮힌 강변. 산수화의 여백처럼 펼쳐진 눈부신 상류 쪽으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내 속에서 튀어나간 날카로운 고함이 그의 뒷덜미를 거칠게 나꿔챘다. 고함뿐아니라 그 고함이 몰고온 산울림까지 가세하여 수리, 수리, 수리 ......너울거리며 그의 보행에 제동을 걸었다. 내무반장이 발작을 일으킬 때 질러대던 고함과 나의 그것이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사실이 내 자신까지도 아주 잠깐 동안은 놀라게 했다. 50미터쯤 앞에서 내가 지른 고함에 덜미를 잡힌 그는 처음에는 눈밭에 서 있다 총성을 들은 노루처럼 화들짝 놀랐으나, 고함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순간부터는 미동도 없이 나를 주시하며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리 와!" 나는 더욱 사납게 외쳐댔다. 천천히 그가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내 면전까지 다가온 그의 표정을 보고 난 뒤에 나는 더욱 격분했다.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그 표정이 마치 <이게 웬 낮도깨비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 도대체 뭐야?" "......" 내 속에서 용암처럼 부글거리며 분출을 기다리고 있는 분노의 격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기만 했다. "뭔데 그렇게 안하무인 식의 시건방을 떠냔 말야, 이 개새끼야!어떤 놈 예술에 대해 너만큼 생각 없는 놈 있는 줄 알아! 다 여기가 군대고 육신에 제복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일체의 자존심을 버리고있는 게 아냐! 근데, 그따위 카드 몇 장 그려 준다고 해서 달라질게 뭐가 있다고 그 시건방이야. 예술이 그렇게도 고고하게 자존만을 지켜나가기 위한 것이라면, 도대체 그 예술은 누굴 위해 하는 거야? 대답해 봐 !" 여차하면 한 방 쥐어박을 요량으로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나는 닥치는 대로 말을 뱉아냈다. "......" 그러나 그는 대답할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표정으로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내 어깨 너머의 강 하류 쪽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대답해 !"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냉랭한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사이, 소리보다 먼저 전달된 순간적 마찰음이 정확하게는 내 손바닥과 그의 왼쪽 뺨사이에서 터져올랐다. 나도 모르게 날아간 손이 그의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짧은 순간의 마찰이 피를 몰고왔다. 그의 콧구멍으로부터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를 보았다고 해서 나의 격양된 분노가 잦아들 리 없었다. 오히려 이왕지사라는 생각 -- 다시 말해 어차피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엇으로 끝을 보든 끝을 봐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피보다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주먹 쥐고 엎드려 !" 콧구멍에서 쏟아진 피가 입술을 지나고 턱을 돌아 전투복 상의까지 적셔가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 그는 말없이 상체를 수그려 주먹을 눈 속에다 박고 두 다리를 곧고 길게 내리뻗쳤다. 그가 눈 위에서 엎드려 뻗쳐 자세를 취하자마자 그의 코에서 흘러내리던 검붉은 피가 쌓이고 쌓인 백설 위로 뚜욱뚜욱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빨리 대답해! 누구를 위한 예술이냐구!" "......" "대답해, 새꺄 !" 내 전투화가 엎드려 뻗친 그의 허벅지를 강타했다.그의 몸뚱아리가 힘없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커다란 여섯 육(六)자가 눈 위에 놓인 듯한 형상으로 그는 네 활개를 벌린 채 눈에 보일 정도로 가슴을 들먹이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이 거칠어진 게 아니라 분노가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억제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누운 채로 금방이라도 쨍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질 것처럼 짙푸른 겨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어나 !" 나는 그의 늘어진 육신을 향해 발악적으로 외쳐댔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는 나의 명령에 불복하기 시작했다. 일어나라는 나의 발악적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는 꼼짝도 않고 누운 채 그 짙푸른 하늘을 응시하는 일을 그만둘 줄 몰랐다. 코피는 멎은 것 같았으나 가늘게 뜬 실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에는 불그죽죽한 핏자국이 볼썽사나운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안 일어날래 !" 오른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위협적인 자세까지 취해 보았으나 네 활개를 벌린 채 하늘만 응시하는 그의 육신은 끝끝내 움직일 줄 몰랐다.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심산인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태연자약한 그의 불복으로부터 이상야릇한 전류가 흘러나와 내 육신을 조금씩 감전시켜나가는 듯한 묘한 착각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내가 그에게 행해야 할 다음 행동은 무엇이며, 그것은 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하는 괴이쩍은 의구심들이 두서도 없이 솟구쳐올라 내의식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빨리 자리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무반으로 돌아가서 기합을 연장하면 연장했지 여기서 더이상 이런 상태를 유지하다간 큰코 다치게 되리라는 긴박한 위기감이 의식의 엉덩이에 마구 발길질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알량한 위기감에 사로잡힌 내가 마음의 결정을 미처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수리에게서는 이미 상서롭지 못한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친 것일까...... 진짜 미친 사람처럼 코피가 얼룩진 얼굴로 그는 가가대소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한순간에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가 이내 세포분열을 한 미생물처럼 무수한 메아리로 되돌아오곤 했다. 짙푸른 겨울 하늘마저도 그 웃음의 진동으로 인해 쨍, 쨍, 갈라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웃음소리의 파편을 피하기 위해, 나는 미친 듯 오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개새끼, 두고 보자 ! 미친듯 달려가면서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쳐댔다. 그리고 그날밤, <두고 보자는 놈 무서울 거 없더라>는 속설을 뒤집어 엎기라도 할 사람처럼, 불그스름한 취침등만 밝혀진 내무반 바닥에서 나는 그를 썩은 나무토막처럼 굴리고 또 굴려댔다. 내무반장에게서 전수한 갖가지 종류의 기합을 내키는 대로 마구 동원했다. 그리고 자정무렵까지 근 두 시간 동안의 기합이 모두 끝나고 났을 때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반성문을 써서 내게 제출토록 했다. 그리하여 새벽 두 시까지 닦달을 친 끝에 나는 기어이 수리에게서 반성문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막상 그 반성문이란 걸 읽고 났을 때, 나는 그게 반성문이 아니란 걸 알았다. 반성문이 아니라 그건 경고장이었다. 군대생활 평생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소이다. 차라리 평생 할 거라면 나도 정상병처럼 변신을 시도했거나 이미 변신을 끝냈을 것이오. 그러나 그런 변신은 얼핏 보기엔 잠정적인 것처럼 보이고 또한 많은 사병들이 그런 미명과 허울 속에서 자신들의 변신을 정당화시키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외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내부에 도사린 유동적 형질 -- 나쁜 의미에서 다분히 경계해야 할 -- 의 잠재태가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오. 나는 내 속에 도사린 그런 유동적 잠재태를 완벽하게 거세시키기 위해 살아왔소이다. 적어도 나는 그런 유(類)의 자기 싸움에서 승리한 자만이 예술을 행위로 옮길수 있으리라고 믿어 왔으며, 그런 행위에서 잉태된 작품만이 비로소 창조의 본래적 영역에 놓일 자격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것이외다.삶이 포기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예술의 본래적 자존을 지켜 나가기 위해 우리는 조악한 현실과 싸우고 그 현실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소이다. 현실에 순응하고 그것에 길들여진 심성과 수족으로 무엇을 잉태하고 무엇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그런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현실과의 타협은 당시적으로는 육체적 안락과 정신적 평화를 가져다주는 듯하지만, <길들여진 자는 반드시 올 각오를 해야만한다>는 경구를 우리가 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에술에 관한 나의 신앙심이 정상병에게는 지나친 것으로, 또한 수긍하기 어려운 비현실적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하여도 나는 어쩔 수가 없소이다. 도대체 예술을 무슨 숙달된 기술처럼 대하려 하는 태도를 어떻게 견더내란 말이오! 예술행위를 합네 떠벌리고 다니는 인간들, 특히 예술행위를 무슨 문화적 장신구마냥 몸에 걸치고 다니며 행세하려는 개 같은 잡종들에게도 신물이 날 지경인데 어찌하여 붓을 들고 조각도를 들고 나서서 숙달된 목공이나 폐인트공처럼 함부로 설쳐대란 요구를 할 수가 있단 말이오 ! 진정한 예술적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만 나는 예술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예술이 오래 남겨질 수 있다는 이유가 무엇이외까?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이념과 체제, 혼돈과 고통의 와중에서도 그것은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런 확신이 없는 한 예술은 결코 절대적인 것일 수가 없소이다. 그리고 그런 절대적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지 못하는 한 예술은 어떤 의미로든 한 시대의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하거나 동참하는 도구가 될 수밖엔 없으니까 말이외다. 많은 예술인들이 이 땅위에서 명멸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각성해야만 할 것이외다. 군대생활이란 게 무슨 방패가 될 수 있겠소이까? 나에게는 군대와 사회가 별반 다름없이 느껴지고 있소이다. 사회생활을 보다 더 압축시키게 되면 잠정적인 군대생활과 하등 다를 게 없을 테니까 말이외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게 아무것도 없는 생활. 의식에까지 규격화된 제복을 입힐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외다. 왜냐하면 예술은 나의 마지막 종교이고 그것을 향한 나의 신앙심은 죽음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니까. 부디 기억하시라. 잠사(潛思)할 줄 모른 채 제복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대의 영혼을 애민(哀愍)해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5. <겨울이 갔다> 라는 표현과 <봄이 왔다>는 표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얼핏보면 두 가지 표현이 모두 한 가지 현상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복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혹한>과 <따뜻함>이라는 지극히 대조적인 자연상의 변화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거기에는 내포되어 있었다. 긴 겨울을 보내며 내가 새롭게 느낄 수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은 계절의 도래가 결코 자연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인위적인 힘, 다시 말해 인간의 의식 체계에 의해 그 도래의 시기나 양상이 훨씬 강한 지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제복을 입고 있다는 제약만 없다면 어느 누가 봄을 그토록 기망할 것이며 도래된 봄을 그렇게 까다롭게 확인하려 들 것인가.겨울은 길고도 지루했다. 당연한 결과처럼 우리들에게는 저마다 겨울에 대한 깊은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봄은 분명 왔는데 후유증이 그걸 못 믿게 했다. 진달래, 개나리, 철쭉 따위가 피기 시작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 모두 난개할 대로 난개했다가 한 잎 두 잎 낙화를 시작하는 초여름이 되어서야 믿음은 비로소 움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계절의 길목에 서서 최초의 탄성을 터뜨리는것이었고, 바로 그 순간 그 지리멸렬했던 지난 겨울의 후유증은 깨끗이 치유가 되는 것이었다. 아, 봄 ! 봄은 그렇게 왔다. 봄 기운이 쇠진해지고 녹음마다 조금씩 풀 죽은 기색이 드러나는 초여름이 되어서야 그것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었다. 부대 주변을 따라 함성처럼 난개한 개나리, 진달래, 철쭉 따위가 낙화를 거듭할 무렵이 되어서야 제복의 봄은 비로소 움을 틔우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수리의 겨울나기는 철저한 자기폐쇄로 점철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외형상으로 드러낸 행동을 판단의 근거로 했을 때의 얘기였다. 내면적으로야 어떤 정신적 파란과 굴곡을 넘어서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깊은침묵으로 일관해 나갔다. 겨울 동안 그가 일으켰던 일이란 외출 귀대시간을 세 시간이나 어겨 중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그 일로 인해 그는 두 달 동안 외출이 금지 되었었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다가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이유로 통신보안 어쩌고 하여 몇 군데 불려다닌 일(문제가 됐던 이유는 편지가 너무나도 암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유지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럭저럭 뒤탈없이 끝날 수 있었던 것은 그 내용이 상당히 어렵고 난해해서 구체적으로는 꼬투리 잡을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졸병들이 내무반장 관물 정리를 해주다가 콘돔 한 통을 발견해내자 그걸 모조리 풍선으로 만들어 내무반에다 매단 일(나중에 들어와 그걸 본 내무반장은 어이가 없는지 졸병에게 술을 사 오게 하여 처음으로 수리에게 한 잔을 권하며 너 같은 놈은처음 본다 어쩐다 하며 뜻밖의 반응을 보였었는데, 수리는 끝내 그 잔을 비우지 않았었다) 등등, 문제라고 생각하면 문제일 수 있고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을 일으키고 치러내며 그의 겨울나기도 그럭저럭 막을 내린 셈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봄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부터였다. 그 새로운 조짐을 내가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다 자는 취침 시간에 그가 잠을 버리고 중대 행정반으로 가 문을 안으로 걸어잠근 채 보통 새벽 두세 시까지는 무엇인가를 하다가 내무반으로 돌아오곤 한다는 졸병들 사이의 야릇한 소문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아울러 그 소문 속에는 그가 가끔씩 강변으로 나갔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오기도 한다는 감을 잡을 수 없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었다. "아니 잠을 안 자고 뭘 한다는 얘기야?" 내무반장도 궁금한지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그 얘기를 꺼낸 감찰실 박일병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창문에 커튼을 다 내리고 자기 테이블 앞에다가는 중대 인원 현황판을 가로막아 놓고 있기 때묻에 뭘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그 왜 10촉짜리 알전구 들어가는 작은 스탠드 있잖아요? 그걸 밝혀 놓고 있기 때문에 출입문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면 흡사 사진 인화하는 암실처럼 보인다구요" 몇몇 졸병들도 불침번을 서며 그걸 목격했노라, 박일병 얘기를 거들었다. "행정반으로 들어갈 때 맨손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 자기 서랍에다가 무언가를 넣어둔 모양입니다" "언젠가 제가 말번 불침번을 서는데 새벽 네 시가 넘어 갑자기 행정반 문이 덜커덩 열리는 바람에 얼마나 기절초풍을 했는지 몰라요" "한 번은 열한 시쯤 되어서 중대 계단을 내려갔는데 제 불침번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은근히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 아침에 보니 멀쩡하게 자리에 누워 있더라구요. 그날 불침번을 섰던 사람에게 일일이 다 물어봤더니 말번 불침번이 그러는데 자기 근무 시간에 어디서 세수를 하고 오는지 얼굴이 온통 물에 젖어 있더랍니다" "아아, 맞어 ! 그래서 그때도 새벽 네 시가 넘어서 계단을 올라왔었구나! 나도 본 적이 있어" 모두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눈빛을 반들거리며 저마다의 상상을 부풀려 나가는 그 표정마다에는 일편 긴장의 빛까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깊고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름아닌 내 자신이었다. 평상시, 겉으로는 최대한의 무관심을 가장하면서도 나는 그의 하찮은 언행 하나도 쉽게 받아넘기질 못한 채, 설령 그것이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일지라도 과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던 것이다. 무슨 연유로, 어디서부터 그런 일방적 신경전이 기인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사람이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대상을 무의식 중에도 의식하게 되는 일---그게 사랑의 대상이 아닐 경우에는 고스란히 미움이나 중오, 최소한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수리를 중오하는 것일까? 부지불식간에도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가면 나는 세차게머리를 털며 부르르 몸서리를 쳐댔다. 좀스럽기 그지없는 내 인간성에 대한 진저리였다. 나는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강변으로 나가는 이유를 밝혀낸다는 건 너무 막연했으므로 서랍 속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인지 그걸 확인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좀체로 기회는 오질 않았다. 일과 시간을 틈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불가불 일과 후의 어느 순간을 이용해야 될 터였는데 공교롭게도 일과 후에는 언제나 행정반에 커다란 자물통이 매달려 있었다. 어느날 밤 나는 궁리 끝에 고일병을 불러냈는데, 그도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던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한상병이 행정반 열쇠를 뺏어간 게 벌써 언젠데요?" 졸면 죽지만 노리면 잡는다는 경계근무용 표어처럼, 이제나저제나 행정반 앞을 오가며 기회를 엿보던 끝에 나는 드디어 두번 다시 없을 호기를 잡게 되었다. 휴일을 무료하게 보내던 중대원들이 내무반 대항 축구시합을 하기로 결정을 본 게 그런 호기를 제공해준 셈이었다.체육복을 갈아입고 3분 이내에 중대 복도로 집합하라는 주번하사의 전달이 휴일의 깊은 정적 속에 가라앉아 있던 중대 분위기를 갑자기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뒤집어놓았고, 결국은 그 소란이 그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중대 행정반에 보관된 축구공을 꺼내오라는주번하사의 호통에 쫓긴 수리가 행정반 문 채우는 걸 깜박 잊고 행정반을 나섰는데, 그 장면이 순간적으로 내게 포착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연병장으로 나가라는 주번하사의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도 나는 계속 초조하게 마음을 조려야 했다. 혹시 수리가 문을 채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정반으로 되돌아가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행히도 그런 일은 생겨나질 않았다. 모두들 주번하사의 지시에 따라 우루루 계단을 내려갔고, 나는 제획된 대로 슬쩍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중대 복도는 이내 잠잠해졌다. 비죽이 고개를 내밀고 복도가 텅 비어있음을 확인한 다음, 나는 쏜살같이 행정반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그의 서랍은 채워져 있었다. 나는 눈을 번들거리며 테이블 위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있었다! 고일병 테이블 위에 놓여진 펀치 옆에 그것은 있었다. 클립이었다.나는 재빨리 클립통을 열고 클립 한 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구부러진 클립의 한쪽 끝을 잡아당겨 손잡이를 만들었다. 펼쳐진 손잡이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클립의 나머지 감긴 부분을 서랍의 열쇠 구멍에다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손잡이 부분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대부부의 사무용 철제 테이블은 서너 번이면 족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클립의 손잡이가 스르르 돌아갔다.그러나 클립으로는 마지막 처리, 다시 말해 <철컥> 하는 소리를 내게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또다른 도구가 필요했다. 열쇠 구멍에 걸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았다. 살며시 클립을 끄집어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다음, 나는 또다른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송곳, 손톱깎기, 칼 등등 여러가지가 눈에 띄었다. 송곳을 집어들었다. 그 예리한 끝부분을 열쇠 구멍 상단예 걸릴만큼만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힘을 가하여 송곳을 우측으로힘껏 내리눌렀다. "찰칵 !" 아주 짧은 순간 짜릿한 희열이 등줄기를 스쳐갔다. 군대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필요케 되는 이 기술을 나는 내무반장에게서 배웠는데, 그때 내무반장은 이 기술이 여자를 다루는 요령과 동일하다는 설명을 덧붙였었다. 클립으로 살살 돌려대다가 마지막에 큼직한 것을 들이밀면 열리는 원리 ! 음핵(陰核)을 문질러대면 안 열리고는 못 배기는 여자의 그것과 이것이 이치상으로는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서랍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이마에 땀이 솟았다.그의 서랍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우측에는 책과 노트, 좌측에는 손바닥 넓이만한 상자가 하나, 그 위쪽의 비인 공간에는 조각도 세트와 청.적색 볼펜 두 자루. 나는 일단 우측에 놓여 있는 두 권의 책과 노트를 집어들었다. 두권의 책은 미술 이론에 관한 문고본이었고, 뒤쪽의 노트는 문고본보다 약간 더 큰 것으로 겉장이 파랗고 꽤 두툼했다. 얼핏 펼쳐보니 깨알처럼 작은 글씨들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가슴이 섬뜩했다.문고본을 제자리에 놓아둔 다음, 나는 재빨리 노트를 펼쳐들었다.행정반 서편 창으로 밀려든 하오의 햇발이 펼쳐 든 노트의 지면으로 내려앉아 깨알처럼 붙박여 있던 언어의 밑둥을 간지럽혔다. 말들이 서서히, 아지랑이처럼 살아올랐다. -- 예술의 궁극적 가치는 개인과 그 개인의 시대와 환경을 초월한다.그것은 예술가의 직관의 힘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이상적인 비율과 조화를 표현한다. 그 직관을 표현함에 있어서, 예술가는 그 시대의 환경에 의하여 그의 손에 들어온 재료를 사용할 것이다. 한 시대에는 동굴의벽에 긁어서 그릴 것이며, 또 한 시대에는 신전이나 사원을 짓거나 장식할 것이며, 또다른 시대에는 한정된 전문가의 일단을 위하여 캔버스위에 그릴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예술가는 그에게 과(課)해진 재료와 조건에 개의치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조형의 의지를 표현하는 데 소용되는 한 어떠한 조건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역사의 더 넓은 변이(變異)속에서 예술가의 노력은 그가 예언하지 못했던 힘, 그 자신이 해석하던 가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힘에 의하여 확대되든가 축소되며 채택되든가 버림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영원한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예술가의 신념인 것이다.-- 허버트 리이드 Herbert Read의 이론적 기술(記述)로 시작되는 그의 노트에는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의 예술 이론에 관한 기록들이 부분적으로 발췌되어 있었고 개중에는 내면에서 생성된 단상(斷想)이 그것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리이드를 필두로 하여 루우벤스, 엘 그레코, 게인즈버러, 블레이크, 터어너, 콘스타블, 들라크로아, 앙리 루소,샤갈, 칸딘스키,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헨리 무어, 바아버러 헤프워어드에 이르기까지 -- 기록된 내용의 대부분은 예술 행위에 관한 그들의 뜨거운 신념과 용기, 혹은 불굴의 정신력에 관한 집약적인 표현들로 일관되어 있었다. 그는 적색과 청색의 두 가지 볼펜으로 기록을 계속해 나갔는데, 내용이나 문맥의 흐름으로 미루어 보아 적색은 자신의 내면에서 부화된 단상을, 청색은 독서를 통해 얻어진 공감대의 단편(斷片)을 노트해 놓은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나는 적색 볼펜으로 기록된 부분들만 가려내 숨가삐 읽어 내려갔다. -- 신들이 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나는 신이 되고 싶었다.울지 않는다는 사실, 울지 않을 수 있다는 신비.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런 신적 요소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뜨거운 이마를 후려치는 건 결코 신적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장 뚜렷한 인간적 징후를 무엇으로든 건져올려야 할 것이며, 그것을 인간적 징후의 개선과 극복에다 선사해야 할 것이다. 오오, 나를 울게 하는 신들이여, 이만큼 울어 온 나에게도 이제는 무엇인가 건져올릴 수 있는 징후와 영감을 내리소서! -- 어떤 묵묵한 것. 무저항적인 자태. 그러면서도 저항적인 양면성. -- 날마다 기도하고 믿는 것이 구원을 향한 본질이 되듯, 예술에서 비롯되는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 그것은 창조적 행위이다. 행위는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예술을 남길 것이다. 미칠 것 같다 ! 그런 공간,그런 뜨거운 공간,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공간. 그런 구원의 공간이 그리워, 그리워 미치겠다. -- 묵시적 압축감. 그 응집력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 그리하여 그 모든 고통을 한순간에 깨어나게 하는 일. 구원이 되게 하는 일. 그런 일 ! -- 나를 살아나가게 하는 이 끝없는 불안과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무엇인가를 해야만하리라는 거센 강박 관념으로부터 오고있다. 그러나 그런 데서 비롯되는 고통과 불안이 없는 한, 나는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 내 삶의 유일한 추진력이 되고 있는 그것들이여. 너희들만이 나의 세계를 지켜주는 마지막 울타리가 되는도다. -- 내가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동안에는 어떤 종류의 고통도 고통으로 감수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나는 호흡하는 일조차도 잊게 될는지 모른다. 그런 완벽한 순수의 공간에 안주하는 동안 만큼은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절대적 절연 상태가 이 비린내나는 현실로부터 나를 초탈시켜 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장을 쪼아대던 사나운 독수리처럼, 나는 이제 나의 고통을 내 스스로 쪼아댈 것이다. -- 머리가 뜨거워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거세당하지 못하는 정열이 무섭게 부풀어오르는 시간. 이럴 때 견뎌내야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스런 곤욕인가. 몸 속에 가득 찬 무서운 힘이여, 고통의 발정이여 ! -- 무감각한 상태. 가능한 무감각한 상태. 시야 밖의 세상을 그저 강물의 흐름처럼 지나가게 할 것. 호흡을 낮추고 가능한 침묵할 것. 그리고 떠오르고 솟구치는 모든 것을 원형 그대로 건져올릴 것. 뜬잠을 자되 꿈꾸지 말 것. 식욕을 누르고 허기 속으로 떠오르는 발상을 누적시킬 것. 무의식의 저변에 산재해 있는 발상 이전의 무형적 의식을 굴절시킬 것.확대시킬 것. 집약시킬 것. 그 모든 총체적 집합체로서의 완성미에 이를 때까지. -- 망가진 세계의 재건을 위하여 ! 굳어져 가는 감성의 재생을 위하여 ! 거세 직전, 마지막 발정기 ! 307 그의 적색 기록들은 대강 이런 식으로 이어져나갔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어떤 거사(擧事)를 꿈꾸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확고한 목적의식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끝없는 자기 확인 같은 것들이 그 문맥의 흐름 속에는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 볼 도리가 없었다. 뿐만아니라 그의 기록이 끝난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뜻모를 스케치는 나의 의구심을 더욱 뜨겁게 가열시켰다. 무려 십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 비슷비슷한 스케치들은 단 한 점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거북 형상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기묘한 것은 그 많은 것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얼핏 보면 모두 똑같아 보이는 그 크고 작은 형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맨 처음에 스케치된 한 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다 비정상적이거나 기형적인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발이 없는 것, 등피가 없는 것, 거꾸로 뒤집힌 것, 머리를 땅에 처박고 물구나무를 선 것 .......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머리가 잘려나간 것까지 눈에 띄었다. 아아, 도대체 이 무슨 기괴한 형상들인가...... 나는 입을 벌린 채 머리가 없는 거북의 기이한 모습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거북 ....... 내 머리 속에서는 위치를 이탈한 나사못처럼 <거북>이라는 말이 이리저리 정신없이 굴러다녔다. 그게 뜻하고자 하는 게 무엇일까? 나는 일단 노트를 접어 원위치시켰다. 그리고는 좌측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로 손을 가져갔다. 앙손을 사용해 조심스레 그 덮개를 들어냈다. 아. 덮개를 들어내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머리 속을 스쳐가는 말이 있었다. 어떤 뭇묵한 것. 무저항적인 자태. 그러면서도 저항적인 앙면성 ....... 위치를 이탈한 나사못처럼 머리 속을 굴러다니던 그 <거북>이라는 말과 노트의 한 구절과, 거기 그 상자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앙증맞은 거북 형상의 목각 한 덩어리가 한순간예 뒤얽혀, 나의 머리 속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트의 끝부분에 스케치되어 있던 기괴한 형상들. 그것들까지 무질서하게 가세하여 눈앞을 마구 어른거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 속에 도사려 앉은 목각을 꺼내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아아. 바로 그 순간 나의 입은 실성한 사람의 그것처럼 벙그렇게, 나도 모르게 벌어지고 말았다. 내 시야로 밀려든 게 거북 형상이 아니라한 수리,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거기, 행정반 출입문 어귀에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그가 나를 죽이려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공포심이 양손으로 목각을 받쳐 든 내 육신을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마에 맺혀있던 굵은 땀방울이 주르르, 콧잔등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6. 수리와 나 사이에는 한동안 깊은 한랭 기류가 흘렀다. 웬만한 일이었다면 고참이라는 명분으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날 내가 처했던 상황에서야 무슨 얼어죽을 명분이 있었겠는가. 수리는 한동안 분을 못 이겨 독을 쓰고 나를 노려보았었지만. 다행히도 그때 중대에는 사람이 없을 때여서 그 일은 결국 그와 나 단 둘 사이에서만 생겼던 일로 덮어둘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난 그 뒷날부터 그의 표정은 말이 아니게 침울해져 갔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그건 그가 지닌 무서운 독기가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데서 생겨난 비열한 자기 보호본능이 아니면 지나친 피해망상이 분명했다. 인간이란 떳떳함을 상실하는 그 순간, 이미 이를 데 없는 비열함이 심신 가득 들어차게 되는것. 그러던 어느날, 나는 내무반장으로부터 기급절사(氣急絶死)할 만한 질문 하나를 받았다. 내무반에 수리가 없을 때였다. "어이 정상병. 거북에 관해 좀 알고 있나?" "거북요?" 무슨 얘기인가, 처음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무반장을 쳐다보았다. "그래, 거북이 말야. 그게 뜻하는 게 뭐지 ? 뭘 상징하는가 말야" 그가 <상징>이라는 말을 꺼낸 뒤에야 나는 비로소 사태를 짐작할수 있었다. 서랍을 열어 봤구나 ! 느긋한 태도로 보아 수리에게 들키지 않고 모든 것을 훔쳐 본 게 틀림없었다. "몰라?" 내무반장은 다시 한번 다그쳤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어떤 묵묵한 것. 무저항적인 자태. 그러면서도 저항적인 양면성 .......나는 수리의 노트를 떠올리며 그대로 얘기해 줄까 하다가, 혹시 모든절 눈치채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우려감 때문에 시치미를 뚝 뗐다. "미대 나왔다는 놈이 그런 것도 모르냐?" 그는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리고 나서 내무반 침상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빈번하게 눈꺼풀을 껌벅거렸다. 어쨌거나 내무반장까지 수리의 서랍을 뒤져 봤다는 건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종류로부터든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수리와 그것을 침해하는 데서 묘한 쾌감을 얻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대응관계라는 게, 일편으로는 우스꽝스런 숨바꼭질처럼 생각되기도 했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침해자들과 직극적으로 대립되고자 하는 수리의 삶에 대한 자세라는 게 어차피 맞물려야만 돌아갈 수 있는 두 개의 톱니바퀴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맞물린 톱니로부터 이탈되지 않는 한 그의 고통은 결코 멈추어지지 않으리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비극적이고도 극단적인 데서 끝을 맺었다. 침해자는 비단 나와 내무반장만이 아니었다. 어느날 일석 점호가 끝난 직후, 감찰실 박일병은 이상한 얘기를 꺼냈다. "새로 온 우리 감찰참모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던데요?" 내무반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오늘 오전 내내 각 예하대 중대장들에제 전화를 했는데 말이죠.각 중대원들 중 미대 출신들 명단만 뽑아서 자기에게 보고를 하라는거예요. 전화를 다 걸고 나서 선임하사한테 그 이유를 밝히는데, 전에 있던 부대에서 자기가 어떤 미대 출신 사병에게 그림을 하나 그려달라고 해서 받아뒀는데 그 사람이 제대 후에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지 뭡니까? 그 뒤로 자기는 부임해 가는 부대마다 미대 출신들에게 그림 하나씩은 꼭 받아둔다는 겁니다. 참모 얘기가 사람 팔자 시간 문제라는 거예요. 자기에게 그림 그려 준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될지 누가 알겠냐는 겁니다. 아무래도 정상병님과 한상병님도 한 번은 다녀와야 할 것 같던데요. 어디선가 본부중대에 국전 입선 경력 사병이 있다는 예길 들었다는 걸로 미루어 한상병님을 찍은 것 같은 눈치였는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암튼 준비는 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본부중대를 제외하면 미대 출신 있는 곳이 거의 없잖아요?" 그로부터 이틀 뒤, 박일병의 얘기는 정확하게 적중했다. 일과가 끝나기 직전, 감찰실로부터 한수리 상병을 올려보내라는 전화가 중대로 걸려왔던 것이다. 그가 호출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단독 호출을 나는 감찰참모의 지적 대상에서 내가 제외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한 때문이었다. 수리가 돌아온 것은 밤 여덟 시가 좀 지나서였다. 박일병도 그때 그와 함께 돌아왔는데, 둘 다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결과가 궁금했으나 둘 다 표정이 그 지경이었으므로 그 자리에서는 물어볼 수도 없었다. "행정반 문 좀 걸어줘" 문득 생각난 듯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수리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박일병에게 건넸다. 나는 박일병을 따라나섰다. "어떻게 된 거야?" 복도로 나서자마자 나는 궁금증을 터뜨렸다. "이루 말로 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뭐가?" "말도 마세요. 전 한상병 같은 사람 첨 봤어요" "거부했나?" "거부가 다 뭡니까? 죽으면 죽었지 그런 짓은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 "참모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지만, 한편으로는 참모 기분도 이해가 돼요. 영관 장교가 정색을 하고 부탁을 하는데 그 지경으로 거절을 해댔으니 안 그럴 수 있겠어요?" "결과는?" "별 거 있겠습니까? 묵사발 났죠" 그는 더이상 얘기할 게 없다는 듯 행정반 쪽으로 걸어갔다.그날 점호가 끝난 직후, 수리는 정갱이 이곳저곳에다 머큐로크롬을 찍어 발랐다. 그리고는 곧바로 중대 행정반으로 갔다. "끝내주는구나, 끝내줘" 소등을 하고 보안등을 밝힌 뒤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을 때, 어이가 없다는 듯 내무반장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내무반원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깊은 정적이 가슴을 짓눌러왔다. 막연하면서도 더없이 불길한 예감이 끝없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무엇인가, 종말 직전의 괴괴한 정적 같은 게 불그스름한 보안등빛살을 등에 업고 내무반 바닥과 벽, 천장과 관물함 사이의 음습한틈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는 듯한 끔찍한 환영만이 부지불식간에도 부르르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다. 불길했던 예감은 그날밤 그대로 적중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내무반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고 다른 내무반원들은 모두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아. 내무반 바닥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장면을 보고 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내무반 바닥에서 수리와 내무반장이 엎치락뒤치락 닥치는 대로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뭘 하는 거야, 말리잖고 !" 몸둘 바를 모른 채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 졸병들을 향해 벽력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나는 정신없이 내무반 바닥으로 뛰어내려갔다. "말리면 죽인답니다" 누군가 등 뒤에서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정신없이 내무반장의 어깨를 나꿔챘다. 수리가 밑에 깔려 있었다. "이거 안 놔!" 어깨와 팔을 뒤에서 잡힌 내무반장은 더욱 거칠게 버둥거렸다. "왜 이러십니까? 참으세요!" 나는 그를 수리로부터 떼어냈다. "놔, 이 새낄 오늘 !" 내무반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 하는 소리가 그를 붙잡고 뒤에 선 내 귓전에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윽 !" 짤막한 비명과 함께 내무반장의 엉덩이가 내 하복부로 들이밀어졌다. 내가 내무반장을 떼어내는 순간, 밑에 깔려 있던 수리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머리로 내무반장의 입을 들이박았던 것이다.그날밤 수리는 이마가 찢어졌고 내무반장은 이빨 두 대가 부러졌다.싸움은 수리의 서랍속에 들어 있던 목각이 분실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내무반원들이 눈을 떴을 때는 내무반장의 관물함이 활짝 열려있었고, 그 안에 들어 있던 관물들이 걸레조각처럼 내무반 바닥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으며, 그때 이미 수리는 내무반장의 관물함에서 찾아낸 목각을 손에 들고 잠자던 내무반장의 멱살을 움켜잡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무반원들의 얘기를 들으며 내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언제 내무반장이 그걸 훔쳐냈을까 하는 것이었으나, 이내 감이 잡혔다. 업무 끝나기 직전, 수리가 감찰실 호출을 받고 행정반을 떠난 뒤부터 돌아오기 전까지---마음만 먹는다면 열 번도 더 훔쳐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동기야 어떻든 사건은 크게 번졌다. 다음날 아침, 내무반장이 직접 중대장실로 찾아갔던 것이다. 우리는 보지 않고도 그 결과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내무반장의 행위가 아무리 부당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졸병이 고참을 구타했다는 것은 군대처럼 계급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추호의 용납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우리들이 예견했던 그대로였다. 중대장으로서도 도저히 더이상은 어째볼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단 하루의 입창 대기도 없이, 그날 오후에 수리는 곧바로 사단 영창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내무반장에게는 일주일간 군풍기 교육대 입소가 결정되었다. 문제가 됐던 그 목각은 예리한 무엇으로인가 전신을 난자당한 채 수리가 입창된 다음날 내무반 쓰레기통 속에서 발견되었다. 참혹한 형상이었다. 7. 내가 감찰실로부터 호출을 받은 건 수리가 입창되고 난 이틀 뒤였다. 역시 오후 일과가 끝날 무렵이었다. "앉아라" 깊숙한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앉은 감찰참모는 콧잔등 옆으로 골이 져 보일 만큼 혈색 좋은 살이 얼굴에까지 올라 있는 인물이었다. 불을 밝히지 않은 사무실 내의 어스름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번질번질한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래 전공은 뭐였나?" 그는 짤막한 지휘봉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서앙화였습니다" 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오호, 서양화? 거 좋지" 그는 테이블 우측에 놓인 자개로 만든 초합(草盒)예서 두 개피의 담배를 꺼내들었다. "자, 피워" 한 개피는 자신이 물고 나머지 하나는 내게 권했다. "아닙니다" 기겁을 하듯, 나는 그것을 극구 사양했다. "괜찮아, 피워. 난 고리타분하게 계급 같은 거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둘만 있을 때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대해도 좋다. 자, 받아" 나는 하는 수 없이 담배를 받아들었다. "자" 친절하게도 그는 불까지 권했다. "그림은 많이 그려 봤나?"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인 그는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재학 시절에는 그런 대로 꽤 열심히 했습니다" "신상기록카드를 보니 대학을 졸업하고 왔던데,졸업 후에는 뭘했나?" "작은 화실을 운영했습니다" "오호, 화실? 거 좋지. 남을 가르칠 정도라면 솜씨가 대단하겠구만"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제작을 의뢰해도 괜찮을 만하다는 나름대로의 꿍꿍이속에서 우러난 미소가 분명했다.그의 웃음을 보며 나는 머리 속으로 수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도 역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에 앉아서 참모의 얘기를 들었으리라. 그는 어떻게 참모의 권유를 물리쳤을까? 지금과 하등 다를 바없이, 참모는 그때도 지극히 부드럽게 말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나를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친절했을지도 모른다. 흔치 않은 조각 전공에 국전 입선 경력까지 곁들여졌으니 참모의 침샘이 더욱 자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리는 결국 그 모든 권유를 단호히 물리치고 돌아왔었다. 나도 과연 그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 "어때, 하나 그려 보겠나?" 그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재떨이에다 담배를 비벼 껐다. 본론이었다. "......" "부담 가질 건 없다. 네게 손해날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만약 그림을 시작하게 되면 모든 중대생활에서 널 열외시켜 주겠다. 제작기간은 네가 편할 대로 정하고, 제작이 끝나면 특별휴가를 주겠다. 어떠냐?" 그 정도면 족하지 않겠냐는 표정이었다. "아 ! 그리고" 나의 확답을 구하던 그는 잊은 게 있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결정은 물론 네가 해야 하겠지만, 그림의 호수(號數)를 네 능력닿는 한 최대치로 해 줬으면 좋겠다. 웬만한 것들은 꽤 가지고 있는 편인데 대작이 없어, 대작이. 기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어때 한번 그려 보지 ?" 대답을 구하는 그의 얼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예" 감찰실로부터 호출을 당하던 바로 그 순간, <예> 라는 말은 이미 내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는지 모른다. 늘 상비해 가지고 다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 수천 수만 개의 <예>를 가슴 가득 넣고 다닌다고 해야만 ! "오, 그래, 그래. 그럼 내일부터 작업실로 사용할 장소와 도구 일체를 준비할 테니 준비되는 대로 일을 시작해라. 네 열외 문제도 중대장을 불러 얘기해 두겠다" 참모는 준비된 대본을 읽어 나가듯 순식간에 말을 쏟아냈다. 조금은 들뜬 듯한 목소리였다. "알겠습니다" 감찰실을 나와 중대로 복귀하는 동안, 나는 내내 수리에 관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 두 개체가 완전히 상반된 선택을 한 마당이었으니 그에 관한 생각은 비교적인 측면으로도 더욱 뚜렷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술이 자유로운 사고와 구속받지 않는 행동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익히 알고 있어, 임마! 내가 그에게 쏘아붙였던 말들이 머리 속에서 들볶이는 콩낱처럼 튀어올랐다. 그런가 하면, 그가 내게 했던 얘기들이 수천 개의 바늘끝처럼 머리속을 찔러대기도 했다. ...... 진정한 예술적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한에 있어서만 나는 예술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고 있소이다. 예술이 오래 남겨질 수 있다는 이유가 무엇이외까?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이념과 체제, 혼돈과 고통의 와중에서도 그것은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런 확신이 없는 한 예술은 결코 절대적일 수가 없소이다. 그리고 그런 절대적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지 못하는 한 예술은 어떤 의미로든 한 시대의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하거나 동참하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외다. 많은 예술인들이 이 땅 위에서 명멸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인을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각성해야만 할 것이외다...... 도구. 나는 결국 감찰참모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인가? 예술의 절대적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지 못하는 사이비 ! 내부의 절망과 외부의 곤욕을 겹으로 감수하면서도 자기 자신만은 꿋꿋하게 지키며 살아나가는 사람이야말로 그 본질이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그는 비록 철창예 갇힌몸이 되었지만, 정작 갇힌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나는 비로소 한수리, 그가 그토록 잃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던 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찰참모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작업 준비를 하는 데는 꼬박 팔일이 소요되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겠노라는 순종의 미덕을 발휘했던 그날로부터 정확하게 팔일 뒤, 나는 다시 한번 감찰실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작업실은 비품 수리반 창고로 정했고, 필요한 제반 도구까지 모두 갖춰 놓았다. 화구점에 나가 직접 사람을 데려다 준비했으니 부족한 건 없을 게다.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거든 언제든 얘길 해라. 그리고 중대장한테도 얘길 해 놨으니 내일부터는 아예 그곳으로 출근하도록 해라. 너는 내일부터 모든 것에서 열외다" 자신의 권위로 안 될 게 뭐가 있겠냐는 듯 참모의 표정은 참으로 득의양양해 보였다. 모든 것에서 열외 !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가슴은 야릇한 쾌감과 설레임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참모가 얘기한 열외란 내 몸에 걸쳐진 제복을 벗어던지는 일을 제외한 모든 생활적 제약과 조건들로부터의 이탈을 뜻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내가 저녁을 낼 테니 실컷 먹고 내일부터 열심히 그리도록해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가자!" 그날밤 참모는 자신의 전용 지프에 나를 태워 영외로 데리고 나갔다.그리고는 자신이 잘 가는 곳인 듯한 한식집에서 술과 고기를 시켜내 양껏 먹게 해주었다. 늦은 봄밤의 후텁지근한 열기 속에서, 참모와 나는 러닝셔츠 바람으로 마주앉아 온몸에 진땀이 배어날 정도로 권커니 잣커니 하며 아귀아귀 고기를 짓씹어 삼켰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참모는 나를 초소까지 데려다주고 숙소로 돌아갔다. 오랜만의 포식에다 걸음이 휘청거릴 정도로 취기가 오른 나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막사로 향했다. 흐흐흐,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이 병신 같은 자식아! 임마, 너는 그렇게 스스로 고통을 자초해가면서까지 정신이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지만, 웃기지 마라! 어차피 자유로워지긴 마찬가진데 너처럼 그렇게 살 필요가 뭐가 있냐? 까짓놈의 그림 한 쪼가리 그려준다고 물건이 떨어지냐? 그거 하나 그려준다고 어디가 덧나냐? 그래, 그래. 나는 도구라도 좋고 개라도 좋다.군대에서 편하게 지내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무슨 얼어죽을 절대적 가치고 나발이냐, 이 병신머저리 같은 자식아!...... 흥이 오를 대로 오른 내가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되지도 않는 소리를 씨부렁거리며 중대 복도로 올라섰을 때, 복도 끝 쪽의 어둠 속에서 경계총 자세를 한 감찰실 박일병이 걸어나왔다. "여어 수고한다, 수고해" 불침번인 그에게 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도 나처럼 도구가 아닌가. "정상병님" 그러나 내 앞으로 걸어온 그의 표정은 내 기분과는 영 딴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 젖을 대로 젖은 술기운 속에서도 나는 무엇인가 상서롭지 못한 어떤일을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한상병이 돌아왔습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언제 ?" 울컥, 뭔가가 목구멍으로 치솟아올랐다. "업무 끝난 직후였습니다" "그래?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그 새끼가 돌아왔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구!" 사실 순간적 발상이긴 했으나 그때 나의 머리 속에서는 수리가 돌아온 뒤 내무반장과 어떤 식의 해후를 했느냐 하는 물음이 떠올랐었다.그러나 그와 거의 같은 순간 <또 !> 라는 강력한 전파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도 엉뚱한 신경질적 발설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다시 수리의 그물로 빠져들고 있다는 섬ㅉ한 자각 때문이었다.예기치 못한 나의 반응을 본 박일병은 그저 멀뚱멀뚱 내 얼굴만 쳐다보았다. "근무나 똑바루 서 !" 그 좋던 취흥이 순식간에 싹 가셔버렸다. "안녕히 주무십쇼" 독백처럼 나직하게, 그가 등 뒤에서 중얼거렸다. 십촉짜리 보안등의 검붉은 조명 속에서 내가 수리의 모습을 그런대로 눈에 익힌 것은 내무반으로 들어서고 나서도 한참이 더 지난 뒤였다. 그는 흰 팬티 바람으로 매트리스 위에다 몸을 눕히고 있었다.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나서는 내무반용 의자에다 엉덩이를 붙였다. 머리속이 몽롱했다. 괜한 짜증이 까닭도 없이 자꾸만 복받쳐올랐다. 자는 놈들을 모조리 깨워 두들겨패고 싶다는 순간적 충동이 전율처럼 어깻죽지를 스쳐갔다.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악습처럼 나는 또다시 그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수리, 그가 언제나 내 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나는 괴롭다. 그러나 나는 내 괴로움을, 내 부끄러움을, 물러터진 내 의식을,어느 누구 앞에서도 시인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그런 것이다. 한수리, 그는 결코 나 같은 인간과는 동질이 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그가 미운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를 내 어찌모르겠는가. 고통은 언제나 모든 것을 너무 잘 알고 분명하게 자각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 감찰참모의 권유에 순응한 나를 그는 뭐라고 할 것인가 ....... 생각이 그쯤에 이르렀을 때, 나의 육신은 원격 조종을 당한 로봇처럼 나도 모르게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그를 깨워 이 괴로운 심사를 모조리 털어놓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 때문이었다. 그 순간적 반동이 취기였는지 충동이었는지조차도 나는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그가 몽유병 환자처럼 스르르, 붉은 조명속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닌가. 아. 깡마른 얼굴, 광인처럼 번득이는 저 눈빛....... 소름끼치게 나를 쏘아보는 그 끔찍한 몰골은 완전히 사람의 형상을 벗어난 것이었다.한상병 .......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입을 움찔거려 보았으나 끝끝내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나의 육신은 이미 빈틈없이 얼어붙어 있었고, 그리고 공백이 되어 있었다. 그때, 이상한 외침이 귓속으로 날아와 박혔다. 도구 ! 그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는데, 어디선가 외침은 계속 날아왔다.도구 ! 도구 !...... 얼핏 들으면 도그 dog--그 흔해빠진 개 이름 말이다-- 처럼 들리는 그 외침은 끊임없이 날아와, 아주 짧은 순간 뒤에는 그 모든 동어 반복이 한데 뒤섞여 엄청난 함성처럼, 성난 파도처럼 내 육신을 뒤덮어 버렸다. 그 모든 외침이 수리의 입이 아니라 그의 온 육신을 통해 쏟아져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것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그가 다시 몸을 눕히고 나서도 한참이 더 지난 뒤였다. 굵은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8. 7월 말의 폭염, 그 세상을 녹여버릴 듯한 염위 속에서도 나의 열외생활은 지극히 만족스럽게 진행되었다.제복을 몸에 걸치던 그날부터 조직의 일원이 되어 오직 정해진 시간의 굴레대로만 생활해 오던 나의 일상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셈이었다. 확실히 그것은 만족할 만한 변화였다. 구속과 간섭이 배제된 하루 스물네 시간의 완벽한 자유.그게 나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꿈처럼만 여겨졌다. 전군이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에 나는 작업실로 마련된 비품 수리반 창고, 그 자유의 공간으로 올라갔다. 양철지붕이 녹아내릴 듯 달아오르는 한나절에는 찜통 속처럼 무더운 곳이었으나, 정신이 자유롭다는 무형적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무더위는 이미 무더위가 아닐 수 있었다. 미대 출신들에게 그림을 많이 우려내 본 경력 때문인지 참모의 배려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아침에는 정훈부 사병을 통해 창고로 조간 신문이 보내졌고, 주기적으로는 박일병을 통해 담배와 술을 비롯, 과자 등속의 간식까지 보내왔다. 그림을 그리기 싫으면 그런 것들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팬티 바람으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야전용 침대와 장교용 철제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낮동안의 대부분 시간은 그렇게 보내졌고, 그림은 밤이 되어서야 내키는 대로 조금씩 그려나갔다. 완성 시한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요. 반드시 심혈을 기울여 제작해야만 한다는 자발적 의지도 없는 작품이었으니, 그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란 게 어차피 건성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늦게 완성하면 할수록 나의이 안락한 열외 생활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연장될 것이라는 치밀한 속셈까지도 나는 뱃속에다가 은밀하게 감추어두고 있었다. 한마디로 살맛 나는 날들이었다. 영창에서 돌아온 이후, 수리의 중대생활은 중대원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로 진행돼 갔다. 열외 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중대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현격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중대로 복귀하면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고질적 악습처럼 나는 수리의 신상에 무슨 변화가 없었는가 그것부터 알아보곤 하였다. 졸병들의 입을 통해 들어오는 소식에 의하면, 이제 중대에서 수리는 완전히 <제쳐놓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수리의 입창 경험이 그의 생활에 어떤 개선의 여지를 마련해주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아무도 해보질 않았었지만, 입창 전보다더욱 노골화된 그의 도전적 태도에 대해서는 모든 중대원들이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도 또한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암울한 표정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불안감과 상서롭지 못한 예감, 다시 말해 조만간 에 무슨 일을 저질러도 저지를 것만 같다는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제스처다 ! 전해 들은 얘기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서 나는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제복의 사회에서 입창 경험이란 어쩔 수 없이 깊은 체념과 회의로 연결되게 마련인데, 그가 입창 전보다도 더욱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양상을 나타내 보인다는 게 어찌 속셈 있는 의도적 시위가 아니겠는가! 한수리, 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속일 수 없는 물증처럼 떠오르는 노트의 한 구절. 망가진 세계의 재건을 위하여 ! 굳어겨 가는 감성의 재생을 위하여 ! 거세 직전, 마지막 발정기 ! 나의 직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가 영창에서 돌아온 지 일 주일만에 전혀 새로운 소식이 내게 전해졌던 것이다. "벌써 삼일째 계속 나가는데요. 점호 끝나고 모두 취침석에 들면 그때 일어나 슬그머니 나가는데, 새벽 세 시나 네 시가 돼야 돌아오곤합니다. 아무래도 강변으로 나가는 것 같애요. 전에도 자주 그런 적이 있었잖습니까?" 취침을 위해 중대로 내려갔을 때, 불침번을 서던 내무반 졸병이 내게 전해 준 소식이었다. "그래서 이틀 동안 내가 내려왔을 때 계속 잠자리에 없었구나......" 나는 조금 멍해진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조짐으로 보아 아무래도 매일밤 나갈 것 같은데요?" 걱정스럽다는 투였다 "지금 없냐?" "열시 반쯤 나갔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ll시 15분.자정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만한 시간이었다. "갔다오마" 눈으로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지금요?" 그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래..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일단 나는 내무반으로 들어가 전투화를 벗어놓고 활동화로 갈아신었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중대 건물을 벗어나 연병장으로 들어서자 만월에 가까워진 달빛이 바닷속에 드리워진 집어등(集魚燈)처럼 교교한 빛으로 흘러다니고 있었다. 한여름 밤의 서늘한 대기가 가슴 가득 스며들어 온몸을 맑게 씻어내는 것 같았다. 머리 속이 상쾌하게 비워지는 듯한 느낌을 가지며 나는 빠른 걸음으로 연병장을 가로질러 갔다. 강변으로 내려서자 이번에는 달빛을 받으며 뽀얗게 일어선 물안개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산과 강과 안개와 달빛이 어우러진 전경은 그야말로 신비의 세계, 숨이 막힐 듯한 가경(佳景)이었다. 도저히 낮으로만 보아오던 그 강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리 깊은밤에 이곳을 걸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군생활을 하면서 밤 열 시 이후에 나돌아다닐 일이라는 게 야간 경계 근무 이외에 달리 더 무엇이 있겠는가? 조심스럽게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서 보자니 그야말로 점입 가경이었다. 도저히 인간이 밟아서는 아니 될 땅인 것 같다는 섬ㅉ한 생각까지 들었다. 상류 쪽으로 십 분쯤 올라가던 내가 걸음을 우뚝 멈춘 것은 수리를 발견해서가 아니라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금속성소리 때문이었다. 망치로 쇳덩이를 두들겨댈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날카로운 정(釘)으로 돌을 쪼아댈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한 그 예리한 타성(打聲)이 강 건너편의 산허리를 돌아 내가 있는 곳까지 빠르게 날아왔던 것이다. 카앙, 캉! 카앙, 캉! 캉!...... 나는 강변 둑 밑의 숲속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지극히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갔다. 여차하면 숲속에다 몸을 던질 참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작 숲속에다 몸을 숨긴 것은 그로부터 상류 쪽으로 십 분쯤을 더 올라가고 나서였다. 달빛에 흠씬 젖은 물안개를 헤치며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걸어나가던 나는 한순간에 둑 밑의 무성한 숲에다 몸을 묻었다. 십여 미터 전방의 강변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바위위에서 그 카랑카랑한 금속성소리가 터져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나는 강변이 대각선으로 내다보이는 숲속에 납작 엎드린 채 숨을 죽이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훔쳐 보았다. 안개와 달빛이 아름다운 슬픔처럼 뒤엉긴 강변, 그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앉아 미친 듯 정을 쪼아대고 있는 그는 한수리가 분명했다. 직감이 현실로 환원되는 무서운 장면을 나는 목도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생겨나는 끝없는 불안과 고통을 극복하고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한 예인(藝人)의 처절한 예술 신앙 중에서도, 지금 내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고해성사와 같은 장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그가 쪼아대고 있는 돌이 거북 형상을 하고 있는 자연석이라는 것을 판별해 냈을 때, 나의 머리 속에서는 작고 푸른 불꽃들이 무수하게 튀어올랐다. 그의 서랍에서 훔쳐 보았던 목각, 쓰레기통 속에서 발견된 참혹한 형상, 예술의 궁극적 가치는 개인과 그 개인의 시대와 환경을초월한다, 참된 예술가는 그에게 과(課)해진 재료와 조건에 개의치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조형의 의지를 표현하는 데 소용되는 한 어떠한 조건도 받아들인다, 어떤 묵묵한 것, 무저항적인 자태, 그러면서도 저항적인 양면성, 발이 없는 것, 거꾸로 뒤집혀진 것, 머리를 땅에 처박고물구나무를 선 것, 머리가 잘려나간 것, 묵시적 압축감, 그 응집력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 그리하여 그 모든 고통을 한순간에 깨어나게 하는 일, 구원이 되게 하는 일, 그런 일....... 머리 속에서 튀어오른 작고 푸른 불꽃들은 대강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의 폭죽이었다. 자신의 고통을 파각(破却)해 나가는 듯한 일련의 행위. 망치와 정을 움직여나가는 그의 모습은 주위의 교교한 분위기와 달빛에 젖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비로운 느낌까지를 자아내게 했다. 그가 정을 갖다대는 곳에서는 푸르른 불꽃이 튀었고, 그 불꽃은 마치 그가 지닌 영혼의 편린처럼 섬뜩이는 빛으로 차갑게 명멸했다. 아. 나의 가슴 속에서는 거센 회한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진정한 부끄러움이 비로소 자각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나는 인간이라는 미미한 존재의 속성이 저토록 숭엄한 모습으로 위광(威光)까지 갖추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저 광경은 인간이 이 지상에서 이룩해낼 수 있는 최상의 행위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묵념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서서히 눈앞이 흐려져 왔다. 누선(漏線)이 욱신욱신해지면서 뜻모를 온기가 솟아올랐다.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냉랭한 별빛이 예리하고 미세한 빛살로 부서져 끝없이 눈을 찔러댔다. 신들이 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신이 되고 싶었다는 노트의 한 구절이, 이슬처럼 떨어져 나의 무지를 일깨울 때까지도 나는 그 숲속에 엎드린 채 그렇게 계속 쿨적거리기만 했다. 비로소 세상에 눈뜨고, 이제는 돌아와 절대자 앞에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린 한 마리 속죄양처럼. 9. 이유없는 특박 이박 삼일이 수리에게 주어진 것은 장마가 계속되던 팔월 초순께였다. 수리의 야행은 그 무렵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는데,그 무렵에는 거북 형상이 거의 완성되어 등피가 다듬어지고 있었다.나는 열외 생활을 하면서도 아주 가끔씩 강변으로 나가 그 거북 형상의 돌을 살펴보곤 했다. 그가 선택한 재료는 애초부터 거북과 비슷한 형상을 지닌 자연석으로, 그의 작업은 그것에다 음각과 양각을 더해 주는 이른바 세부적인 형상화 작업 detail인 셈이었다.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본 거북 형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당히 기괴한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앞발을 힘차게 딛고 가슴을 일으켜 세우려 하는 형상이었는데, 머리가 없었던 것이다. 머리가 없는 그 형상을 내려다보며 나는 그가 거기에다 나타내고자 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애써 찾아보려고 했다. 머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정신? 또는 의식? 아마도 그런 것을 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을 잘렸다? 아니면 잃었다? 거세당했다? 그렇다면 이 목 없는 거북 형상은 획일화된 제복 사회에서 잃어버리게 되는 자의식에 대한 상징인가?혹은 비유인가, 그도저도 아니면 독설인가 ! 그 무렵 수리가 밤마다 강변으로 나가 조각을 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한다는 소문은 이미 전 중대원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만연되어 있었다. 소문이 어떻게 파급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대장까지도 알고 있을 정도로 그의 야행은 이미 공공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제재를 가하거나 수리 앞에서 그것에 관해 언급하는 중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 관한 얘길 하다가도 그가 나타나면 쉬쉬할 정도로 중대원들은 은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소문을 즐길 뿐이었다.모두의 뇌리에 아직도 수리의 입창 건(件)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박은 바로 그 무렵에 주어졌다. 영창에서 돌아온 뒤, 두 달 동안 외출까지 박탈당했던 그로서는 모처럼 부대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매우 반가운 일이었겠지만, 특박이 왜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그를 비롯, 중대원들 중의 어느 누구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혹시 탈영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감 때문에 주는 거겠지 뭐" 대부분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할 뿐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그 주 토요일, 정기 외출조가 나갈 때 수리는 그들과 함께 중대를 떠났다. 이박 삼일의 특박은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로 되어 있었다. 수리가 특박을 떠난 그 다음날은 아침부터 궂은 장마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도 오고 일요일이었으므로 나는 모처럼 작업실로 올라가는 걸 포기하고 내무반에서 쉬기로 작정했다. 그리고는 아예 오전부터 매트리스를 깔고 침상에 누워 뒹굴거렸다. 내무반원들도 모두 편안한 자세로 저마다의 자유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니 저게 뭐지 ?" 눅눅하게 흘러간 시간이 어느덧 오후 한 시쯤 되었을 때, 내무반 창유리 앞에 서서 비 내리는 광경을 묵묵히 내다보던 졸병 하나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외쳐댔다. "뭔데 ?" 이리저리 뒹굴거리던 내무반원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우루루 창가로 몰려갔다. "......" 창가로 몰려간 내무반원들이 모두 입을 헤벌리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나도 황급히 몸을 일으켜 밖을 내다보았다. 아. 창밖으로 눈을 돌린 그 순간, 나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입을 벌린채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놀라운 행렬이 연병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던 것이다. 행렬의 맨 앞에는 주행식 지브 기중기(走行式 jib 起重櫃)가 침략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탱크처럼 지축을 뒤흔들며 주행하고있었고, 그 뒤에는 판쵸를 착용한 15명 정도의 사병들이 지렛대, 곡괭이 등속의 장비들을 파지하고 대열을 맞춰 따르고 있었다. 공병대 사병들이 분명했다. 저럴 수가....... 행렬이 강둑으로 내려가고 난 한참 뒤까지도 모두는 입을 벌린 채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어떻게 된 걸까? 멀뚱멀뚱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중대 복도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튀어들었다. "각 내무반 전달 !" 주번하사의 전달 구령이 떨어지자 날 궂은 일요일 오후의 눅눅한 정적 속에 파묻혀 있던 각 내무반에서 우당탕퉁탕 졸병들이 전달을 받기 위해 각 내무반 출입문 앞으로 뛰쳐나왔다. "지금 즉시 판쵸를 착용하고 전원 복도에 집합하라! 전달 끝 !" 전달을 받은 졸병이 내무반으로 들어서며 전달 내용을 그대로 복창했다. 자유 복장을 하고 있던 내무반원들은 황망히 일어나 복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 얘길 잘 들어라" 중대에 남아 있던 병력이 모두 중대 복도로 집합하자 주번하사가 입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종교 행사를 하는 시간대였으므로 중대에 남아 있던 잔여 병력은 모두 18명밖에 되질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고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작업 지원을 내보내게 된 데 대해 주번하사로서 먼저 미안한 마음이다. 너희들이 신을 믿지않고 중대에 남아 빈둥거린다고 하늘에서 벌을 내린 모양이다. 공병대에서 강변에 있는 돌을 운반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우리 중대로 지원 병력을 보내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달갑잖은 일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우리 모두가 제복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보람된 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지시에 따라주기 바란다. 폭우가 쏟아지고 돌을 운반하는 작업이니만큼 안전 사고에 유의해라. 인솔자는 2내무반 허상병이다. 이상 !" 주번하사의 인원 체크가 끝난 뒤, 우리는 곧바로 막사를 벗어났다.그리고는 미친 듯 울부짖는 강풍과 휘몰리는 빗줄기를 뚫고 연병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사병 식당 뒤쪽으로 뛰어갔다. 식당 뒤쪽의 산자락을 돌아 외곽(外廓) 4초소로 내려가면 곧바로 강변과 만나게 되어있었고, 작업 현장은 그곳으로부터 상류 쪽으로 십 분쯤 더 올라간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수리가 밤마다 돌을 쪼아대던 바로 그곳이었다. "모두 몇 명입니까?" 합판으로 알량하게 만들어진 초소 안에서 머리통만 내민 채 위병(衛兵)이 소리쳤다. 휘몰아치는 강풍으로 까딱하면 초소가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열여덟" 인솔자인 내무반장이 대답했다. "몇 명이라구요?" 제대로 못 들었는지 위병은 초소를 벗어나 마악 언덕을 내려서는 우리들의 등 뒤에서 다시 한번 꽥꽥거렸다. "씨팔명이다, 니미야 !" 대열의 맨 뒤에 서서 언덕을 내려오던 내무반장이 엿 먹으라는 시늉을 해 보이며 악 받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크고 작은 돌들을 밟거나 건너뛰며 상류 쪽으로 뛰어갔다.폭우로 인해 강물은 엄청나게 불어 있었고, 넓어지는 수면으로 인해 강변은 평소보다 그 너비가 훨씬 더 협소해져 있었다. 이런 식의 폭우가 이삼 일 정도만 더 계속된다면 강변은 빈틈없이 물에 잠길 게 분명했다. "몇 명 나왔냐?" 작업 현장에 나와 있던 공병대 인사계가 우리들의 발걸음이 채 멎기도 전에 소리쳐 물었다 "열여덟입니다" 내무반장이 대답했다. "열여덟 ?" "예 !" "왜 열여덟이야?" "중대 잔여 병력 전부입니다.나머지는 모두 종교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이런 오라질 새끼들 ! 삼십 명을 보내랬더니만 반밖에 안 보내 ?" 공병대 인사계는 침을 퉤 뱉으며 공병대 병력이 빙 둘러싸고 있는 문제의 돌을 힐끔 돌아보았다. 돌의 크기와 지원 병력과의 상관 관계를 가늠해 보는 눈치였다. 문제의 돌을 줌심으로 판쵸도 걸치지 않은 채 웃통을 홀랑 벗고 서 있던 십여 병 정도의 공병대 병력이 맥빠진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문제의 돌 한쪽 옆에는 한무더기의 쇠사슬이 독사떼처럼 뒤얽혀 있었다. 짐작컨대 돌을 옮기기 위해 몇 번의 시도를 이미 해본 모양이었다. 그 모든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쇠사슬을 사용하여 돌을 묶는 일인 것 같았다. 돌이 묶어지면 크레인을 사용하여 그것을 트럭에다 올릴 것이고, 트럭에 올려지면 어디로인가로 그것을 실어갈 것이니. 어디로인가....... 나는 그것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누가 수리에게 특박을 주었으며 그가 없는 틈을 타 이 문제의 돌을 옮겨가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야,누구 한 사람 보내서 나머지 병력 마저 데려오라고 해 ! 씨부랄 새끼들, 도대체 돌이 얼마만한지 알지도 못하면서 제멋대로들 병력을 늘였다 줄였다 하나! 하느님이고 나발이고 지금 즉시 병력을 보내지 않으면 주번하사 오늘 각오하라고 전해 ! 알았어?" 돌과 병력을 번갈아보며 눈짐작을 하고 있던 공병대 인사계가 독오른 목소리로 내무반장에게 소리쳤다. 현재 병력으로는 도저히 무리라는 판단이 내려진 모양이었다. "일단 한번 해 보면 안 되겠습니까?" 내무반장이 말했다. "시끄러 새꺄! 보내라면 보내! 될 일을 안 된다는 줄 알아?" 결국 이등병 한 명이 부대로 보내졌고 대기 중인 병력들은 강변둑을 따라 늘어선 크고 작은 소나무 밑으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 나무 밑이라고 해봤자 별달리 빗줄기를 면할 만한 면적도 아니 되는 몇몇 그루의 노송 밑으로 몰려든 병정들은 저마다 한 대씩 담배를 붙여 물기에 바빴다. 습기가 가득 밴 탓인지 담배 연기는 매우 끈끈하게 번져나갔다. "저게 한상병이 만든 건가?" 모두들 망연한 눈빛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 누군가 나직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에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답이 불필요할 만큼 그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두에게 널리 주지되어 온 것이었으므로. "저걸 어디로 옮긴다는 거지?" "글쎄 말이야. 이 우중에 작업을 강행하려 하는 게 아무래도 한상병 특박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이유를 모르겠군" 간간히 이어져 나오는 입담(立談)을 뒤로 한 채, 나는 걸음을 옮겨 아무도 없는 소나무 밑으로 가 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아예 주저앉아 버렸다. 걸치나마나한 판쵸를 헤집고 든 빗물로 몸은 이미 빈틈없이 젖어 있었다. 내가 앉은 곳에서는 앞발을 힘차개 딛고 가슴을 일으켜 세우려 하는 거북 형상의 돌이 정면으로 내다보였다. 가슴을 일으켜 세워 하늘을 향하는 그 힘찬 도전적 형상이 오늘은 웬지 슬픈 모습으로 다가왔다. 날씨 탓일 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꿈을 이루지 못한 인간이 무릎을 꿇고 두 팔을 하늘로 향한 채 서럽게 울부짖는 모습에 대한 비유처럼, 묘한 비극적 미감을 불러일으키는 저 기괴한 형상. 내가 저것과 처음으로 조우하던 밤. 은가루 같은 달빛이 미립자의 안개와 함께 서성거리고, 일대가 온통 은은한 광분(光粉)으로 뒤덮여 있던 그날밤. 저 거북 형상의 등에 올라앉아 정을 쪼아대던 그 신들린 듯한 예인의 모습을 나는 죽는 날까지도 잊지 못할 것이다.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해요?" 망연한 모습으로 생담배를 태우고 앉아 있을 때, 감찰실 박일병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생각하긴 뭘...... 앉아라" 나는 턱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작업실에 올라가지 뭐하러 나왔어요?" "안 그래도 후회중이다" 나는 피우던 꽁초를 앞쪽으로 힘껏 튕겨버렸다. 떨어지기도 전에, 담뱃불은 허공에서 그 빛을 잃고 말았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거 어디로 옮기는지 아세요?" 그는 턱으로 돌을 가리키며 은근하게 내게 물었다. "안단 말야?" 나는 나무에 기댔던 등을 곧추세워 앉으며 정색을 했다. "......"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누구?" 다급하게 되물었다. "참모예요" "참모?" "예" "감찰참모?" "예" "......" "한상병이 밤마다 이곳으로 나와 돌을 깎는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에요. 중대장까지 불러올려 확인을 받고 자기도 직접 여기 화서 확인을 했어요. 한상병이 강변에 나가는 걸 통제하지 말고 그대로 방치해 두라는 지시까지 하는 걸 제가 직접 들었어요.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속셈이 분명했어요. 어제 한상병에게 특박을 준 것도 참모였으니까요" "......" 나는 손을 들어 어깨 부근까지 늘어져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힘주어 찢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잘게잘게, 꺾고 또 꺾었다. 눈물 어린 망막에 굴절된 모습처럼 나머지 지원 병력이 아련하게 내앞을 지나쳐 가고 있었으나, 그 모든 물상이 내게는 꿈보다도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집합!" 증원된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공병대 인사계는 우리 쪽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질러댔다. "뼈다귀 속에 비 스며들기 전에 돌아가고 싶거든 빨리 서둘러!"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어슬렁어슬렁 이곳저곳에서 걸어나오는 사병들을 향해 그는 다시 한번 협박조의 고함을 질러댔다. "니기미, 씨바랄!" 누군가 뒤쪽에서 침을 퉤 뱉으며 웅얼거렸다. 내부반장이었다. "자, 돌의 밑부분은 어느 정도 파헤쳤으니까 여기 앞쪽에다 쇠사슬을 깔고 그 위로 돌을 밀어내면 된다. 너희들은 이쪽 밑둥을 들어올리고 나머지는 일제히 앞으로 밀어내라구!" 얼굴을 후려치는 빗줄기를 연신 손으로 훔쳐내며 인사계는 돌의 좌측면에다 전 병력을 배치했다. "자, 내 구령에 맞춰 일제히 힘을 써라!" 죽은 풍뎅이를 끌고 가기 위해 까맣게 몰려든 개미떼처럼 우리는 거북 형상의 옆구리 쪽에 빈틈없이 달라붙어 저마다 한군데씩 힘쓸 자리를 골라 손바닥을 붙였다. "하나아" 인사계의 입에서 구령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울" 우리는 저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셋!" 인사계의 구령이 끝나기 무섭게 굵고 힘찬 함성이 일제히 터져올랐다. "조금만 더!" 돌의 밑둥이 지면에서 떨어지자 인사계는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조금마안......됐다아!" 인사계의 환호 작약(歡呼雀躍)앞에 뿌리 뽑힌 돌의 복면(復面)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야, 빨리 올라가!" 숨돌릴 여유도 없이 인사계는 공병대 병력들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돌이 뒤집혀질 자리를 가늠하여 여러 가닥으로 펼쳐놓은 쇠사슬을 공병대 병력 몇 명이 달라붙아 신속하게 결속시켰다.거물을 체포하는 순간의 민첩한 민완 형사들처럼 병정들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고, 반항을 포기한 범죄자처럼 돌은 묵묵한 자태 그대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고스란히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오래잖아 수십 가닥의 쇠사슬이 뒤집혀진 거북 형상의 등피를 거쳐 하늘을 향한 복면으로 집결되었다. "자, 다 됐으면 내려와! 그리고 이젠 묶여진 돌을 다시 원위치시켜야 하니까 아까의 반대쪽으로 가서 밀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라. 이것만 끝나면 오늘 작업은 끝이다!" 낚시미끼처럼 인사계는 말끝에다 작업 종료에 대한 예고를 덧붙였다. 그리고는 그 예고가 어디까지나 자신의 독자적 결단력과 선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과시라도 하려는 듯 자신만만한 어투로 호통을 더욱 고조시켰다. "야, 넌 저쪽으로 더 나가, 임마! 그래야 힘이 균등하게 주어질 거 아냐! 호박이 나쁘면 수족이 평생 고생한다더니, 너 같은 놈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그래, 그래, 됐어! 그리고 넌 이쪽밑을 잡고, 옳지, 그렇게!" 극성스런 위치 선정이 끝난 다음, 아까와는 반대 방향에서 작업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인사계의 구령과 우리들의 굵고 힘찬 함성이 터져오른 뒤, 뒤집혀졌던 돌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목 없이 울부짖는 듯한 그 자태 위에 이제는 수십 가닥의 쇠사슬까지 묶여 있었으니 그 처절한 자태란 가히 형용키가 어려울 정도였다. 여러 가닥으로 돌의 등피를 뒤덮은 쇠사슬의 중심점을 기중기의 후크Hook에 걸고 났을 때 인사계는 비로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군대라지만 이런 폭우 속에서 작업을 강행한다는 건 생사를 걸어둔 전쟁이 아닌 한 미친 짓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그도 했음이리라. "운반 작업은 내일 오전 중에 계속할 테니 철수 준비를 해라. 크레인과 트럭은 현 위치에다 그대로 두고, 나머지 삽과 지렛대, 기타 장비는 빠짐없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해라. 수고 많았다!" 인사계는 일단 옮길 준비를 완료한 것만으로도 상부에 대한 자신의 보고가 궁색하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대로 복귀하는 동안 나는 내내 수리에 관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그에 관한 생각은 어둡고 눅눅하게 나의 머리 속을 빈틈없이 점령해 왔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해 봐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예견키 어려운 절망적 그림자가 암회색의 날빛보다 더욱 어둡게 시야를 가로막았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10. 일요일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우는 그 기세가 조금도 누그러지질 않은 채 월요일 아침가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억수로 쏟아져내리는 빗줄기와 광란하듯 휘몰아치는 바람소리가 막사 곳곳을 온밤 내내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걷어차고 쥐어흔드는 통에, 우리 모두는 그 감미롭고 부드러운 새벽녘의 꿀잠을 송두리째 잃어버려야만 했다.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날 강변으로 나가 비를 쫄딱 맞으며 돌을 운반하기 위한 작업에 시달려야 했던 내무반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천재지변으로 인해 잠마저 정량(定量)대로 잘 수 없는 날씨에 대한 감정을 오드득오드득 어금니로 짓씹으며 하나 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런 니미랄 날씨라니, 아예 똥창이 빠진 터수로구만" 내무반장이 웅얼거리며 첫담배를 입에 물었다. "전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잤어요" 먼저 일어나 앉아 있던 내가 성냥을 그어 그에게 들이밀자, 그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오늘 수리 귀대하는 날이지?" 여전히 어둠이 빼곡 들어찬 창유리 위로 번들번들 빛을 발하며 흘러 내리는 질펀한 물줄기를 관망하던 내무반장이 뜻하지 않게도 수리를 상기하기 시작했다. "이박 삼일이니까, 오늘이 맞습니다" "돌아와서 참모가 그짓 해 놓은 거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까?" 평소의 그답지 않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게다가 수리를 걱정하고 있는 듯한 어투였다. "글쎄, 저도 내심 그게 궁금합니다. 성격이 워낙 괴이쩍어 놔서 뭐라고 예측을 못하겠군요" "따지고 보면 그 놈도 참 안됐어. 그 놈 얘기하는 게 늘 너무나도 옳은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놈을 괴롭혔는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 흡사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진솔하게 회고하는 늙은 사람의 그것처럼,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눅눅하고 담담해 보였다. 어찌된 일인가. 그가 이제야 비로소 수리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괸 것인가. 이해가 아니라면, 수리가 군대라는 조직 사회에서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처절하게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이 첫새벽에 갑자기 가엾게 여겨져서 하는 말인가? "......" 나는 더이상 내무반장에게 해야 할 말이 없었다. 수리가 얘기하는 게 늘 너무나도 옳은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수리를 괴롭혔는지도 모른다는 내무반장의 얘기가 예리한 쐐기처럼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꽤 오래 전--구체적으로는 안개에 뒤덮힌 강변에서 수리가 작업에 몰두해 있던 광경을 목도하던 그날밤 이후-- 부터 그에 대한 인간적 이해와 긍정적인 평가를 구체화시켜 온 터였지만, 그것이 그를 대할 때마다 생성되던 나의 참괴지심(慙傀之心)을 완화시켜 주기는 커녕 오히려 내면적인 고통의 심도를 더욱 깊어지게 했던 것이다. 무슨 얘기인가. 그의 행동 원칙에 대한 동류로서의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라는 존재의 존립 근거는 더욱 불투명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그로 인해 자아가 자아를 배반하는 어처구니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가 하면, 시궁창에라도 머리를 쑤셔 박고 싶을 만큼 낯부끄러워지는 비참한 감정적 순간까지도 무시로 찾아들게 되더라는 얘기인 것이다. 그리하여 내 스스로 내 자신에게 <사이비>라는 낙인을 찍어야 하는 쓸쓸한 현존(現存).감찰참모의 권유를 받아들여 열외 생활이라는 육체적 안락을 얻었지만, 그로인한 정신적 자괴감만은 더욱 심화되는 나날이었다. 사이비의 근황이 아니고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어둠이 스러지고 아침이 되었으나 세상은 여전히 침침하고 음습하기만 했다. 아침이 아니라 저녁 무렵을 연상케 할 만큼 온 세상이 어둑어둑해 보였다. 너울너울 춤추듯 날아가는 무리진 빗줄기 사이로 간간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사물이 온통 암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납게 휩슬려다니는 강풍은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집단 폭행을 자행하고 있었고, 그것을 견디다못해 어깨가 찢어지거나 허리가 부러진 나무들은 아예 반항을 포기한 채 죽은 듯이 쓰러져 있거나 얼어붙은 듯이 서 있기만 했다. 그럴라치면 강풍은 여지없이 그 머리채를 휘어잡고 거칠게 흔들어대거나 사정없이 쥐어뜯다가 제풀에 지치면 또다른 곳으로 옮겨가곤 했다. 전율할 만한 광경이었다. 비바람의 횡포가 어찌나 가공할 만한 것이었던지, 병영의 아침은 일과가 시작되기 직전의 그 소란스런 북새통도 완전히 망각한 채 깊고깊은 심해를 잠항하는 거대한 잠수함처럼 음험한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중대원들이 각 처부의 업무 지원을 위해 중대를 떠나고 난 한참 뒤까지도 나는 텅 빈 내무반에 혼자 서서 물끄러미 창밖만 내다보고 있다가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천천히 판쵸를 뒤집어쓰고 비품 수리반 창고를 향했다. 중대 막사를 벗어나 주도로를 따라 십 분쯤 걸어 올라가면 수송부가 나오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오 분쯤 우측을 돌아가게 되면 산자락을 끼고 지어진 낡은 벽돌 건물이 나오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내 작업실로 마련된 비품 수리반 창고였다. 창이라곤 책보자기만한 것 하나밖에 없어서 대낮에도 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만큼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공간-- 거기가 바로 내 열외 생활의 근거지였던 것이다. 첫새벽부터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은 창고로 올라온 뒤에도 좀체로 가셔지질 않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판쵸를 걸친 채 한동안 ㄴ나간 사람처럼 서 있기만 하다가, 천천히 판쵸를 몸에서 걷어내 벽에다 걸고는 힘없이 맞은편 벽쪽에 설치된 캔버스 앞으로 걸어갔다. 가능한 큰 걸로, 거 왜 대작이란 거 알지, 대작....... 감찰참모는 무조건 큰 것이면 좋다고 했다. 그림의 내용은 아무래도 좋으니 무조건 크게만 그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테면 크기에 따라 작품의 구색을 갖추고 싶다는 맹목적인 욕구인 셈이었다. 철저한 속물의 지독스런 소유욕이었다. 그런 지나친 소유욕이 결국은 수리의 돌조각마저도 물불 가림없이 수중에 넣겠다는 심보를 여지없이 드러내게 했으니, 영내를 벗어난 곳에서 침해를 우려하지 않으며 자신의 내면을 자유롭게 형상화하고자 했던 수리도 결국은 감찰참모에게 허를 찔린 셈이었다. 나의 캔버스는 비어 있었다. 철저하게 공백으로 확인된 예술에 대한 나의 자의식을 그대로 반영하듯, 캔버스는 전체가 고스란히 여백으로 남겨져 있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할라치면, 늘 <무엇을 위해 그리려 하는가?> 라는 자문이 의식을 뒤덮어왔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그려야만 하지 않겠는가?> 라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라치면, <의식에까지 규격화된 제복을 입힐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는 수리의 외침이 이마를 후려쳤다. 요컨대 예술의 본령이 현실로부터 침해를 받아서도 아니 되겠지만, 현실과의 타협을 기도해서도 아니 되리라는 당위성을 놓고 수리와 나는 극단적으로 대립된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리와의 보이지 않는 내면적 대립이 시작된 이후, 나는 내 자신을 늘 이런 식으로 변명해 오고 있었다. 예술의 본령을 향한 현실의 개입이 극단적으로 심화된 경우에는 그 본령을 고수하기 위해 오히려 타협하는 제스처를 가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현실의 존속이 영구적이지 않는 한 타협은 자연히 잠정적인 것이 될 것이요, 오히려 그런 타협의 결과로 양호한 창조행위가 보장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행위 이전의 인간적인 자세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소아병적인 발상이 아니겠느냐 --- 내 생각은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수리의 견해란 나의 그것과는 극적인 대립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는 아예 <타협>이라는 어휘 자체를 경멸하고, 도외시하고, 그리고 죄악시하는 쪽이었다. 창조적인 예술행위란 그것이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한 순수한 양심의 발로에 의거된 것이라야만 비로소 올바른 작품으로서의 평가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현실의 침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협을 꾀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이미 본질적인 영감과 자유로운 상상력은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거나 변형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어느 시대에나 예술의 본령을 향한 현실의 침해는 부단히 계속되어져 왔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름아닌 현실 속에서 극복한 예술가는 얼마든지 있어 왔다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존재의 표상이란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금껏 그가 유지해 온 일련의 행동도 그런 견고한 표상 의식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원칙적인 면으로 볼 때 수리의 주장은 타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원칙적인 만큼 그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에서 설득력을 발견하게 되면, 나의 주장에서는 분명코 예술에 대한 얄팍한 신조나 기회주의적인 냄새를 맡게 되리라. 한동안 계속되어져 오던 이런 유(類)의 내면적 대립이 수리 쪽으로 그 우세를 몰고가게 된 것은, 그러니까 강변에서 돌을 쪼아대던 그의 모습을 내가 목도하던 그날밤 이후부터가 되겠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의지를 현실에다가 관철시키고자 하는 한 인간의 가공할 만한 집념이 미미한 존재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던 내 자신에게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 찾아들기 시작한 나의 내면적 몰락은 그 엄청난 충격의 여파만큼이나 참담하고 고통스런 것으로 일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로 어제, 수리의 돌조각이 감찰참모의 지시에 의해 차가운 쇠사슬로 결박당하는 어이없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사실 나는 그동안의 참담했던 감정적 열세로부터 내 자신을 한순간에 이끌어올릴 수 있는 새로운 결과론적 발판 하나를 마련할 수 있었다. 타협을 거부한 채 현실을 극복하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창조행위의 완성 단계에까지 이르렀을 때, 기습 공격을 감행하듯 그 현장을 갑작스럽게 침범하여 창조 행위의 동기로부터 결과까지를 송두리째 몰수해 버리는 현실의 끔찍한 강권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떤 극복의 자세를 취할 수 있을 것인지, 수리가 귀대하게 되면 나는 그것부터 물어볼 참이었다. 이제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중대본부 행정병인 고일병이 문을 밀치고 헐떡거리며 창고 안으로 들어선 것은 내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판쵸의 후드를 뒤로 넘기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중대로부터 여기까지 뛰어온 모양이었다. "어쩐 일이야?" 잠시 숨을 돌리고 선 그에게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빨리 중대로 내려오랍니다" 더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단 듯 판쵸의 후드를 전투모 위로 다시 뒤집어쓰며 그는 빠르게 말했다. "왜?" "감찰참모하고 중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날 기다린단 말야?" "예" "이유가 뭐야?" "한상병 문제 때문인 것 같은데, 정확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창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기다려, 그럼. 같이가자" "서두르세요" 나는 벽에 걸어두었던 판쵸를 다시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창고 문을 걸고 그와 함께 중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넨장, 이런 날씨에 무슨 일로 부르는 거지?" 판쵸를 뒤집어쓰나마나, 달리는 동안 얼굴로 몰려드는 물줄기를 연신 손으로 훔쳐내며 나는 투덜거렸다. "오늘 한상병이 귀대하는 날이잖아요?" 빗줄기를 뚫고 달리며 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확한 건 잘 모르는데, 한상병이 귀대하면 그 돌 때문에 골치가 아파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누가?" "누군 누구예요? 감찰참모죠" "어쩌겠다는 거야?" "구체적인 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내려가면 알게 되겠죠 뭐" "......"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녀석은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 같았다. 다그쳐 캐물어 볼까 하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중대에 이르게 되면 어차피 알게 될 일,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어서 와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중대장실로 들어서자 감찰참모가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라" 중대장이 철제의자를 가리켰다. "자, 중대장하고는 얘기가 다 됐으니까 긴말 제하고 본론만 얘기하겠다. 너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수리를 특박 보내고 그 사이에 돌을 운반하려 했던 게 애초의 내 계획이었는에 폭우 때문에 그게 뜻대로 되질 못했다. 한수리의 귀대일이 오늘인데 그걸 운반하지 못하고 저렇게 방치해 뒀으니 그놈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이렇게 너를 부른 거다. 해서 지금 중대장하고 의견을 나누었는데, 오늘 20시까지 수리가 귀대해 오면 즉시 네가 한수리와 같이 경비중대 5분 대기소대로 지원 근무를 나가라. 근무자 편성표를 그렇게 짜 놓을 테니까, 오늘하고 내일 이틀 동안만 대기소대 지원 병력으로 나가 있는 거다. 넌 그저 녀석을 따라다니면서 행여 딴짓 못하게 감시만 하면 되니까 그리 신경 쓸 건 없다. 5분 대기소대장한테도 내가 얘기를 해 뒀으니까 부담 같은 건 안 가져도 된다. 그래도 혹시 녀석이 어제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게 되면 네가 사랏ㄹ 구슬려서 내일 오전까지만 아무 짓 못하게 해라. 내일 새벽부터는 폭우가 멎는다니까 공병대 병력을 시켜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게다. 내일 오전까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참모의 계획은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어떻게 그토록 치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까...... 나는 참모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요컨대 참모의 계획은 군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제도적 장치를 통해 수리의 예상되는 행동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경비중대 5분 대기소대는 병력 현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미 반년 전부터 본부중대에서 2명씩을 고정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는 소대였다. 일 주일씩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각 내무반에서 2명씩이 지원되어 왔는데, 나도 꼭 한번 지원을 다녀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5분 대기소대란 무궁무진하게 대기되는 시간을 끝없이 살륙해 나가야 하는 <시간 도살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아무 할 일도 없이 오로지 대기로만 일관되는 24시간. 전투화도 벗지 못한 채 침상 곳곳에 쭈그리고 앉거나 누워 있다가, 비상벨이 울리며 들볶이는 콩낱처럼 튀어올라 출동을 서둘러대고, 그제서야 <타격대>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는 곳. 하지만 비상벨이 울리는 걸 그 일 주일 내내 나는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출동이 없는 한 모든 시간이 다 자유로운 시간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천만의 말씀! 그건 자유 시간이 아니라 덫에 치인 시간이라고나 해야 옳을 것이었다. 화장실 다녀오는 일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아예 내무반을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었으니 그야말로 지은 죄 없는 병정들의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수리를 그런 창살 없는 감옥에다 합법적으로 가두어두고 옴쭉달쭉도 못하게 발목에 덫을 채우려 하는 감찰참모의 계략이 얼마나 놀랍고 용의 주도한 것인가를. "오늘은 창고로 올라가지 말고 중대에서 쉬고 있다가 산수리가 돌아오면 즉시 대기소대로 가라" 감찰참모는 손을 들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잘해 보라는 투로 말을 마쳤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중대장은 사뭇 표정이 굳어 있었다. 수리의 전력을 알고 있는 중대장으로서는 어제 오늘 진행되고 있는 이 일을 결코 달가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군대란 어차피 계급에 의해 움직여지는 불가항력적인 조직체인 걸.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경례를 하고 중대장실을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마침 근무자 편성표를 게시판에 붙이고 있던 고일병이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알고 계시죠? 오늘부터 타격대 지원 병력이라는 거" "다 알고 있으면서 사길 쳐? 죽을라고......" 내막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능청을 떨었던 녀석에게 나는 낮은 목소리로 짓씹어 뱉고는 곧바로 내무반으로 돌아와버렸다. 텅 빈 내무반으로 돌아와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가 나는 매트리스를 펼치고 전투화를 신은 채로 그 위에다 몸을 눕혔다. 아비지옥을 연상케 하는 비바람의 광포(狂暴)는 그때까지도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었다. 텅 빈 고동으로 밀려드는 그 엄청난 음위(音威)속에서, 나는 강한 내부의 진동을 감지해내며 망연히 내무반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모든 사물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몰락의 전조와 같은 진동. 감찰참모의 충격적인 계략이 몰고오는 진동으로 인해 나는 오랫동안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아아, 혼돈과 모순으로 진동하는 이 세계.......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곤란하고 힘겨운 일, 그러면서도 최상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일이란 누가 뭐래도 부패하지 않은 의식을 계속 보유하는 일이 되리라. 실로 인간이라는 존재로 이 세상에 던져진 이후, 덕목을 잃지 않은 존재의 표상으로 자신의 삶을 끝까지 이끌어나간 사람이 대체 누구였을까? 아무리 눈부신 이름들을 떠올려 보아도 마땅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이란 어차피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부패한 의식의 또다른 이름인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 편견에 사로잡혀 모든 판단을 행사케 된다는 점에서 실로 때묻지 않은 조재의 표상이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란 부패하지 않은 의식을 계속 보전하면서 자신이 설정한 내면의 표상을 향해 끝없이 도전해 나가야만 성취될 수 있는 정신의 소산일 수밖에 없는 것. 그리하여 예술가들이란 쟁투와 질투, 야망과 절망, 책모(策謀)와 불성실 등이 소용돌이 치는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부패되지 않은 의식을 소유한 마지막 존재의 표상으로 남겨지고자 하는 자신과의 싸움을 그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완전한 덕성(德性)의 심상 -- 그 빛나는 표상에 이르고자 하는 존재의 갈등. 모든 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에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염두에 두고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면서 집요하게 추구해 왔던 세계에 대한 관점이라는 것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허망한 주마등적(走馬燈的) 광경이었던가.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완전한 덕성의 심상, 그 빛나는 표상에 이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던 것을 .......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대신 중대창고로 들어가 비축해 두었던 소주 반병을 마셨다. 궂은 날, 불편한 심사에 소주나 들이키고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밖에 달리 더는 드는 게 없었다. 내가 도대체 뭔데 감찰참모와 수리의 틈바구니에 끼어 이 고생을 하는가 싶어 만사가 그저 귀찮고 짜증스럽게만 여겨질 뿐이었다. 연루되지 말자, 연루되지 말자! 소주를 마시면서 나는 계속적으로 내 자신에게 다짐을 주었다. 모든 것을 그들의 문제로 타자(他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행여 감정적 중립을 고수하지 못하게 되면 그 이후에 야기되는 모든 문제들이 나로 인해 좌지우지외었다는 억울한 누명만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수리에게는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 줘야 한다. 그리고 자제해 달라는 설득이나 해볼 일이다. 어차피 대기소대 지원에 동행하는 나를 그는 결코 상서롭게는 바라보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내무반으로 돌아와 다시 매트리스 위에 몸을 눕히자 어떤 거대한 흡반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몽롱하고 나른한 심신의 어느 부분에선가 난마처럼 뒤얽혔던 의식의 실마리가 또다시 풀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혼돈과 모순으로 진동하는 이 세계....... 고뇌와 갈등이 스스로에 의해 무가치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해체되는 쓸쓸한 지점--거기에 세속적인 명성과 영리, 부귀와 영화가 자리잡게 되리라. 그리하여 무형의 가치와 치열한 쟁투를 벌이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들에 있어서는 오히려 세속적인 명성과 영리, 부귀와 영화가 훨씬 우월한 대상(代償) 가치로 작용되게 되리라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현실과 타협하고 그것에 맹종함으로써 육체적, 정신적 안락을 추구하는 나 같은 인간이 바로 그 대표적 유형이 아닌가. 나는 수리와 같은 유형이 추구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선험적인 주관을 현실의 관념으로 실현시켜 나가는 일. 그리고 그 선험적 주관과 현실의 관념 사이에 자신의 감각은 은거하면서, 바로 그곳에다 조화된 미의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끝없는 시도--그게 바로 수리라는 조재의 정신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핵(核)이요 요체일 것이었다. 하지만 혼돈과 모순이 팽배한 이 세계에서 인간의 감성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얼마나 무궁무진하게, 그리고 쉴새없이 굴종을 강요당하게 되고 그로인해 예술가로서의 참다운 덕성을 유지하고 성육(成育)시켜 나가기가 힘겨워지게 되는가. 차라리 도덕경(道德經)의 한 구절을 읊어 주면서 너의 작업은 성공적이었다, 이제는 네가 그 작품에서 손을 뗀다고 해도 네가 추구하고자하는 이상에의 집념이 손상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던져라, 포기해가, 너의 작업은 끝난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 차분하게 그를 설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의식의 저 깊은 심연으로 잠처럼 혼곤하게 잦아들었다. 활 줄[弦]을 꽉 죄어 보라, 잘 매어지려 하지 않으리라. 칼날을 더 날카롭게 갈아 보라, 그 칼날도 곧 둔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하는 일이 성취되었으면 물러설 일이다. 그것이 곧 하늘의 길인 것이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의식으로 날아드는 어떤 둔탁한 소리의 훼방에 의해서였다. 누군가가 내무반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내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자신의 관물함을 열고 무었인가를 정리하고 있던 소음의 주인공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수리였다. "언제 왔어?" 나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귀대 시간이 20시로 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이른 시각에 귀대를 했으니 뜻밖이라서였다. "방금 왔습니다" 억수같이 퍼부어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온 듯, 그의 옷은 빈틈없이 비에 젖어 있었다. "아직 시간이 멀었잖아?" "할 일이 없어서요" 휘몰리는 강풍에 벽살을 움켜잡힌 내무반 창유리가 부서질 듯 덜컹거렸다. "우리 둘이 오늘부터 5분 대기소대 지원 나가야 돼" "고일병한테 얘기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관물함에서 전투복과 속옷을 꺼내들며 관심없다는 투로 말했다. "고일병이 다른 얘긴 안 해?" 어제 있었던 그 일에 관해 그가 알고 있는지를 묻는 말이었다. "무슨 얘기요?" 옷을 갈아입기 위해 혁대를 풀던 그가 동작을 멈추고 섬뜩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머리를 스쳐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옷부터 갈아입어" 어차피 얘기는 해줄 작정이었지만 일의 심각성을 고려해서 대화를 좀더 진지하게 시작해야 하리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는 손에 들었던 전투복과 내의를 아예 침상 위에다 던지고는 내 옆에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옷부터 갈아입으라니까. 창고로 가게" "창고는 왜요? 그 얘기죠!" 눈을 커다랗게 치뜨고 급박한 어조로 되물어오는 그의 얼굴이 처음 대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생소하게 보여졌다. 살이라곤 없어보이는 얼굴에 이젠 광대뼈까지 불거져 있었다. 오직 눈빛 하나만 살아서 번들거리는 듯한 그의 얼굴이 측은하다는 생각을 자아내게 했다. "......" 대답없이 고개만 두어 번 끄덕여 주자 그는 주저없이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수치심 같은 건 잊은 지 오래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팬티와 러닝셔츠를 벗고 새것으로 갈아입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일이 분도 되질 않았다. 복도 끝에 위치한 중대 창고는 그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분위기 때문에 긴밀한 얘기를 주고받거나 금지된 음주를 위해 중대 고참들이 가끔씩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비축해둔 소주도 두 병이나 있었다. 창고 문을 열자 눅눅한 곰팡내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삽, 괭이, 낫, 마대, 쇠스랑, 싸리비 등속 외에도 외부로 내놓아 구질구질하게 보인다 싶은 것은 모두 그 안에 처박혀 있었다.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로 난 창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창고 안은 완벽한 암중(暗中)이었다. 빛이라곤 오로지 중대 복도에서 새어드는 희미한 몇 가닥의 빛줄기밖에 없었고, 수리와 나는 그 빛을 앞세워 싸리비 위에다 간신히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무슨 얘깁니까?"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그가 물었다. "어제, 강변에서 작업을 했다" "무슨 작업을요?" "그 돌을 사슬로 묶어 기중기에다 연결해 놨어" "누구 지시로요?"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감찰참모" "......"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어디로 옮긴답니까?" "자기 숙소로" "언제요?" "내일 오전에" "그래서 날 5분 대기소대로?" "그런 셈이다" "......" 분노 때문인지 어이가 없어서인지 그는 입을 다물고 맞은편 벽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잊어버려.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는 거 아니냐" 그가 그 작품에다 쏟아온 정열을 내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이상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뜻이 있을 수 없는 일개 돌덩어리에 불과한 그것을 수리가 잃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유사한 재료는 이 세상 곳곳에 수도 없이 널브러져 있을 것이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그것을 다듬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수리의 일거 일동을 눈여겨 보면서 그의 그 꼿꼿한 강직성 때문에 한때는 설득도 해보고 한때는 괴롭히기도 하다가, 끝내는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 쪽으로 기울어진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하찮은 돌덩이라 할지라도 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그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의지로 그 돌을 조각해 왔으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변변치 못한 건강마저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외적 악조건 속에서도 오로지 그 돌을 조각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내밀한 정신적 희열만으로 그가 생활의 맥락을 이어왔다는 보이지 않는 사실까지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잃게 된 것이었다. 불운이라든가 불행, 또는 운명과 같은 상서롭지 못한 일들은 그렇게 어느날 갑자기, 참으로 한순간의 기롱지거리처럼 인간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인지도 몰랐다. 감찰참모와 수리가 지닌 예술이 도대체 무슨 함수관계가 있길래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도래시킨단 말인가. 요컨대 이제 남겨진 문제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렇게도 힘겹고 어렵게 자신을 지켜나온 그가 이런 상황을 두고 선택할 수 있는 게 달리 무었이란 말인가. 체념 -- 그것만이 이제 그의 목전에 떠오른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체념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거기에는 상식과 상상의 차원을 넘어선 파행적 불행만이 남게 될 게 분명했다. 선택하기 힘겨운 기로에 있음을 말해주듯 그의 침묵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침묵을 견뎌내던 끝에 나는 가을에 사용하기 위해 쌓아둔 벽 쪽의 싸리비 틈새에다 손을 넣어 비축해 두었던 소주병을 꺼냈다. "마셔" 벽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손에 들려진 소주병을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좀 가라앉을 거다" 나는 술병 든 손을 그에게 좀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그는 천천히 그것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두 번으로 나누어 꼬박 반 병을 비웠다. 그리고 그 나머지 반 병을 그는 내게 되돌려주었다. 나도 그처럼 두 번으로 나누어 나머지를 비웠다. 안주도 없이 마신 술이 고스란히 위로 옮겨져 출렁이기 시작했다. "어쩔 생각이냐?" 나는 단절되었던 대화를 계속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뭘 말입니까?" "이젠 포기를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냔 말이다" "......" "포기하는 법도 좀 배워 봐라" "그런 걸 다 터득한 뒤에 시작한 일입니다" 갑자기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네 기분 나도 이해한다만" "이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절대적인 문제니까!" "이런 여건 속에서 문제를 절대화시킨 너에게도 잘못은 있어" "내 자신에게는 필연적인 일이었을 뿐입니다" "필연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이 있는 거 아냐?" "방법론이 동원되는 게 무슨 필연입니까?" "그럼 이제 어쩌겠다는 거냐?"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를 못하겠다는 뜻인지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아주 잠시 격앙되었던 서로의 감정이 그만큼 짧은 시간 도안의 침묵을 통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수리야" 나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은 체념하거나 절망해야 할 때가 아니니까요"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 그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희망적이냐?" "절망하지 않는다는 게 반드시 희망적이란 뜻은 아닙니다" "지나친 돌이 아닐까?" "글쎄요. 많은 독이 편안한 잠을 가져다 줄 때도 있으니까요" "......"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그래. 걱정하지 않게 되길 빌겠다. 자,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경비중대로 가려면 조기 급양을 받아야 돼" [생각 없습니다. 들고 오세요" "......" 나는 더이상의 대화가 무익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의 감정상태가 지금과 같아서는 어떤 종류의 얘기도 그에게 힘이 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씁쓸한 판단이었지만 그가 결코 외부로부터의 조력을 기대하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으 문제를 그의 문제로 방치해 주는 게 오히려 그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두운 창고에 그를 혼자 남겨놓은 채 나는 복도로 나섰다. 오후 네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복도에는 형광등이 밝혀져 있었다. 부유스름한 빛살이 끈끈한 타액처럼 흘러내리는 낡은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나는 문득 수리가 탈영을 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초번 근무자와 타격대 사병들을 위해 조기 급양되는 석식을 가는 사이 내 속에 도사리고 있던 강력한 의식의 반발로 인해 보기좋게 묵살당하고 말았다. 탈영이란 체념이 아니라 도피이므로. 그리고 그가 도피를 생각할 정도라면 이미 옛날에 모든 것을 체념했을 것이므로. 그는 그 자신으로서 그의 문제에 정당해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젓가락을 주지 않는 숟가락만으로의 군대식 식사를 시작했다. 틀림없이 어떤 결정으로든 그는 자신의 세계를 침범코자 하는 외부세력에 대해 당당해질 수 있으리라. 그러니 내가 그를 이해하고 위로하려 했던 건 결국 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어설픈 시도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흡사 고양이가 쥐새끼를 생각하듯, 위로하는 태도를 내 자신에게 까지도 꾸며보임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자 하는 얄팍한 실리욕(實利欲)에 그것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신적 욕구가 없는 속물스런 고양이떼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쥐새끼였다. <정신적 작업이 없는 자의 여가는 죽음이요, 살아 있기는 하지만 무덤이나 마찬가지>라는 세네카 식의 고정관념을 지닌 영악스런 쥐새끼였다. 혹은 <대다수 사람들의 머리 속이 표면적이고 천박한 사상, 좁은 개념, 어이없는 근성, 변덕스런 견해, 오류 등으로 차 있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게 되면 이런 일에 대해 점점 더 무관심해지게 된다>는 쇼펜하우어 식 발상의 극에 달한 쥐새끼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갖은 고난과 굴곡으로 인해 그 의식의 원형이 자의사와 무관하게 마모되고 변형되는 게 상례이거늘, 그는 그것을 철저하게 죄악시하는 아주 희귀한 종자였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며, 어떤 힘이 그 갖은 고난과 굴곡 속에서도 그의 의식이 마모되지 않고 변형되지 않게 지탱시켜 준 것일까. 말하나마나 그것은 예술에 대한 그의 온전하고도 철석(鐵石)같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허울 속에서 현실의 악조건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양심을 포기하고 또한 변형시켜야 했으며, 그로인해 열어보일 수 없는 내부의 고통으로 의식이 썩어 문드러지는 비참한 생애를 보내야 했던가. 예술이 역사와 결부될 때 우리는 어느 누구든 자신의 자화상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 고흐 시대의 자화상에 귀가 없다면 우리 시대 예술의 자화상에는 무엇이 없어야 하는 걸까. 의식이나 양심의 부재 현상, 또는 거세 현상을....... 아. 그 순간, <바로 그것이었구나!>하는 생각이 폭죽처럼 머리 속에서 터져올랐다. 반 고흐의 자화상과 이 시대의 자화상 사이로 떠오른 몇 개의 단어들 -- 의식이나 양심의 부재 현상, 또는 거세 현상--이 순식간에 한 데 어우러져 폭죽을 터뜨려올린 것이었다. 이 시대 예술의 초상을 나는 수리를 통해 본 것이었다. 그 울부짖는 듯한 자세, 가슴을 일으켜 세워 항거하는 듯한 몸체. 그러나 머리가 없다는 숨막히는 단절감. 그것이 바로 수리가 만들어낸 이 시대 예술의 초상이었던 것이다. 이 시대 예술이 머리통을 송두리째 잘리웠다는 비참한 단정! 나는 숟가락을 놓았다. 의식의 깊은 침잠이 나의 저작기를 다른 사람의 그것으로 여겨지게 할 만큼 식욕이 말이 아니었다. 잔반(殘飯)을 버리기 위해 자리를 일어서려 할 때 본부중대 사병들이 이제 마악 식당 입구로 들어서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나는 벗어 두었던 판쵸를 재빨리 뒤집어쓰고 자리를 떴다. 17시 50분에 수리와 나는 경비중대가 있는 맞은편 막사로 가기 위해 중대 건물을 벗어났다. 석식을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판쵸 행렬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개중에는 판쵸를 텐트의 플라이처럼 펼쳐 들고 미친듯 사병 식당 쪽으로 달려가는 사병들도 있었다. 온종일 퍼부어댄 빗발은 연병장에다 갖가지 모양의 사행천을 수도 없이 만들어나가고 있었고, 연병장 주변의 코스모스들은 비바람을 견디다못해 아예 비바람이 휘몰리는 쪽으로 고스란히 몸을 눕히고 있었다. 정문 초소를 향해 뻗어나간 주도로변에는 플라타너스 잎새들이 수도 없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것은 흡사 대학살이 몰고온 떼주검을 목도케 하는 것 같았다. 5분 대기소대의 임무 자체가 대기에만 있어서인지 대기소대의 내무반 정경은 웬지 모르게 떠나가는 집처럼 을씨년스럽고 살풍경하기만 했다. 출입문 좌측의 총가(銃架)에는 개인 화기 및 자동 화기, 유탄 발사기, M60 따위들이 세워져 있었고, 내무반 곳곳에는 읽다 팽개친 주간지와 신문 따위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소대원들은 전투화를 신은 채로 침상 이곳저곳에 누워 나뒹굴고 있었다. 소대장으로 보이는 젊은 중위는 사병과 마주앉아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는 지원 병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단 듯 몇 개의 장기알을 손아귀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행마(行馬)에만 골몰하고 있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참, 한수리가 누구야?"라고 갑작스럽게 물어왔다. "전데요" 수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소대장은 수리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뜻모를 웃음을 씨익 입가에 지어보였다. 보나마나 소대장은 감찰참모의 언지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었다. 5분 대기소대장한테도 내가 얘기를 해 뒀으니까, 부담 같은 건 갖지 않아도 된다....... "편할 대로 아무 데나 앉아서 쉬쇼" 사뭇 어정뜬 우리가 보기에도 안됐는지 침상 ㄲ 쪽에 팔베개를 하고 모로 누워 있던 병장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침상의 빈 자리를 골라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취침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불침지대(不寢地帶)에서, 출동이 없을지라도 이런 형국으로 어설프게 밤을 지새워야 할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한 게 지레 맥진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을 철저하게 살육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둠이 내린 뒤부터 비바람소리는 공명 상자 속에서처럼 그 날카로운 비음(鼻音)의 강도를 더욱 드높이기 시작했다. 마땅히 어디랄 것도 없이 사방에서 되울려나오는 그 처절한 풍성(風聲)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곡소리 이상의 처연함을 느끼게 했다. 지리멸렬한 시간의 완보(緩步)를 잊기 위해 열댓 권쯤 꽂혀 있는 진중 문고본(陳中文庫本)을 이것저것 꺼내 보기도 했으나 도통 집중력이 생겨나질 않았다. 처연한 바람소리 때문인지 웬지 불길한 느낌만 자꾸 생겨났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기도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런 상서롭지 못한 예감은 더욱 끈끈하게 뇌리 끝에 매달려 대롱거릴 뿐이었다. 무엇인가, 종말 직전의 괴괴한 정적 같은 게 희뿌윰한 형광등 빛살을 등에 업고 내무반 바닥과 벽, 천장과 관물한 사이의 음습한 틈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는 듯한 끔찍한 환영만이 언젠가처럼 또다시 어른거릴 뿐이었다. 언제였던가, 목각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던 그날 밤과 똑같은 저 불길지조(不吉之兆).습궐(濕厥)인가,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힘겹게, 참으로 힘겹게, 전투화의 뒷굽으로 짓이기듯 보낸 시간이 자정 무렵에 이르자 대시 소대원들이 하나 둘 침상에다 머리를 붙이기 시작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누워 등걸잠이라도 청해 볼 모양들이었다. 모두들 전투화를 신은 채로였다. 소대장만 버젓이 전투화를 벗고 탄대까지 머리맡에 풀어 놓은 채 매트리스 위에서 단잠을 이루고 있었다. "좀 눕지 그러냐?" 총가 옆에 여전히 웅크리고 앉아 있는 수리에게 나는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이제 앉아 있는 사람은 그와 나 둘뿐이었다. "먼저 누우세요" 양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올려 그는 내 쪽을 건너다보았다. 몹시 측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게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 간신히 침상에다 머리를 붙였다. 비바람소리가, 그 엄청난 풍성이 곡소리처럼 음험하게, 그러면서도 거대한 공동과 함께 갑작스럽게 귓전으로 휘몰려들었다. 몰락의 전조와 같은 진동이 또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낮에 느껴지던 그것보다 훨씬 강하고 지속적인 진동이었다. 아아,혼돈과 모순으로 진동하는 이 세계....... 잠을 청하려던 내가 다시 눈을 뜨고 머리를 치켜든 것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인기척 때문이었다. 몸을 눕힌 지 2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껏 잠을 이루지 않고 있는 사람이 수리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몸을 눕힌 채 머리만 들어올린 나의 눈길과 소대장 머리맡으로 조심스럽게 기어가던 수리의 그것이 한순간에 마주쳐 극도의 긴장감을 몰고왔다. 다른 아무도 나처럼 머리를 들어올림 사람은 없었다. 다만 게거품처럼 뿌우옇게 밀려나오는 형광 불빛만이 그와 나 사이에 형성된 섬뜩한 긴장감을 느긋하게 핥아대고 있을 뿐이었다. "......" "......"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리의 눈빛은 나에게 어떤 묵인을 강요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절박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 "......" 나는 결국 그의 강요를 묵인해 주고 말았다. 도저히 어째 볼 도리가 없었다. 어느 누구든 그 순간의 그 절박한 표정을 보았다면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겨낼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 "......" "......" 내가 묵인의 뜻으로 보일 듯 말 듯하게 머리를 끄덕여 주자 그는 내게 꽂았던 눈길을 한순간에 거두어들이며 다시금 조심스럽게 소대장의 머리맡으로 기어갔다. 그리고는 소대장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드는 것이었다. 실탄이 장전된 권총이었다. 어쩔 셈인가? 나의 눈빛은 이제 내무반 바닥에 우뚝 선 그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모른 체 해주세요.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나의 눈빛을 향해 그의 눈빛은 그렇게 애원하고 있었다. 알았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나는 다시 한번 보일 듯 말 듯하게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고맙습니다....... 여전히 나를 쳐다보면서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입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가 그는 이내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불이 환하게 켜진 내무반에서, 그 짧은 순간 동안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꿈속에서보다 더욱 몽롱하고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부디....... 나는 침상에다 얼굴을 붙니고 아예 돌아누워 버렸다. 이 빗속을 뚫고 나가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소대장 권총까지 들고 났으니 이제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되기는 아예 글러버린 셈이었다. 만류할 걸 그랬는가? 아니다. 그때의 그 눈빛을 보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만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고도 묵인을 했으니 문제가 어떻게 되든 나는 끝끝내 못 본 것으로 해야만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그냥 오래 전부터 곤한 잠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그것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비사앙! 비상! 대기 소대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온 감찰참모가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전투화를 벗고 곤하게 자고 있는 대기 소대장을 마구 걷어차면서 참모는 거의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이 새끼! 지금이 어느 땐데 워카를 벗어던지고 자는 거야! 넌 영창이야, 영창! 빨리 서둘러 출동 못해! 감찰참모가 소대원들의 멱살을 닥치는 대로 마구 잡아끌면서 출동을 서둘러댔다. 참모의 닦달에 쫓긴 소대원들이 황망히 담당 화기를 꺼내들고 이동 차량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너! 엉거주춤 뒷줄에 서서 차량에 오르려 하는 나를 갑자기 참모가 불러 세웠다. 저요? 너 말고 누가 있어, 이새꺄! 다짜고짜로 참모는 내 뺨따귀를 후려쳤다. ....... 뺨을 맞고 나서도 나는 죽을 죄를 진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이 새끼! 넌 다 알고 있었지? 참모는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나는 무릎을 꿇고 참모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댔다. 나중에 두고 보자. 타! 내가 차량에 몸을 싣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 이동을 시작했다. 엄청난 속력으로 차량은 달려나갔는데,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동하는 와중에도 나는 계속 참모에게 지은 죄 때문에 마음을 조아려야만 했다.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 온몸을 부들거리게 만들었다. 내려! 참모의 지시에 따라 우리가 하차한 곳은, 어떤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밑이었다. 저길 봐! 저기다! 참모는 그 까마득한 절벽 꼭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자신이 만든 거북 형상의 돌조각을 타고, 수리가 그 절벽 꼭대기에 우뚝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올라가서 잡아왓! 그 까마득한 절벽으로 기어오르라는 지시를 참모는 했다. 어떻게 저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란 말인가. 모두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병신 같은 새끼들! 저 자식은 그럼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갔어? 엉! 참모의 ㅇ달에 못 이겨 우리는 끝내 그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그 정상에 발을 디뎠을 때 수리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언제 옮겨간 것인지 우리가 발을 딛고 선 그 맞은 편 정상에서 수리는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모두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잡아! 발악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참모의 요구에 못 이겨 얼마나 많은 절벽을 우리는 오르내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 정상으로 올라가면 수리는 매번 그곳에 없었다. 끝없는 숨바꼭질이 계속되는 동안 소대원들은 모두 지칠 대로 지쳐버려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드러눕지 않은 사람은 감찰참모와 나 둘뿐이었다.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고는 있었지만 참모도 더이상은 어째 볼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일루와, 너! 씩씩거리던 참모가 갑자기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고양이 앞에 선 쥐새끼처럼 내가 비실비실 참모 앞으로 다가가자, 참모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손을 마구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분풀이치고는 지독스런 분풀이였다. 눈코 뜰 사이도 없이 마구 날아드는 손바닥을 견뎌내지 못한 채 나는 아예 얼굴을 감싸쥐고 땅바닥에다 무릎을 꿇고 말았다. 너 때문이야! 너! 너! 너!....... 그 까마득한 절벽 위에 우뚝하게 버티고 선 채로, 수리는 내가 맞아 쓰러지는 걸 내려다보며 비웃는 것이리라. 참모나 나나 속성에 안주하기론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속물들이었으니까. 그 속물들끼리 서로 밟고 밟히는 꼴이 오죽이나 우스웠으랴. 그 웃음소리가 나에게는 마치 산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진동. 몰락의 전조와 같은 진동. 그렇다! 웃음소리가 진동을 몰고온 것이었다. 몰락의 전조와 같은 진동을....... "소대장님! 소대장님!" 내가 그 해괴한 꿈에서 벗어난 건 소대장을 깨우는 낮고 다급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수리가 내무반을 빠져나간 뒤에 얼핏 잠이 들었었는데, 그 다급한 목소리가 그만 잠을 깨운 것이었다. "누구야?" 잠에서 깨어난 소대장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기척을 들으면서도 나는 못 들은 체 그대로 자는 시늉을 했다. 혹시나 하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당직하삽니다" 소대장을 흔들어 깨운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자신을 흔들어 깨운 사람이 당직하사라는 걸 알고, 또한 시간이 시간인지라 소대장은 사뭇 긴장된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오늘 본부중대에서 지원 나온 사병 있잖습니까?" 소대원들을 의식해서인지 당직하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명 말이지?" "예" "근데?" "그 두 명 중 한 명이 막사를 벗어나서 안 돌아오고 있답니다. 복도 불침번 얘기로는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오겠다고 해서 내보냈다는데 삼십 분이 지나도 안 돌아오고 있답니다" "뭐라구? 그 새끼 혹시 감찰참모가 얘기하던 그 놈 아냐?" 거기까지 얘기한 소대장이 황급히 침상에서 내려가 전투화를 신고 복장을 갖추기 시작하는 기척이 들리고 곧이어 머리맡에 놓아 두었던 탄대를 끌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앗, 내 권총!>하는 고함이 바로 그 순간 탄대를 끌어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터져나왔다. "야! 전부 기상!" 소대장의 거친 고함 소리가 내무반을 뒤흔들었다. "전부 일어나 봐!" 소대장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오자 소대원들이 번갯불에 튀겨지는 콩낱처럼 튀어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슨 일인가 싶어 저마다 눈들을 휘둥그렇게 치뜨고 소대장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머리맡에 풀어 두었던 내 권총 어디 갔어?" 소대장이 가리키는 머리맡으로 소대원들의 눈길이 일제히 몰려갔다. 그러나 한결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자기 권총 어디 갔는지 자기가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런 표정들이었다. "야! 본부중대!" 소대장이 지목할 인물이 나 말고 누가 또 있으랴. 드디어 올 것이 오는구나.......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예" 나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내무반 바닥으로 내려섰다. "같이 온 한 놈 어디 갔어? 그놈이 한수리지!" 불이 튈 것 같은 눈빛으로 소대장은 다그쳤다. "한수리는 맞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태연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마음대로 되어지질 않았다. "감찰참모가 얘기한 그 돌의 위치가 어디야?" "외곽 4초소를 통해서 강 상류 쪽으로 십 분쯤 더 올라간 지점입니다" "야, 전부 출동 준비해! 그리고 당직하사! 너는 지금 즉시 감찰참모하고 본부중대장한테 이 사실을 보고해!" 감찰참모가 어떤 식으로 소대장에게 언지를 주었는지는 몰라도, 문제를 받아들이는 소대장의 태도가 이미 심상한 범주를 넘어서고 있음은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들볶이는 콩낱처럼 침상에서 뛰어내린 소대원들이 어느새 출입문 옆의 총가에서 담당 화기를 꺼내들고 있었다. 막사 입구에서는 언제 시동을 걸었는지 이동 차량의 엔진 소음이 거칠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도 황급히 군장을 갖추고 총을 꺼내들었다. 차량이 이동하는 동안 소대장은 아무 얘기도 꺼내질 않았다.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눈빛을 번들거리는 게 아무래도 만만찮은 상황으로 인지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휘몰아치는 빗줄기를 뚫고 차량은 순식간에 외곽 4초소 진입로에까지 이르렀다. 진입로에서 하차한 소대원들은 소대장의 뒤를 따라 재빨리 4초소가 있는 언덕까지 이동했다. "영외로 빠져나가는 자 없었나?" 소대장이 근무자에게 물었다. "없었습니다" "없긴 뭐가 없어, 이 새꺄! 확인해 보고 이곳을 통과했으면 그땐 각오해! 알았어?" 말을 마친 소대장은 소대원들에게 언덕 밑으로의 이동을 지시했다. 언덕의 숲을 벗어나 강변으로 내려서자 어둠의 두께는 한층 얇아졌다. 개활지의 희뿌윰한 허공에서는 대취한 술꾼처럼 우연(雨煙)의 무리가 휘청거렸고, 그 휘청거림에 동반이라도 하듯 그 순간 그 강변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광람의 현장과도 같았고,문명의 그림자가 완전히 배제된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향연과도 같았다. 소대장은 소대원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궁형(弓型)으로 흩어져서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꼬박 이틀 밤낮으로 퍼부어댄 빗줄기로 인해 물살은 엄청나게 거칠어져 있었다. 가끔씩 구르릉 꽝, 큼직한 돌덩이들이 거센 물살에 휩쓸려가며 내는 둔중한 마찰음이 수면 밖으로까지 들려왔다. 비바람은 상류로부터 하류 쪽으로 마치 우리들의 조심스런 진행을 완강하게 거부하듯 거칠게 휘몰려 내려왔다. 시계(視界)를 식별하는 건 고사하고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집결하라! 전달! 집결하라!" 우측으로부터 전달이 넘어오기 시작한 건 그런 힘겨운 진행이 한참이나 더 지속되고 난 뒤였다. 무슨 상황인가, 나는 소대장 쪽으로 달려가면서 무심결에 고개를 들고 비바람이 거칠게 휩쓸려 내려오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어둠과 희뿌윰한 빗줄기의 질탕한 교접 속에서 상당히 육중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자, 모두 몸을 낮춰라" 강변의 둑 밑으로 소대원들이 집결하자 소대장은 손바닥을 두어번 내리흔들며 낮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극심한 강풍에 숲을 이루던 풀들이 떼를 지어 몸을 눕히고 있었지만 목표 지점이 20여 미터 전방이었으므로 극히 심하게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목표 지점에서도 식별이 용이하지만은 않을 거리였다. "전방을 자세히 봐라.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엔진 소음이 들리지?" 소대장은 정체가 식별되지 않는 목표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대한 팔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져쥔 주먹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기어이....... 나는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어제 오후에 작업을 나왔던 그 현장이 분명했고, 지금 저 곳에 있는 인물은 수리가 분명했다. 사슬로 묶어둔 돌과 기중기, 그리고 수리가 한덩어리의 어둠이 되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라. 우리로서는 저 자식을 사고없이 부대로 끌고 가야 하니까, 지금부터 1,2분대는 이쪽 산자락을 따라 저 기중기 뒤쪽을 우회애서 10미터 전방까지 포위하라. 그리고 메가폰과 플래시는 내게 넘겨라. 내 명령 없이는 일체의 개별적 판단과 행동을 금한다. 알겠나?" 수리가 총기를 휴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소대장은 다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분대원들이 대답과 동시에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내 옆에 있어" 그는 분대원들과 함께 이동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내 어깨를 나꿔챘다. "알겠습니다" 나는 소대장 옆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나머지 병력은 나를 따라 목표물 전방 10미터까지만 이동한다" 말을 마친 소대장은 소대원들의 개인 간격을 일정하게 이동시킨 다음 목표물인 기중기를 향해 접근하도록 했다. 조심스럽게 기중기를 향해 다가갈수록 엔진 소음은 선명하게 들려왔고, 불투명하기만 하던 목표물도 조금씩 그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0여 미터 전방까지 접근하자 소대장은 왼팔을 들어올려 소대원들을 정지시켰다. 신호를 본 소대원들이 접근을 중지하자 소대장은 들어올렸던 팔을 한순간에 강변의 지면을 향해 내리꽂았다. 엎드리라는 신호였다. 신호를 본 소대원들이 일제히 배를 깔고 엎드렸다. 엎드린 자리에서는 목표물의 식별이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거북 형상의 몸통을 옭아맨 쇠사슬이 기중기의 동비(動臂)끝에 있는 후크Hook에 걸려 있었는데, 엎드린 위치에서 보자니 그것은 흡사 뒷덜미를 나꿔채인 짐승처럼 보였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기관실의 조종석에 앉아 있는 수리의 모습도 희미하게나마 식별이 가능해졌다. 기중기를 작동시킬 심산으로 그는 조종간의 이것저것을 매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주 짧은 순간 시동이 걸려다 꺼지곤 했다. 몇 번인가를 그렇게 시동이 걸렸다 꺼지곤 하더니 드디어 기중기의 거대한 동비가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우렁찬 엔진 소음과 함께 꿈틀거리는 캐터필러. 동비의 움직임에 따라 몇 번인가 들썩이던 돌마저 기어이는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동 가능할 만큼 돌이 들어올려지자 이번에는 차체가 서서히 강을 향해 방향을 바꾸어나갔다. 내 옆에 엎드려 있던 소대장이 메가폰을 입으로 가져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엇을 어쩔 심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저히 더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는 결론을 그는 내린 모양이었다. "한수리 상병 들어라! 한수리 상병 들어라!" 한줄기 낭랑한 비음성(鼻音性)의 음향이 비바람소리와 엔진 소음을 뚫고 나가자 차체의 방향 전환이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엔진 소음만은 고스란히 살아서 귓전을 따갑게 했다. "지금 즉시 기중기에서 내려서라! 나는 5분 대기소대장이다! 지금 즉시 기중기에서 내려서라! 나는 5분 대기소대장이다!" 일단 메가폰을 입에서 뗀 소대장은 대형 손전등을 내게 건네주었다. "조종석을 비춰!" "알겠습니다" 손전등을 건네받아 기중기의 조종석을 향해 스위치를 누르자 쏜살같은 빛줄기가 빗줄기를 뚫고 직사(直射)되었다. 거기 그 빛줄기가 날아간 곳에서는 어둠의 살점들이 한순간의 폭사(暴死)처럼 산산조각으로 흩어져버렸고, 어둠의 살이 흩어진 자리로 그 내장은 고스란히 밀려나와 희뿌윰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확실히 어둠의 내장과 같은 것이었다. 그 참혹한 얼굴 -- 비바람에 짓이겨지고 고통으로 일그런진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조종석에 굳은 듯이 앉아서 자신을 비추고 있는 뜻하지 않은 빛의 발광이지만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는 저 끔찍한 골신(骨身). 하류 쪽의 어둠 속에서 돌을 짓밟고 달려오는 발자국소리가 요란스레 들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돌아보니 두 사람이 빗발을 뚫고 미친 듯 달려오고 있었다. "소대장 어딨어?" 중대장 목소리였다. "그 새끼가 틀림없구나!" 중대장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연 주인공은 다름아닌 감찰참모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총기를 휴대하고 있어서요" 엎드려 있던 소대장이 응용포복 자세를 취하며 쪼그려 앉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메가폰 이리 줘!" 소대장의 얘기를 듣고난 중대장이 소대장의 손에 들려 있던 메가폰을 나꿔채듯 뺏아들었다. 그리고는 과감하게 몸을 일으켜 세워 기중기를 향해 몇 걸음을 더 내디뎠다. "한상병, 나 중대장이다! 내 말 들리는가? 네 요구 조건이 무엇이든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봐라! 한순간 잘못 생각해서 일생을 그르치게 되는 실수를 범하지 말고 어서 네 요구 사항을 말하라!" 중대장이 메가폰을 끄자 수리가 뭐라고인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편의 어느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는다, 한상병! 좀더 크게 말하라!" 중대장은 다시 메가폰을 끄고 응답을 기다렸다. "제발 방해하지 말고 이 돌을 저 강에다 버리게만 해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그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고함을 질렀다. 소리를 지를 만한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알겠다,한상병! 잠시만 기다려라!" 중대장은 이내 등을 돌려 내 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감찰참모 앞으로 걸어왔다. "들으신 대롭니다. 돌을 포기해야 합니다" 중대장은 절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끌어내리면 안 될까?" 감찰참모는 그래도 미련을 버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애를 살려야 할 게 아닙니까? 돌조각 하나 때문에 인명을 잃게 된다면 무슨 수로 그 책임을 지실 겁니까?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다 참모의 욕심 때문에 비롯된 거 아닙니까?" 중대장은 완전히 협박조의 목소리로 감찰참모에게 대들었다. 그는 자기 부하를 사랑할 줄 아는 군인이었다. "썅놈에 새끼! 일만 끝나 봐라!" 수리에 대한 욕지거리를 서슴없이 내뱉으며 참으로 마지못한 동작으로 감찰참모는 중대장 손에 들려 있던 메가폰을 뺏아들었다. "내 부하입니다. 처벌을 해도 내가 할 것이고, 처벌을 받아도 내가 받을 겁니다" 메가폰을 들고 기중기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감찰참모의 등에다 대고 중대장은 노골적인 어조로 으르렁거렸다. "한상병! 네 요구대로 돌을 돌려도 좋다! 더이상 요구할 게 있는가?" 감찰참모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짤막하게 요구 조건을 수락했다. 그때 수리의 입가에 번져 있던 그 짧은 순간의 미소를 본 사람이 있었을까.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손을 들어 <사람들을 산 밑으로 철수시켜 달라>는 시늉을 했다. "전원 이동하라!" 수리의 손짓을 보고난 중대장은 소대원들에게 고함을 질러 이동을 명했다. 기중기를 에워싸고 엎드려 있던 소대원들은 상황이 일단락된 것으로 판단하고 산자락과 연해 있는 둑 밑으로 천천히 모여들었다. 감찰참모를 위시한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들이 둑 밑으로 올망졸망 집결하고 나자 드디어 우렁찬 엔진 소음만 터뜨려올리던 지브 기중기가 강을 향해 주행을 시작했다. 상황이 끝난 뒤에 그가 받게 될 현실적 고통이야 어찌 되었건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 무서운 집념과 정신력의 완벽한 승리 -- 그것은 악전 고투를 무릅쓴 뒤에 얻어낸 위대한 개선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 진정한 예술적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만 나는 예술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예술이 오래 남겨질 수 있다는 이유가 무엇이외까?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종류의 이념과 체제, 혼돈과 고통의 와중에서도 그것은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런 확신이 없는 한 예술은 결코 절대적일 수가 없소이다. 그리고 그런 절대적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지 못하는 한 예술은 어떤 의미로든 한 시대의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하거나 동참하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외다. 많은 예술인들이 이땅 위에서 명멸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각성해야만 할 것이외다....... 야릇한 쾌감 속에서 언젠가 그가 내게 했던 얘기의 내용을 망연하게 곱씹고 있는 사이, 크고 작은 돌들을 짓이기며 달려나간 기중기는 어느덧 강가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이윽고 동비가 밑으로 내려지자 그 끝에 매달렸던 돌이 수면 바로 위로 드리워졌다. 그러나 수심이 얕다는 걸 의식한 탓인지 캐터필러의 앞부분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는데도 시동은 꺼지질 않았다. 계속된 전진으로 돌이 강 한복판의 수면에 닿을 무렵이 되었을 때, 차체는 거의 반 이상이나 물에 잠겨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해냈다. 수면 위에서 대롱이던 돌의 형상이 그 희뿌윰한 어둠 속에서 비로소 어떤 생명력을 부여받은 것 같다는 야릇한 착각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몇 번인가 잠수를 거부하는 몸짓으로 몸을 뒤채이며 잠깐씩 수면 위에서 돌이 기우뚱거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단지 한 덩어리의 돌이요 어둠의 실체일 뿐이었던 그것의 형상이 마치 살아 있는 거북 그대로의 현재(顯在)처럼 보였던 것이다. 목이 없는 거북 형상은 이제 목이 없이도 살아 있을 수 있는 한 마리, 불굴의 생명력을 지닌 거북으로 환생해 있는 게 아닌가! 지상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듯 그 짧은 순간의 부침(浮沈)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을 때, 차체는 거의 다 물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차체는 멈추어지질 않았다. 으으....... 둑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철저한 방관자들처럼 망연하게 구경만 하고 있던 우리 모두는 어떤 기만당하고 난 뒤의 때늦은 안타까움 같은 것으로 치를 떨며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강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강가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다 끝난 뒤였다. 거센 물살이 아주 잠시 커다란 구릉 같은 걸 지어보이다 말았을 뿐, 더이상은 아무것도 발견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사납고 거센 물살이 광란하는 세상 저 바깥 쪽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가는 광경만 우리들의 시야에서 끝없이 넘실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신비롭고 기쁨에 찬 새로운 태동(胎動)으로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도 몇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미친 듯 휘몰아치던 비바람이 씻은 듯 잦아들고, 희뿌윰한 여명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둠을 조금씩 거두어들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강 하류로부터 수묵화처럼 맑고 선연(鮮姸)한 아침이 오고 있었다. 돋을볕보다 더 화사한 얼굴로,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것처럼 수도 없이 영롱한 빛살로 부서져오는 수리가, 거기 그 아침을 몰고오는 장엄한 신기(神氣)속에 있었다. 아아. 그 빛을 향하여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